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신 강단

새마음훈련14

박도식 2021. 4. 12. 18:12

새마음 훈련14

 

18: 21

21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고 말씀으로 우리에게 거듭난 생명을 주셨다. 그러나 또한 말씀으로 피조물을 심판하시고 재앙을 내리신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람들도 말을 통한 권세와 능력이 있다. 우리는 말로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말로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18:21)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3:8-10)

 

우리가 하는 말은 다른 사람은 물론 본인에게도 영향을 끼친다. 마음 속에 사랑과 감사가 넘치게 되면 몸 속에서 70%를 차지하는 물이 가장 건강한 상태를 유지한다. 그리고 음식을 먹을 때 감사의 마음으로 기도를 하면 역시 몸이 좋아하는 최적의 음식을 섭취할 수 있다. 감사와 찬양과 같은 긍정적인 말을 하면 영혼이 살아나고 몸도 건강해진다. 그러나 분노와 좌절 불평과 같은 부정적인 말을 하면 내 영혼도 시들고 몸도 연약해진다. “사랑과 감사는 가장 위대한 언어이며 우리를 살리는 말이다.

 

탈무드에서는 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말은 손이 없지만 손이 하는 일을 한다. 사람을 죽일 뿐만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선을 넘어선다. 왜냐하면 손은 가까이 있는 사람만 죽이지만, 말은 멀리 있는 사람도 죽이기 때문이다. 말은 화살과 같지만 또한 화살을 넘어선다. 왜냐하면 화살은 손으로 막을 수 있지만 말이 쏘아대는 무서운 상상력은 피할 세력이 없기 때문이다.” 한 방울의 향수가 방안 전체 분위기를 다르게 하듯 사람들은 적은 말에 따라 악취가 날 수도 있고, 향수가 날 수도 있다.

 

사람이 실험을 하였다. 유리병에 물을 넣고 글씨를 적은 쪽지를 붙이고 물의 구조를 살펴본 것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물은 글씨의 내용에 따라 결정구조가 다르게 촬영되었다. “고맙습니다라는 글씨를 유리병에 붙여보면 물의 결정체가 정돈된 깨끗한 형태의 구조를 띄었다. 그러나 짜증나네” “죽여버릴 거야같은 말을 할 때는 어린아이가 폭력을 당한 듯한 형상을 드러냈다. 욕을 하면 동물도 죽인다.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먹이를 주면서 쓰다듬어주고 예뻐한 쥐는 아주 튼튼하게 잘 자랐지만, 먹이를 주면서 욕하고 때린 쥐는 털이 거칠어지고 빨리 죽었다고 한다. 일본인 학자가 실험을 했다. 한쪽 컵에는 천사라고 썼고, 한 쪽 컵에는 악마라고 썼다. 얼마쯤 지나자 악마라고 써 붙인 컵의 물은 시커멓고 썩고 냄새가 났다. 이처럼 욕은 이렇게 모든 것을 망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을 잘 해야 한다. 그런데 말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마음에 가득한 것이 입으로 나오는 것이다.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그 사람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12:34-35)

 

우리가 아무리 축복의 말을 하고자 하고, 긍정의 말을 하고자 해도 마음이 더러우면 더럽고 죽이는 말이 나온다. 마음이 더러우면 당연히 입도 거칠어지고 말도 곱지 않은 말만 한다. 그러나 내 마음이 깨끗하면 긍정적이고 살리는 말을 하게 된다. 좋은 말, 살리는 말, 긍정적인 말을 하는 것도 중요한데, 우선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데 이걸 알아야 합니다. 말은 훈련을 통해서도 교정되어지고 마음까지 새롭게 될 수 있습니다. 마음이 깨끗하면 아름다운 말을 하지만 아름다운 말을 하다보면 자연히 마음도 아름답게 됩니다. 왜냐하면 말은 사람을 이끌어가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은 창조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 때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 아멘!”을 외칩니다. 현실이 암담하고 손에 잡히는 것이 없고 눈에 보이는 것도 없고 귀에 들리는 것이 없어도 하나님을 믿으면서 선포하면 우리의 뇌를 그 말에 반응을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 아멘선포하면 우리의 뇌는 그 말에 반응하면서 기분을 좋게 하는 호르몬이 나오게 합니다. 머릿 속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입을 열어 말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입니다. 머릿속의 생각을 입술로 말하면 뇌는 그 명령을 쉽게 받아들이고 반응을 한답니다. 주일 예배 후에 얼마나 기분이 좋습니까?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은혜를 받고나서 할 수 있다고 선포하면 천하가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뇌가 우리 말에 반응을 했기 때문입니다.

 

예화) 아프리카에서 구두 팔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예화입니다. 영국의 한 구두 공장에서 영업사원을 모집하는 공고를 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구두를 판매할 영업사원을 모집하는 것입니다. 심사를 통해 2명이 모집되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말이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한 사람은 아프리카 사람들은 모두 맨발로 다니기 때문에 아프리카에서 구두를 판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얼마후 그는 아프리카로 보내졌고 한 켤레도 판매하지 못하고 귀국했습니다. 경비만 낭비했습니다.

 

그런데 한 영업사원은 그와는 전혀 다른 말을 했습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모두 맨발이니 자기가 그곳에 가면 얼마되지 않아 아프리카 사람들 모두가 자기 고객이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아프리카에 갔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아주 안 좋았습니다. 사람들은 한 번도 신발을 신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신발을 신는 것을 답답해했습니다. 현실의 벽이 너무나 높아 보였습니다. 판촉을 위해 신발을 꽁짜로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맨발로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곧 내가 판매할 신발을 신고 다닐 것이다.” 그는 계속 긍정의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판매 전략을 짰습니다.

 

그는 부족 추장에게 가서 4km 경주 시합을 제안했습니다. 평생 사냥하며 지구력과 튼튼한 하체를 지닌 원주민들을 이기는 것은 무모한 도전같이 보였습니다. 상금이 컸습니다. 거절할 이유가 없는 원주민은 시합을 수락했습니다. 그런데 경주 구간이 자갈길과 가시밭길이었습니다. 예상대로 구두를 신은 백인보다 맨발의 원주민들이 이겼습니다. 약속대로 상금이 원주민에게 돌아갔습니다. 영업사원의 패배로 보였습니다. 추장이 말합니다. “보아라, 우리의 맨발이 당신의 신발보다 빠르지 않느냐?” 이 때 영업사원은 말합니다. “맞습니다. 우리의 신발은 당신의 맨발보다 빠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진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보십시오. 당신의 선수들의 발은 피가 나고 부르트고 상처로 가득하지만 우리 선수들의 발은 그렇지 않습니다.” 선수들의 신발을 벗겨 상처없는 발을 보여 주었습니다. “신발을 신으면 발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가시밭길도 안전합니다. 그냥 드릴테니 그저 신어보세요.” 처음에 원주민들은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이런 구두를 신고 다닐 필요가 있겠는가? 하면서 의아해 했습니다. 그러나 발을 보호하기 위해 신발을 신었습니다. 구두가 오래되어 떨어지면 새로운 신발을 주었습니다.

 

2년이 지난 후 추장이 영업사원을 찾아왔습니다. 구두를 달라는 것입니다. 구두가 떨어져서 맨발로 다니려니 불편하다는 것입니다. 이제 영업사원은 신발을 팔기 시작했습니다. 원주민들은 돈이 없었기에 세상에서 가장 반짝거리는 돌,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가 오랫동안 수고한 것과 비교할 수 없는 물질의 수확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상황과 조건들은 중립적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기회가 될 수도 있고, 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느냐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느냐에 달려 있습니,.

 

그럼 우리는 어떤 말을 하고 어떤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까?

첫째, 살리는 말과 죽이는 말이 있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6:63)

 

복음은 죽은 영혼을 살립니다. 시들은 영혼, 상처입은 영혼을 소생시킵니다. 그러나 사람의 말은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는 사람들과 만나서 가급적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어야 합니다. 내가 경험했던 과거의 아픔과 슬픔의 이야기만 하면 다른 사람들의 동정은 받을지 모르지만 그 영혼을 주님께 인도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말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말씀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말씀이 사람을 살리기 때문입니다. 고통 당하는 사람에게 우리가 위로해 준다고 말해도 100%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 한 구절이 큰 힘과 위로가 될 때가 많습니다.

 

욥이 고난을 당할 때 욥의 친구들은 욥을 위로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러나 욥의 고난이 상상 밖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은 욥과 논쟁을 벌이면서 욥이 하나님께 범죄했기 때문이라고 그의 죄를 끄집어 내려고 했습니다. 마귀의 시험 속에서 굿굿하게 믿음을 지키고 있는데 친구들은 그의 단점을 끄집어 내려고 하였고 욥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종종 욥의 친구들과 같이 상담을 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욥의 친구들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42:7)

 

12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그런데 친구들과의 논쟁에서 욥은 실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중요한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주변사람들이 살리는 말을 했으면 욥은 믿음을 지켰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변사람들이 논쟁을 하면서 죽이는 말을 하기 시작할 때 욥도 자기의 정당함을 옹호하다 보니 하나님을 불의한 분으로 말하는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우리는 살리는 말을 해야 합니다.

 

둘째, 축복과 저주의 말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10:12-13)

저가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축복하기를 기뻐 아니하더니 복이 저를 멀리 떠났으며”(109:17)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6:28)

 

우리 신앙인들이 쉽게 범하기 쉬운 죄가 축복과 저주의 말입니다. 우리는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 원수를 향해 저주의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인으로 합당한 것이 아닙니다.

 

셋째, 감사 찬양의 말과 불평, 불만의 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50:23)

백성이 여호와의 들으시기에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로 그들 중에 붙어서 진 끝을 사르게 하시매”(11:1)

 

이스라엘의 정탐꾼은 부정적인 보고를 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악평을 합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땅을 향해 여호와의 낙원이다고 합니다. 가나안 땅은 존재하는 데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이 천양지차입니다. 한편의 무리는 악한 말로 원망하며 악평을 합니다. 그러나 한 편의 무리는 긍정과 믿음의 말을 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두 그룹의 보고를 보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말을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말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주로 어떤 말을 해오셨습니까? 감사의 말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향해 원망의 말을 해왔습니까? 원망을 하셨다면 그 죄를 회개하셨습니까? 하나님은 귀에 들린 대로 행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원망과 불평의 말을 하셨다면 다시 한 번 회개하여 청결한 영혼이 되어야 합니다.

 

넷째, 믿음의 말과 불신의 말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9:23)

 

신앙인은 어떻게든 믿음의 말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 내 힘으로는 안되지만 하나님의 힘으로 됩니다. 주여 도와주옵소서. 주여 내 힘이 되옵소서. 나를 도우소서.”

우리의 어려운 환경가운데서 믿음을 보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의학적으로 불가능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믿음의 선포를 하신 분들은 병에서 고침받습니다.

 

어느 기도원에서 이런 말을 하잖아요. 병원에서 사형선고 받은 사람들이 마지막 찾는 곳이 기도원인데 살아나가는 사람이 반절, 죽어 나가는 사람이 반절이랍니다. 살아나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치료하여 주신다. 주의 종이 안수할 때 하나님은 역사하신다.”라고 말하는 사람이랍니다. 죽어 나가는 사람들이란 의사도 포기했는데 하나님이라고 별 수 있을까? 안수기도 받는다고 별로 나아질 게 없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랍니다. 무엇을 말합니다.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고 안수받으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데 불신의 말을 할 때는 아무 효과를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칭찬과 격려, 위로의 말을 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은 은혜스럽고 덕스러운 말을 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말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남을 정죄하거나 더럽고 추한 말은 입 밖에도 내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해 심판을 받으리니”(12:36)

무익한 말은 듣고 보고 생각한 것을 무심결에 하는 말이다. 생각을 하고 말을 해야 하는데 생각없이 말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또한 수군거리고 비방하는 말을 멈추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일급요리가 무언인지 아십니까? 사람을 도마위에 올려놓고 칼로 난도질하는 것입니다. 비방을 하고 수군거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방을 잘 모르면서 비방에 동참하거나 험담하는데 일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앞에 바르지 못한 것입니다.

 

어느 영화 감독이 자녀들에게 친구들에 대해 섣불리 말하지 말라고 교훈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딸이 난 반 고흐의 그림은 질색이에요, 아빠라고 했습니다. 이때 아버지는 말했습니다. “고흐의 그림이 싫다고? 그럼 너는 반 고흐의 그림을 몇 점이나 가지고 있느냐? 그리고 왜 싫은지 말해보거라.” 딸이 우물쭈물할 때 아빠는 말합니다. “상대방을 모르면서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

 

탈무드에서도 말합니다. “남을 비방하는 것은 살인보다 위험한 일이다. 살인은 한 사람 밖에 죽이지 않지만 비방은 세 사람을 죽인다. 비방하는 사람, 그것을 듣고 있는 사람, 그리고 화제가 된 사람이다.” 주님께서도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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