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신 강단

새마음훈련9

박도식 2021. 4. 12. 18:05

새마음 훈련9(회개)

 

139:23-24

23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24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하나님은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꿰뚫어 보시고 우리의 마음을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사람들은 외모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심령을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어떤지는 잘 말씀하고 있지 않지만 하나님이 귀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눈을 가지고 있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또한 팔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손과 가지고 계신 분이며 얼굴도 가지고 계신 분이라고 성경은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진노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라.’ 우리의 원망이나 우리의 기도는 귀로 들으신다고 하셨습니다. 18:6절 말씀을 보면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고 했습니다. 다윗은 기도하는 가운데 그의 기도가 하나님의 귀에 들렸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눈도 가지고 계십니다. 역하16:9절에서 이르시기를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시는 여호와의 눈을 피할 자가 이 세상에 어디 있을 것입니까? 하나님의 눈은 우리를 감찰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눈은 우리의 심령을 감찰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로 단장하는 아주 중요한 시기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부는 하나님의 마음,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신부가 더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신부로서 합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 심령이 길가와 같은 밭이 되거나, 가시밭길이나, 돌밭이 되어 있으면 주님의 신부로써 합당한 마음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짓는 죄

성경은 죄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는 실정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실정법은 법을 위반한 행동에 대해서는 처벌을 합니다. 그러나 마음의 죄에 대해서는 처벌을 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교통 법규를 어기면 과태료를 내게 됩니다. 남의 것을 훔치면 형벌을 받게 됩니다. 그렇다고 마음 속으로 한국은행을 털었다고 해서 감옥에 집어 넣지는 않습니다. 마음 속으로 남을 속이고 착취했다고 해서 실정법은 죄를 묻지 않지만 하나님은 그것 또한 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마음으로 짓는 죄입니다. 말이나 행동으로 짓는 것만이 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음욕을 품거나 형제를 미워해도 하나님은 죄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으로 형제를 미워하면 그것 자체가 살인죄라는 것입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15:18-19)

 

우리는 겉으로 사람들에게 올바른 사람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겉으로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과거의 상처나 아픔을 이야기하면서 상한 감정을 치유하는 것이 중요하였습니다. 그러나 가해자를 미워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언급하는 것은 없었습니다. 가해자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이 살인죄인줄 설명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십일조를 내고 교회에 충성하면 다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것보다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교회에 출석하는 것보다 먼저 우리 마음을 불꽃같은 눈동자로 살피십니다. 마음으로 많은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가짐과 동기를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15:8)

 

어느 교회에 목사님이 새롭게 부임했습니다. 그런데 수퍼 아주머니가 그 목사님 자랑을 합니다. “이번에 오신 목사님은 설교가 너무 은혜스러워요. 목사님은 말씀에 탁월한 은사가 있으신가봐요사람들이 수퍼에 올 때마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아주머니, 그러면 이번 주 설교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런데 수퍼 아주머니는 모른다고 했습니다. 본인은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목사님은 탁월한 말씀의 은사가 있는 분이라고 칭찬을 합니다. 이유를 물어보았습니다. 전에 있던 목사님이 시무할 때는 교인들이 외상값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새로운 목사님이 부임하고 나서는 외상값을 다 갚았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행동만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행동과 더불어 그 사람의 마음가짐까지 보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 짓는 죄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일차적으로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16:9)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죄인이 되어 결국 지옥에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짓는 죄는 일차젂으로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요셉의 고백입니다. “이 집에는 나 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 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39:9) 다윗왕의 고백입니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51:4)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는 것도 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순종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라고 말씀하신 것을 하지 않고’, ‘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을 하는 것모두가 죄입니다. 불순종은 개개인에게도 적용됩니다.

 

만약 하나님이 나에게 A라는 사역을 요구하시는 지 안다고 해봅시다. 다른 사람들 통해서도 하나님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힘들다고 B사역을 하는 것입니다. A라는 사역이 너무 힘들고 위험 부담도 많아서 자기가 잘 하는 편한 B사역에 전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B사역을 통해 결실을 보고 그를 칭찬하였지만 본인은 사역을 해도 기쁨이 없습니다. 본인의 마음에는 기쁨이나 평강도 없고 일도 제대로 형통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 원망합니다. ‘하나님 이렇게 열심히 충성되게 일했는데 일이 왜 이렇게 꼬이기만 합니까? 하나님은 왜 나를 미워하시죠? 하나님 일을 하면서도 기쁨과 평강이 없습니까?’

 

이런 사람들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아야 한다. 지금 나는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일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뜻보다 내 열심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이런 경우를 경험한다. 하나님의 뜻보다 내 열심, 안정됨을 앞세우지 말아야 한다. 불순종은 죄이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6:7-9)

 

죄의 열매

성경은 우리가 죄로 인해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죄는 결국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다.(59:2, 2:1-3)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59:2)

 

죄는 우리에게 좋은 것을 막고(5:25, 43:24), 우리의 죄가 하나님을 수고롭게 한다.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에게 오는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5:25)

네 죄 짐으로 나를 수고롭게 하며 네 죄악으로 나를 괴롭게 하였느니라”(43:24)

 

죄로 인해 우리가 더 큰 죄악에 방치된다. 이것을 신적유기라 한다(1:24-32). 부모가 자녀의 버릇을 고치다가 안되면 포기하고 그냥 내버려 둔다. 심지어 부모가 자식을 경찰에 고발하기도 한다. 오죽했으면 부모가 자녀를 신고하겠는가! 하나님도 사람들이 죄를 짓고자 하고, 죄악으로 충만할 때 그냥 방치해 버린다. 몇 번 경고를 하시다가 그냥 방치해 버린다. 그리고 결국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징계가 임한다. 이제 우리가 새마음 훈련을 하면서 해야 될 일은 회개이다.

 

하나님이 죄악을 싫어하시기에 우리는 죄악을 깨닫고 철저하게 회개하는 것이 중요하다. 죄를 깨닫는 것이 엄청난 은혜이다. 죄가 무엇인지 알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면 얼마나 좋으련만, 사람들은 죄에 대해 무관심하고 죄를 가볍게 여긴다. 죄를 짓고도 쉽게 잊어버린다. 죄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단호해야 한다. 죄를 해결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신부로 온전할 수 없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기에 죄를 깨닫는 것은 영적으로 부담감이 있다. 우리가 사랑을 설교하지만 우리의 양심은 온전하지 못한 우리 모습을 일깨워줄 때 부담감이 생긴다. 그래도 우리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시편기자는 기도하지 않는가!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139:23)

 

후회와 회개가 있다.

회개는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고, 후회는 죄에 대한 회한으로 그치는 것이다. 죄에 대해 뉘우치고 후회하는 것만이 바른 것은 아니다. 회개를 해야 한다. 회개는 죄악으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다.

 

베드로와 유다의 경우를 보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정하고 저주하였지만 곧 회개하였다(26:75). 나중에 예수님은 베드로를 찾아오셨고 용서하셨다. 그러나 가룟유다는 달랐다. 그는 노예의 몸값 은 30에 예수님을 팔았고 죄를 뉘우쳤다. 죄사함의 은총을 받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다. 진정한 회개는 과거의 잘못을 미워하고 비통해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의 후회와 다름이 없다. 과거의 잘못을 시인하고 고백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여서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새사람이 되는 것이 필요하다.

 

참된 회개를 위해서 우리는 먼저 죄가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둘째, 죄를 인정해야 한다. 죄를 인정하는 것이 자백이다. ‘누구와 동의하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죄라고 하신 것에 대해 동의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죄를 자백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죄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기에 자백은 주님, 저는 이런 죄를 저질렀습니다.”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주님 죄송합니다보다는 주님 저는 이러이러한 죄를 저질렀습니다.”라고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깨닫고 자백한 죄를 회개한다. “주님, 제가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회개하니 용서하옵소서. 또는 예수님의 보혈로 씻어 주옵소서. 또는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회개한 자에게 말씀하신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43:25)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4:7-8)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레이더망을 누가 피할 수 있느랴! 아무도 피할 수 없다.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살펴보면 얼마나 많은 지 모른다.

 

용서못함, 분노, 원한, 증오, 복수심, 포악, 불효, 판단, 정죄, 수군거림, 비방, 참소함, 사나움, 심통부림, 혈기, 권위에 대한 불순종, 사람을 조정하고 통제하는 것, 당 짓는 것, 왕따 시키는 것, 이간, 의심, 불신, 염려, 불안, 삐짐, 낙심, 죄책감, 왕자병, 공주병, 자기 사랑, 탐식, 집착, 옹고집, 무사 안일, 방종, 배신감, 거부감, 간음, 음란, 무관심, 인색 등

 

아모스 54절에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회개하고 양심의 등불을 밝혀야만 합니다.

 

어느 가정의 남편은 시각 장애인이었고 부인은 비장애인었습니다. 어느 날 늦은 밤에 급한 일이 생겨서 남편이 갑자기 그 일을 처리해야 했습니다. 밤 늦게 길을 나서는 남편에게 부인은 등을 준비하여 손에 들려주면서 들고 가도록 했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자신은 시각 장애인이라 앞을 보지 못하고 언제나 눈을 감고 다니는데 무슨 등불이냐며 껄껄 웃었습 니다. 그러나 부인은 당신에게는 등불이 필요 없겠지만 밤에 걸어오는 상대방 사람이나 자동차가 당신을 보지 못하면 부딪힐 수 있다며 등불을 들고 가도록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각 장애인은 부인의 말대로 준비한 등불을 들고 길을 걸어갔습니다. 한참을 가는 데 어떤 사람과 심하게 부딪쳐 등을 든 채로 넘어졌습니다. 그는 일어나면서 여보시오 등불을 들고 가는 나를 보지 못했습니까?”라며 고함을 쳤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등불이 꺼졌다고 가르쳐주었습니다. 이처럼 꺼진 등불은 소용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에도 양심의 등불이 꺼지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를 하나님과 멀리하는 죄악들에 대해 관대한 태도를 갖지 말라. ‘누구나 다 이정도의 죄를 지어. 이건 보통이라구. 하나님도 봐 주실거야그러나 하나님은 죄악에 대해 타협하는 일이 전혀 없으시다. 우리가 새 마음 훈련을 하면서 우리 자신을 주님의 신부로 단정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이 일깨워주는 우리의 죄악에 대해 철저히 자백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자. 그 때 우리는 참다운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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