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마음 훈련10(새마음기도)
눅 18: 13-14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로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이는 하나님은 돈을 제일 좋아하신다고 한다. 교회도 돈이 있어야 대접을 받는다고 한다. 돈을 제일 많이 바치면 하나님이 엄청난 축복을 주실 것이라 생각한다. 하나님을 로또 복권처럼 생각한다. 헌금을 드리면 하나님은 수천배를 주실 것이라 생각한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신앙의 본질은 아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은 교회에 출석을 잘하는 것을 좋아하신다고 한다. 그래서 교회 출석을 안 하면 진노의 채찍을 들어서 징계하신다고 하신다. 사람들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는 것 같다.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끊임없이 요구하신 것이 있다. 그들의 마음이었다. 때로 사람들은 십일조와 여러 예물을 드렸다. 감사한다는 말을 많이 했고,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께 온전하게 향해 있지 않았다.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입술로는 하나님을 섬겼지만, 마음으로 떠나 있을 때 하나님은 몹시 서운해 하셨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다.
불교인들이 주로 하는 말이 무엇인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다. 나무아미타불은 ‘아미타불에게 귀의합니다.’라는 뜻이다. 괴롭고 힘들 때 사람들이 관세음보살을 외우면 그가 대자대비를 내리고 해탈하게 해 준다는 것이다. 불교인들의 마음을 정화하는 방법으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효과적이다.
그러면 우리 신앙인들이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구하는 기도는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의 기도이다.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을 반복적으로 부르면서 자신을 내려놓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선을 하면 자신을 비운다고 하는데 우리 기독교는 자신을 비우지만 하나님의 거룩함으로 채운다. 하나님의 임재로 채운다. 마음을 예수님께 고정하고 자신의 불쌍한 처지를 인식하고 하나님을 구할 때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체험하게 된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예수의 기도’를 했던 사람들은 물밀듯이 밀려오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거나 병이 낫거나 방언을 경험하기도 했다.
구요한 목사님은 마음을 깨끗하게 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하기 위해 새마음 기도문을 만들었다.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저의 마음을 새롭게 해 주시고 주님의 모습을 닮게 해 주옵소서.
저의 원수를 용서하고 축복합니다.
그의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게 해주옵소서.
저의 죄를 회개합니다.
저의 마음에서 쉴새 없이 흘러나오는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의 죄를 주님의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주님의 보혈로 씻어 주시고 성령으로 거룩하게 해 주옵소서.
주님의 성령으로 채워주옵소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로 채워주옵소서.
저를 축복해 주옵소서.
저의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게 해 주옵소서.
주님 감사합니다.
이 모든 일을 통하여 주님 영광 받으옵소서. 아멘.”
예수의 기도의 기도를 드리는 것만도 은혜가 임한다. 그러나 새마음 기도는 원수를 용서하고 축복하고 있다. 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좋은 것으로 채워주며 하나님의 복을 구하고 있으며 마지막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
새마음 기도를 살펴보자.
우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한다.
“하나님의 아들 주예수 그리스도시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눅18장에서 세리는 가슴을 치면서 기도했다.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18:13)
세리는 자신은 의로운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필요로 하는 존재임을 고백하고 있다.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를 망각하게 될 때 교만함이 온다. 아담은 단지 먼지와 흙덩이로 지어진 존재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아 에덴동산을 다스리며 지킬 수 있는 것은 자기의 능력이 아니었다. 그가 대단한 존재이기에 사자와 호랑이가 그에게 순종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신이 그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성령님이 그 안에 계시기에 통치의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에는 다스림의 권세가 상실되었다. 땅은 그에게 풍성한 수확을 안겨주지 않았다. 그가 노력하고 수고할 때에야 열매를 얻을 수 있었다. 아담은 자기의 신분을 망각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사단의 계책이었다.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고 유혹하였다. 사람은 흙으로 지음 바 된 존재이지 하나님이 될 수 없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사람이 하나님처럼 된다는 말에 쉽게 넘어갔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라는 기도는 우리의 존재가 누구인지 일깨워준다. 이 고백은 우리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설명해 준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우리는 무능한 존재이며 오직 하나님의 은총만이 우리를 축복과 형통한 삶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고백이다. 하나님이 없이는 안 된다는 고백이 참된 신앙의 출발점이다.
긍휼이라는 말은 어머니의 자궁과 연관되어 있다. 아기는 어머니의 자궁에서 생명을 보호받는다. 긍휼이라는 단어는 어머니의 사랑과 연결되어 있다. 새마음 훈련은 우리가 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죽고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는 살게 하는 훈련이다. 주님의 신부로 우리의 마음을 단장하는 것이다. 새마음 훈련도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아니고는 이루어질 수 없다. 우리 힘으로 새마음을 가질 수 없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임할 때 우리 심령이 새로워진다. 자신의 불쌍한 처지를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이다. 나약한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다. 내 힘으로 도저히 불가능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된다는 고백이 우리를 새롭게 한다.
성경에서 긍휼이란 단어가 많이 쓰인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엡2:4-5)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벧전1:3)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롭사오니 내게 돌이키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시25:16)
“주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종일 주께 부르짖나이다”(시86:3)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막10:47)
우리가 정결한 심령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 호소해야 한다. 우리가 옥토가 된 것처럼 생각하지만 강팍해지는 우리의 모습을 보지 않는가? 늘 새마음을 원하지만 어느덧 원치 않는 악한 생각과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힌 나를 발견하지 않는가? 우리 힘으로는 새마음을 유지할 수 없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이 없이는 안 된다.
새마음을 간구해야 한다.
“저의 마음을 새롭게 해 주시고 주님의 모습을 닮게 해 주옵소서.”
새롭게 된 마음은 주님의 모습을 닮은 마음이다. 예수님을 오랜 믿어도 주님의 마음을 소유하지 못한 심령이 얼마나 많은가? 과거의 상처와 아픔이 성도들의 마음 속에 가득차 있는 사람이 있다. 자기를 괴롭힌 사람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호언장담하는 사람들이 있다. 돌짝밭으로 가득찬 사람이다. 재리의 염려와 세상의 유혹에 밀려 믿음이 성장하지 못하는 가시밭 인생도 있다. 심지어 돌같이 굳어진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은가? 매일 나의 마음을 새롭게 하지 않으면 마음이 강퍅해 지고 죄로 물들어져 버린다.
목욕을 할 때 마다 신기한 것이 하나 있다. 매일 샤워를 하는데 어느새 때가 생겼는가 하는 것이다. 나는 매일 머리를 감고 거의 매일 샤워를 하는데도 목욕탕에서 때를 불리고 밀때에는 가래떡 같은 때가 밀려 나온다. 면도를 하루만 안했다고 생각해 봐라. 까칠까칠한 털이 얼굴을 뒤덮는다. 일주일만 면도하지 않으면 털보가 될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주님이 주시는 새마음이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닮아가는 새마음이다. 성도들이 한 번 거듭났다고 해서 새마음을 유지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날마다 주님 앞에 나와 죄를 고백하고 용서함을 받을 때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품을 닮아갈 수 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엡4:22-24)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만이 우릴 새롭게 하신다. 그러면 우리는 아무것도 안하면서 하나님이 새롭게 하시기를 기다려야 하는가? 아니다. 새 마음을 주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우리도 새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회개와 믿음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회개하고 믿음을 얻기 위해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
출 15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목이 말랐다. 홍해를 건너고 나서 기쁨이 가득했지만 3일 길을 가도 먹을 물조차 얻을 수 없었다. 게다가 살을 에는 밤의 추위와 40도를 넘나드는 낮의 더위는 그들을 지치게 했다. 그들은 모세에게 물을 달라고 요구했다. 광야에서 목말라 죽게 하려느냐고 원망했다. 그들이 하나님과 모세에게 원망할 때 작은 연못이 있었다. 사람들은 허겁지겁 뛰어 들어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런데 기쁨도 잠시였다. 사람들은 배를 잡고 아프다고 뒹굴기 시작했다. 물에 독이 있었다. 쓴 물이었다. 마신 사람들마다 토하고 고통을 호소했다. 모세가 하나님께 해결책을 구했을 때 하나니은 물가에 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그 나뭇가지를 꺾어 물에 던지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그 물이 쓴 것을 미리 아셨다. 그리고 한 그루의 나무를 준비해 놓으셨다. 쓴 연못가에 나무가 자라게 하시고 그 나뭇가지로 인해 마라의 쓴 물이 달아졌다. 물이 해독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마음도 마라의 쓴 물처럼 죄악의 쓴 물을 마시고 있다. 구원받은 백성이 하나님의 풍요와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쓴 물을 마시고 있는데 어찌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겠는가? 마음에 쓴 뿌리가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데 어찌 단물을 낼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쓴 물 옆에 한 그루의 나무를 준비해 놓으셨다. 나뭇가지를 던지는 것은 모세의 몫이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하시길 원하신다. 우릴 정결케 하신다. 그러나 우리도 또한 새마음을 소유하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한다. 물을 해독하기 위해 나뭇가지를 던지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새마음 기도의 목표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인품을 닮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새로워지면 우리는 죄악의 욕심을 따르지 않게 된다. 옛사람의 옷을 과감하게 벗어 버릴 수 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자는 성령의 일을 생각한다.”(롬8:5)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다. 신앙인들도 육신의 생각을 따라가면 하나님과 원수지고 사망의 길로 이른다. 끊임없는 노력이 아니고는 죄악의 욕심을 따라가기 쉽다. 새마음 기도는 육신의 욕망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다.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이 되는 과정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과정이다. 의와 진리의 거룩함을 입은 새 사람 곧 타락하기 이전이 아담의 모습이다. 우리가 새마음 훈련을 하면서 주님을 닮아가려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된다. 곧 하나님의 의와 진리의 거룩함을 지닌 사람이 된다는 말이다. 우리 마음이 새로워 질 때마다 우리는 곧 예수님을 닮아가게 된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형상이시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3)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4:19)
우리 마음을 지속적으로 새롭게 하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리고 그 뜻을 행할 능력도 얻게 된다. 새마음은 죄의 지배를 받지 않고 성령님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기 위해 이 땅에 존재한다. 결코 우리 뜻을 행하고 우리 마음대로 살기 위해 이 땅에 있는 것은 아니다.
용서하고 축복하라.
“저의 원수를 용서하고 축복합니다. 그의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게 해 주옵소서.”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6:28)
용서는 우리가 주님을 닮을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남을 용서하는데는 인색하다. 우리가 회개하기 꺼려하는 이유는 남을 용서하기 싫어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이런 마음이 있다. ‘당신 맘대로 해봐 그러나 잘못돼도 내 책임은 아니야’ 우리는 다른 사람이 잘 안될 때 좋아하는 나쁜 성품이 있다. 불이 났을 때 사람들은 불을 끄기 위해 모이기도 하지만, 불구경을 하기 위해 모이기도 한다. 사람의 본능속에 파괴본능이 있기 때문이다. 이본능은 하나님의 일과 역행한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고통당해야 하고, 나를 돕는 사람이 잘 되어야 한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도 우리에게 죄지은 형제를 중심에서 용서할 것을 원하신다.
예전에 있던 일이다. 어느 교인은 시어머니를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도저히 그 일만은 못하겠다는 것이다. 나를 이대로 내버려 두라는 것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부모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현대인은 자기 눈에 좋은 대로 예수님을 믿으려 한다. 자기에게 부담이 되는 주님의 말씀은 피하려 한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경홀히 여기면 된지 않는다. 그 점이 나와 주님 사이를 멀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이 먼저 나에게 죄의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생각하라.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먼저 용서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려고 노력해야지 이 땅의 방법을 살려고 해서는 안 된다.
회개하고 채워라
“저의 죄를 회개 합니다. 저의 마음에서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의 죄를 주님의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주님의 보혈로 씻어 주시고 성령으로 거룩하게 해 주옵소서. 주님의 성령으로 채워주옵소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선과 온유와 절제로 채워주옵소서.”
하나님은 우리 마음속에 품은 생각들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마음이 계획이 악하면 하나님은 인정하지 않으신다. 감옥에 있는 사람들은 실정법을 어기고 형을 받고 있다. 그러나 담 밖의 사람들은 담안의 사람들보다 마음으로 큰 죄를 짓고도 버젓이 의로운 채 살아가고 있다. 마음속에 교만함과 음란과 악한 생각을 가지고도 그 죄를 처벌할 실정법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대한민국 헌법이 죄로 정하지 않는 마음의 죄에 대해 회개할 것을 우리에게 촉구하신다. 마음속에 죄악을 품는 것은 결국 주님이 그 안에서 역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숭의동에서 쓰레기 수거일이 월화수목금토이다. 이중 화요일과 목요일은 재활용품만 수거해 간다. 화요일과 목요일은 놓치면 집에 재활용 쓰레기로 넘쳐난다. 집 밖에 내 놓아야 집안이 청결해지고 살기 좋은 곳이 된다. 우리 안에 있는 죄악의 쓰레기는 주님 앞에 아뢰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래야 마음이 청결해 진다.
상의 상류에 폐수를 버린다고 생각해 봐라. 강의 중류와 하류는 자연히 오염이 된다. 우리의 마음이 강의 상류이다. 마음이 청결하면 생각도 청결하고 몸과 행실도 단정하다. 그러나 마음이 오염되어 죄를 짓고 있으면 결국 우리 생각이나 얼굴과 행실도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죄에 대해 죽고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는 살아야 한다. 새마음 기도는 우리 마음속에서 흘러나오는 죄의 뿌리들을 깨끗이 뽑아내는 작업이다. 우리 모두 마음의 폐수를 정화하고 성령으로 청결함을 입자.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