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신 강단

새마음훈련15

박도식 2021. 4. 12. 18:15

새마음 훈련15

 

18: 21

21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고려대 국문과 김흥규 교수와 언어학과 강범모 교수팀은 90년대에 나온 신문기사, 논설, 잡지, 수필, 인문 교양서적 등 127종을 토대로 우리말을 연구했다. 우리말과 우리글 150만 어절을 연구해본 결과 한국인이 가장 사용하는 형용사는 없다였다. 우리 민족의 의식 속에 부정적인 의식이 얼마나 뿌리 깊게 박혀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있다보다는 없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은 우리 민족은 긍정의 말보다는 부정의 말을 더 많이 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부정적인 말을 많이 한다는 것은 삶 자체가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말한다. 새마음 훈련을 하는 사람들은 부정적인 말을 하는 것보다 긍정의 말을 하도록 훈련을 해야 한다. 말은 훈련을 통해 능히 극복할 수 있다.

 

지난 번에 말씀 드렸지만 감사 팔찌를 제거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평균 10개월 정도는 걸린다. 최근에 미국에서 유행하는 것이 감사팔찌이다. 보라색으로 만든 것인데 우리는 보통 불평과 원망의 말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 말을 할 때마다 팔찌의 위치를 바꾼다. 21일 동안 불평과 불만의 말을 하지 않는다면 팔찌를 제거해도 된다. 그런데 어떤 이는 팔찌를 제거하는데 4개월이 걸리기도 하고 어떤 이는 10개월이 걸리기도 한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불평과 원망이 생활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악한 마귀는 우리의 생각을 타고 역사한다. 그러기에 새마음 훈련을 하면 우리 속에 침투하는 악한 영의 세력을 예수님의 보혈로 물리칠 수 있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3:8-10)

 

혀를 길들이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혀를 맡겨야 한다. 그리고 엄청난 노력을 해야 한다. 사람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나오기 때문이다(12:34-35).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그 마음을 엿볼 수 있다. 믿음있는 사람은 믿음의 말을 한다. 그리고 믿음이 없는 사람은 불신앙의 말을 한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사랑이 없는 말을 한다. 우리는 말을 통해서 각 사람의 심령을 엿볼 수 있다. 우리가 사람을 분별할 때 영을 분별해야 하지만 우선 말을 잘 들어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믿음의 사람인지, 불신앙의 사람인지. 영적인 사람인지, 육적인 사람인지.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이 영을 분별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인가? 아니면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인가? 성령님을 만나지 못하고 주일만 참석하는 썬데이 크리스천인가를 우리는 말을 통해 분별해야 한다. 특별히 요즘에는 악한 영이 이간질을 통해 성도와 성도사이를 이간시키고 목회자와 교우들을 이간시킨다. 이간질의 영에 넘어 가면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분별하지 못하여 입으로 죄를 지을 수 있다. 새마음 훈련을 하면 우리의 말을 점검하게 된다. 과연 나의 말이 신앙인의 말인가? 남을 살리는 말인가 아니면 남을 죽이는 말인가를 분별한다. 서두에서 말했듯이 우리 한국 사람들은 긍정적인 말보다 부정적인 말을 하기 좋아한다. 다른 사람의 장점을 말하기 보다 단점을 말하기 좋아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럼 우리는 어떤 말을 하고 어떤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까?

첫째, 살리는 말과 죽이는 말이 있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6:63)

 

복음은 죽은 영혼을 살립니다. 시들은 영혼, 상처입은 영혼을 소생시킵니다. 그러나 사람의 말은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는 사람들과 만나서 가급적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어야 합니다. 내가 경험했던 과거의 아픔과 슬픔의 이야기만 하면 다른 사람들의 동정은 받을지 모르지만 그 영혼을 주님께 인도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말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말씀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말씀이 사람을 살리기 때문입니다. 고통 당하는 사람에게 우리가 위로해 준다고 말해도 100%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 한 구절이 큰 힘과 위로가 될 때가 많습니다.

 

욥이 고난을 당할 때 욥의 친구들은 욥을 위로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러나 욥의 고난이 상상 밖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은 욥과 논쟁을 벌이면서 욥이 하나님께 범죄했기 때문이라고 그의 죄를 끄집어 내려고 했습니다. 마귀의 시험 속에서 굿굿하게 믿음을 지키고 있는데 친구들은 그의 단점을 끄집어 내려고 하였고 욥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종종 욥의 친구들과 같이 상담을 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욥의 친구들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42:7)

 

12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그런데 친구들과의 논쟁에서 욥은 실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중요한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주변사람들이 살리는 말을 했으면 욥은 믿음을 지켰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변사람들이 논쟁을 하면서 죽이는 말을 하기 시작할 때 욥도 자기의 정당함을 옹호하다 보니 하나님을 불의한 분으로 말하는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우리는 살리는 말을 해야 합니다.

 

예화)

어느 시골 작은 천주교회의 미사에서 신부를 돕던 청년이 실수하여 성찬용 포도주 그릇을 떨어뜨렸다. 그러자 신부가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매는 소년의 뺨을 때리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다시는 제단 앞에 나타날 생각도 하지 말아라.” 그 말을 들은 아니는 성당과 하나님에 대해 무섭고 사랑이 없는 분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 뒤 소년은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다. 이 아이는 결국 유고의 무자비한 독재자 티토가 되었다.

 

그러나 또 다른 성당에서 똑같이 포도주를 엎질렀던 다른 아이는 그 성당 신부로부터 위로와 격려를 받았다. 실수를 정직하게 인정한다며 오히려 칭찬을 들었다. 이 아이는 커서 유명한 대주교가 되었다. 이 소년이 바로 풀턴 신이다.

 

둘째, 축복과 저주의 말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10:12-13)

저가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축복하기를 기뻐 아니하더니 복이 저를 멀리 떠났으며”(109:17)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6:28)

 

우리 신앙인들이 쉽게 범하기 쉬운 죄가 축복과 저주의 말입니다. 우리는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 원수를 향해 저주의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인으로 합당한 것이 아닙니다.

 

새마음 기도에서 원수를 용서하고 축복하며 형통하기를 빌어주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도를 받기에 합당하지 못하면 그 기도가 우리에게 돌아온다. 남을 많이 축복해 주어라. 그러면 많은 축복이 온다. 입술의 열매를 먹고 산다. 축복을 많이 해 주어라. 옆에 사람을 축복해 봅시다. 1분 동안

 

메아리를 생각하면 된다. “사랑해를 외치면 사랑해가 온다. “미워해를 외치면 미워해를 온다. 하나님은 자녀들이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화목하게 살기를 원하신다. 새마음 훈련을 하는 사람들은 결코 입으로 남을 저주하지 않는다. 오히려 용서하고 그 영혼이 잘 되기를 바랄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빌어준 축복을 판단하시고 정확하게 축복을 받을 자에게 축복을 주신다.

 

셋째, 감사 찬양의 말과 불평, 불만의 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50:23)

백성이 여호와의 들으시기에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로 그들 중에 붙어서 진 끝을 사르게 하시매”(11:1)

 

이스라엘의 정탐꾼은 부정적인 보고를 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악평을 합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땅을 향해 여호와의 낙원이다고 합니다. 가나안 땅은 존재하는 데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이 천양지차입니다. 한편의 무리는 악한 말로 원망하며 악평을 합니다. 그러나 한 편의 무리는 긍정과 믿음의 말을 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두 그룹의 보고를 보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말을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말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주로 어떤 말을 해오셨습니까? 감사의 말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향해 원망의 말을 해왔습니까? 원망을 하셨다면 그 죄를 회개하셨습니까? 하나님은 귀에 들린 대로 행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원망과 불평의 말을 하셨다면 다시 한 번 회개하여 청결한 영혼이 되어야 합니다.

 

넷째, 믿음의 말과 불신의 말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9:23)

 

신앙인은 어떻게든 믿음의 말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 내 힘으로는 안되지만 하나님의 힘으로 됩니다. 주여 도와주옵소서. 주여 내 힘이 되옵소서. 나를 도우소서.”

우리의 어려운 환경가운데서 믿음을 보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의학적으로 불가능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믿음의 선포를 하신 분들은 병에서 고침받습니다.

 

어느 기도원에서 이런 말을 하잖아요. 병원에서 사형선고 받은 사람들이 마지막 찾는 곳이 기도원인데 살아나가는 사람이 반절, 죽어 나가는 사람이 반절이랍니다. 살아나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치료하여 주신다. 주의 종이 안수할 때 하나님은 역사하신다.”라고 말하는 사람이랍니다. 죽어 나가는 사람들이란 의사도 포기했는데 하나님이라고 별 수 있을까? 안수기도 받는다고 별로 나아질 게 없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랍니다. 무엇을 말합니다.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고 안수받으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데 불신의 말을 할 때는 아무 효과를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왕의 경우를 살펴보자. 삼상 17장에서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고리앗 앞에 서 있다. 그의 모습은 키다리와 난장이의 싸움이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모습이었기에 골리앗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나아왔느냐고 그를 조롱하였다. 3m 정도의 거인과 맞서는 다윗은 연약한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엄청난 믿음의 말이 나온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삼상 17:45)

 

하나님의 생각을 품은 다윗은 거룩한 전사로 자신을 생각한다. 그리고 용감하게 선포한다. 골리앗 앞에 기가 죽은 모습으로 초라한 자신을 보지 않는다. 인간의 생각에는 골리앗을 향해 덤비는 것이 무모한 행동같았지만, 하나님의 생각으로 가득찬 다윗에게는 오히려 골리앗이 무모해 보였다. 우리 눈에 다윗은 한낱 양치기 손년이었지만 그의 말에는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믿음이 있었다. 하나님은 그의 말대로 그에게 엄청난 승리를 안겨 주었다.

 

말에는 엄청난 힘이 있습니다. 말이 사람을 이끌어 갑니다. 우리 성신교회 성도들은 말의 힘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과 과학은 말의 힘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긍정과 축복과 믿음의 말을 해야 합니다.

예화) 아프리카에서 구두 팔기

영국의 한 구두 공장에서 영업사원을 모집하는 공고를 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구두를 판매할 영업사원을 모집하는 것입니다. 심사를 통해 2명이 모집되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말이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한 사람은 아프리카 사람들은 모두 맨발로 다니기 때문에 아프리카에서 구두를 판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얼마후 그는 아프리카로 보내졌고 한 켤레도 판매하지 못하고 귀국했습니다. 경비만 낭비했습니다.

 

그런데 한 영업사원은 그와는 전혀 다른 말을 했습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모두 맨발이니 자기가 그곳에 가면 얼마되지 않아 아프리카 사람들 모두가 자기 고객이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아주 안 좋았습니다. 사람들은 한 번도 신발을 신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신발을 신는 것을 답답해했습니다. 현실의 벽이 너무나 높아 보였습니다. 판촉을 위해 신발을 꽁짜로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맨발로 다녔습니다. 그는 판매전략을 짰습니다.

 

그는 부족 추장에게 가서 4km 경주 시합을 제안했습니다. 평생 사냥하며 지구력과 튼튼한 하체를 지닌 원주민들을 이기는 것은 무모한 도전같이 보였습니다. 상금이 컸습니다. 거절할 이유가 없는 원주민은 시합을 수락했습니다. 그런데 경주 구간이 자갈길과 가시밭길이었습니다. 예상대로 구두를 신은 백인보다 맨발의 원주민들이 이겼습니다. 약속대로 상금이 원주민에게 돌아갔습니다. 영업사원의 패배로 보였습니다. 추장이 말합니다. “보아라, 우리의 맨발이 당신의 신발보다 빠르지 않느냐?” 이 때 영업사원은 말합니다. “맞습니다. 우리의 신발은 당신의 맨발보다 빠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진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보십시오. 당신의 선수들의 발은 피가 나고 부르트고 상처로 가득하지만 우리 선수들의 발은 그렇지 않습니다.” 선수들의 신발을 벗겨 상처없는 발을 보여 주었습니다. “신발을 신으면 발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가시밭길도 안전합니다. 그냥 드릴테니 그저 신어보세요.” 처음에 원주민들은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이런 구두를 신고 다닐 필요가 있겠는가? 하면서 의아해 했습니다. 그러나 발을 보호하기 위해 신발을 신었습니다. 구두가 오래되어 떨어지면 새로운 신발을 주었습니다.

 

2년이 지난 후 추장이 영업사원을 찾아왔습니다. 구두를 달라는 것입니다. 구두가 떨어져서 맨발로 다니려니 불편하다는 것입니다. 이제 영업사원은 신발을 팔기 시작했습니다. 원주민들은 돈이 없었기에 세상에서 가장 반짝거리는 돌,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가 오랫동안 수고한 것과 비교할 수 없는 물질의 수확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상황과 조건들은 중립적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기회가 될 수도 있고, 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느냐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칭찬과 격려, 위로의 말을 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은 은혜스럽고 덕스러운 말을 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말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남을 정죄하거나 더럽고 추한 말은 입 밖에도 내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해 심판을 받으리니”(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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