새마음 훈련13
잠 4: 23
23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뇌에 상처를 입으면 육체의 전체 혹은 일부분이 마비가 되어 불구가 되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뇌 기능이 잘못되면 모든 기억을 상실하여 내가 누구인지 왜 여기에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또한 뇌가 문제가 있으면 말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데 하지 못합니다. 서양에서는 뇌가 죽으면 죽은 것이라고 인정을 합니다. 우리에게 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마음입니다. 마음이 한 번 잘못되면 계속해서 우리 일생을 불구의 몸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들보다 행복의 조건이 좋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종양이 생겨서 행복하지 않습니다. 잘못된 생각, 악한 생각, 부정적인 생각, 서운한 생각이 마음속에 가득차면 매사가 부정적이면서 서운해 합니다.
지혜로운 솔로몬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마음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마음에 파수군을 세우기는 중요합니다. 오늘날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종종 농담반 진담반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나 시험 들었어. 그 사람 시험 들었어.” 시험이란 말을 쉽게 사용합니다. 이 말을 한 번 풀이하면 “나는 마음에 병이 들었어. 마음이 아퍼. 마음에 의사가 필요해” 이런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시험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속지 말라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1:13-17)
시험이 든 성도는 신앙생활에 소홀해 진다. 잘 섬기던 사람도 시험 들면 섬김의 일손을 놓는다. 도대체 시험이 무엇인가? 왜 시험에 드는가? 성경에서 시험은 하나님의 시험이 있다. 하나님의 시험은 우리의 신앙을 성숙케 한다. 우리를 축복으로 인도한다. 그러나 마귀는 시험을 통해 우리가 죄를 짓고, 믿음에서 떨어지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서 마침내 멸망에 이르게 한다. 마귀는 40일 동안 금식하신 주님을 시험하였다. 가장 은혜 충만하고 가장 능력이 충만한 때가 가장 중요한 시점이다. 마귀가 우릴 시험하여 축복을 빼앗으려 하기 때문이다.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사랑하고 육체의 정욕을 따르게 한다.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험과 마귀의 시험을 분별해야 한다. 하나님의 시험은 믿음의 성장을 이루지만 마귀의 시험은 믿음의 길에서 이탈하게 만든다. 그러나 겉으로는 달콤한 유혹으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에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예화) 마귀에게 사로잡힌 사모
어느 목사님 사모님이 있었다. 목사님 부부는 함께 주님을 잘 섬겼던 사람이었다. 사모님은 아름다운 외모와 찬양의 은사를 지니고 있는 분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사모님의 마음속에 이런 마음이 들었다. ‘너는 아직 예뻐. 당신은 도둑질 당한 것이지요. 당신은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어요. 당신이 세상에 나가면 명성과 재산, 인기를 누렸을 것입니다.’ 사모님은 사단이 주는 생각이라고 해서 대적을 했습니다. “사단아, 물러가라” 단호하게 물리쳤다. 그 마음이 사라졌다. 그런데 자꾸만 그 생각이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아름다운 여인입니다. 당신의 인생은 도둑질 당한 것입니다.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음악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고 원래 가수를 지망했던 사람이었다. 목사님과 함께 20년 동안 사역을 해 오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한 번 두 번 여러 번 사단이 주는 생각을 물리쳤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 생각에 동화되어 버렸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그래 나는 아직도 아름다운 사람이야. 나는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어. 세상 사람들이 나를 좋아할 것야’ 그 사모님은 결국 사단이 주는 생각을 따라갔습니다. 맨 처음에는 사단이 주는 생각을 물리칠 수 있었는데 본인이 그 생각을 받아들인 순간부터는 사단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결국 목사님과 이혼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전도자들이 주님께 돌아오도록 회심을 권유했지만 다시는 주님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불신자보다 더 완악한 상태로 주님을 대적하게 되었다. 마음속에서 완전히 사단의 생각은 환영이었지만, 주님의 생각은 거절하였습니다.
우리가 시험이 들었다는 말은 우리를 쓰러뜨려서 멸망시키려는 마귀의 유혹에 넘어간 것을 말합니다. 마음 속에 하나님의 생각이 아닌 사단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시험에 들지 말것을 경고하십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26:41) 육신이 약하면 기도하기가 힘들어집니다. 몸이 병으로 고생을 하며 마음까지 병이 들게 됩니다. 그러면 시험에 들기 쉽습니다. 노인 어르신들도 한참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에는 분주하게 일했습니다. 남이 서운하게 해도 훌훌 털면서 일어나고 새 힘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한 번 서운하면 마음 깊숙이 서운함이 새겨 집니다. 새마음 훈련을 하지 않으면 섭섭이 마귀가 쉽게 마음에 침투하고 시험에 들기 쉽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새마음 기도를 하면서 우리가 육신에 약해져도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에 힘써야 되는 것입니다.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전7:5)
부부가 각방을 쓰는 것은 마귀로 틈을 타게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각방을 쓰거나 몸으로 대화하지 않는 부부가 늘어납니다. 각방을 쓰는 것은 결국 한 지붕에서 살지만 마음은 이혼한 경우나 다름이 없습니다. 남편의 믿음을 지켜주기 위해 아내가 존재합니다. 아내의 믿음을 지켜주기 위해 남편이 존재합니다. 부부가 각방을 쓰는 것은 기도외에는 합당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목회를 하면서 부부가 각방을 쓰고 그걸 얘기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 한 가지 사실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가정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고, 사단의 공격에 노출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확히 지적해 주고 계십니다.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다시 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마귀의 시험을 우리가 쉽게 이길 수는 없습니다. 베드로의 경우를 보십시오.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에 절대로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노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의리 하나로 살아온 삶입니다. 혈서를 써서라도 충성심을 보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마귀가 한 번 유혹하기로 작정하고 덤비니 결국 닭이 2번 울기 전에 3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믿음이 좋고 신앙이 성숙한 사람도 마귀의 공격에서 예외는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이 오래된 사람들이 묵은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마음 속에 있는 찌꺼기들을 제거하지 않아서 본인도 모르게 미움과 시기. 질투, 악담, 험담, 비방, 교만의 덫에 걸려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이 좋은 것 같은데 죄악의 찌꺼기들이 여전히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기도할 때마다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우리 안에 죄성과 독성과 욕성을 성령의 불로 태워주옵소서.” 우리 안에 죄성과 욕성과 독성이 있습니다. 이걸 처리하지 않으면 끊임없이 악한 영은 이걸 통해 우릴 공격해 옵니다. 매일 매일 우리는 마음 동산을 잘 지켜야 합니다. 우리 마음의 밭을 잘 가꾸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시험받는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지 않았다면 베드로도 회개할 기회를 잃어버린 가룟 유다와 동일했을 것입니다. 주님에 대한 충성심을 맹세했는데 주님을 거역한 죄인이라고 자책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이 지켜 주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도움을 늘 구해야 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마6:13)
죄의 유혹과 마귀의 미끼
우리가 마귀에게 시험을 받는 것은 우리가 정직하고 순수한데 억울하게 시험을 받는가? 그렇지 않다. 사기꾼이 감언이설로 속이더라도 내가 깨끗하고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시험 받지 않는다. 에덴 동산에서 하와가 마귀의 시험에 빠진 것은 자기가 하나님 같이 되어 보겠다는 헛된 욕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귀도 원래는 천사장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였다. 그가 지극히 높은 곳에 올라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견주어 보려고 할 때 그는 타락한 천사가 된 것이다. 마귀는 자기가 타락했던 방법으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우리가 시험에 빠지는 것은 헛된 욕망과 마귀의 합작품이다. 우리 사람은 미혹을 받기 쉬운 존재이다.
죄의 유혹은 교묘하다. 한꺼번에 밀려오는 것이 아니다. 점진적으로 증폭된다. 바늘도둑이 소도둑이 된다. 처음에는 무심코 한 번 재미삼아 했던 도둑질이 결국은 패가망신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죄에 빠지는 직접적인 원인은 욕심이다. 그 욕심을 잉태했다가는 결국 사망에 이르는 법이다. 우리에게 열망을 가지는 것은 결코 죄가 아니다. 그러나 그 열망이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열망인가? 아니면 개인적으로 성공하기 위한 열망인지 늘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욕심을 가진다고 늘 미혹당하고 시험드는 것은 아니다. 시험을 받지만 시험에 들지 않을 수 있다. 욕망이 일어나고 시험이 올 때 그것을 거부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는 분이십니다. 마귀의 강력한 유혹을 받았지만 세 번이나 물리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마귀의 계략을 잘 알아야 합니다. 신앙인들에게 마음이나 생각을 통해 세상 욕심, 영적인 욕심, 교만과 시기심을 주면서 하나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마귀는 사람과 사람사이를 이간질하면서 관계를 깨뜨리게 합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가 마귀의 책략을 알지 못하면 마귀를 대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스파이가 어떻게 들어옵니까? “나는 산업스파이입니다. 나를 잡아가세요”라고 공언하고 다닙니까? 아니면 아무도 모르게 암암리에 활동을 하고 있습니까? 최근에 한국 교회를 문란하게 하는 신천지는 교회내에 침투하여 교인들을 분열시키고 교인들을 빼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기독공보에서는 신천지에 대해 연재하면서 교회와 목사들로 하여금 경계하도록 독려하고 있습니다. 이단들이 신학교에 들어가서 정통 교회 목사가 되려고 합니다. 기독교 초교파신문을 만들어서 기존교회의 문제점을 들춰내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신천지 교인들도 모르는 비밀 병기가 [초교파 신문]이었습니다. 겉은 양의 모양인데 속에는 이리를 뛰어넘어 사탄의 모습을 갖춘 자들입니다.
마귀는 그럴듯한 미끼를 제공합니다.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사단의 멸망 계획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면, TV나 스포츠 중독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 한 번 두 번 해보는데, 이제는 TV없이는 살 수 없다는 고백을 하는 사람도 나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잖아요. “텔레비젼은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솔로몬은 인간의 모든 영화를 다 누렸습니다. 이 세상의 부요를 다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살아온 삶을 후회했습니다. 마음의 싸움에서 패배하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타락은 마음의 타락이며 마음의 실패이었습니다. 그는 다윗왕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범죄했을 때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119:11) 다윗왕은 마음을 지켰지만 솔로몬은 그의 마음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솔로몬이 강조하는 인생의 교훈이 무엇입니까?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여기에서 나기 때문이다.”(잠4:23) 이 말은 마음을 잘 지켜야 건강하게 산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육체의 건강도 마음에서, 영혼의 건강도 마음에서, 정신의 건강도 마음에서 그리고 생활의 건강, 인격의 건강, 삶의 모든 건강이 마음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화) 송명희 시인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시인은 송명희씨입니다. 그녀는 1963년에 태어났습니다. 의사의 부주의로 뇌를 집게로 잘못 건드려 소뇌에 상처를 입고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울지도 못하고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기형아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믿음이 있었기에 이 아이를 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일곱 살 때까지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머리에 힘이 없기 때문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어느 한 날도 빠지지 않고 집회를 다니면서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녀가 열여섯 살 되던 해에 걷지를 못하기 때문에 기어서 강단 밑에 가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발 저를 만나주세요. 모든 것을 다 드릴께요.” 그때 반짝이는 빛이 올라가고 밝은 빛이 비취면서 두루마리같은 것이 눈앞에서 양쪽으로 펼쳐지고 이상한 글자가 그 앞에 적혀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네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면 죽으리라” 하나님이 그를 감동해서 그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합니다.
열어 주소서. 열어주소서. 내 눈을 열어주소서.
주님 바라볼 수 있도록
열어 주소서. 열어주소서. 내 귀를 열어주소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열어 주소서. 열어주소서. 내 마음을 열어주소서.
주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도록
열어 주소서. 열어주소서. 내 입을 열어주소서.
주님 말씀 전할 수 있도록
그는 연희동에 살았는데 집 주인이 집을 판다고 나가라고 해서 사글세를 얻어서 초동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그는 그때 너무 많은 충격을 받고 울었습니다. 울면서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없어요. 친구도 없고, 집도 없고, 휠체어도 없어요. 이제 나와 같이 놀아주던 이웃집 언니도 이사 가면 오지 않을테니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그때 주님께서 이런 시를 불러주면서 쓰라고 하더랍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이 가진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갖고 있지 않은 것 가졌으니
나 남이 못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을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을 받았으며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그는 너무도 엉뚱한 말씀이라 기가 막혀서 도저히 쓸 수가 없어서 머뭇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울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지 못합니다. 내겐 아무것도 없어요.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때 강력하게 “받아 써라” 해서 그대로 받아 쓴 것이 바로 “나”라는 시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공평하지 못하다고 부르짖었으나 공평하신 하나님을 깨달았습니다. 남이 갖지 못한 것을 가졌습니다. 남이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남이 듣지 못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남이 보지 못한 것을 보았습니다. 남이 받지 못한 것을 받았습니다. 마음으로 받았습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마음으로 눈을 열고 하늘의 소망을 보았습니다.”
송명희 시인의 육신은 공평하지 못한 하나님을 원망할 정도로 질그릇 같이 약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녀의 마음에 엄청난 보화를 부어 주셨습니다. 그녀는 절망 가운데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비추었습니다. 나같은 약한 자, 나같은 소아마비 장애인도 이런 은혜를 통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노라고 세계를 향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음은 위대한 의사입니다. 마음을 지켜야 믿음이 성장하고 축복의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환경이 힘들어도 마음에서 지면 안됩니다. 감사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원망이 오고 불평이 찾아와도 주님이 주신 마음 동산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에덴동산을 마귀에게 빼앗겼는데 다시 마귀에게 빼앗길 수 없잖아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마음에 주님의 사랑으로 가득채우고, 주님의 은혜로 채웁시다. 어떤 시련이 밀려와도 주님을 붙잡고 승리하십니다. 믿음을 저해하는 마귀의 공격에는 단호하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물러가라” 선포하십시다. 주님이 우리 마음을 지켜 주십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