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
마태복음 5:1-3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포인트 워드: 복
목적: 하나님 앞에 우리는 복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인가?
성경을 가슴에 안고 고백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영혼의 양식이며, 영적전쟁에 무기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요즘 우리는 말세지말이라는 말을 많이 듣고 있습니다. 말세 중에서도 거의 끝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단들이 주로 사용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에스겔, 다니엘, 마태복음 24장, 요한계시록입니다. 종말에 대한 여러 해석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불안감을 조장합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은 항상 예수님 말씀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 중에서도 “산상수훈”은 복음의 핵심입니다. 대표적인 복음주의 신약학자 F.F 브루스는 말합니다. “산상수훈은 그리스도 전체 교육의 요약”이다. 소럭 박사는 “산상수훈은 천국의 대헌장”이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천국에 가기 위함입니다. 이 땅은 천국을 위해 준비하는 과정입니다. 이 땅의 삶이 천국의 삶을 좌우합니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1:9)
본문은 산상수훈의 서론으로 ‘천국 시민의 자격’에 대해 8가지 복 있는 사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말씀이 본문 3절의 말씀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5:3)
구약에서 복은 2개의 단어입니다. 바라크와 아쉬레입니다. 바라크는 물질적인 축복을 의미하고 아쉬레는 정신적인 축복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믿어 자녀의 복을 받고, 물질의 복을 받는 것입니다. 양과 소가 떼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쉬레는 다릅니다. 마음에 행복하고 기쁘고 즐거운 것입니다. 영혼의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라크와 아쉬레를 함께 포함한 단어가 헬라어 마카리오스입니다. 구약의 물질적인 축복과 더불어 신약의 내적인 영적 행복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것은 천국 시민의 조건일 뿐만 아니라, 천국 시민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어떠한 사람일까요?
첫째, 마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먼저 ‘마음의 겸손’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사두개인들은 마음이 겸손하지 않았습니다. 율법을 중시하는 바리새인들은 철저한 종교인들이었습니다. 종교적인 열심히 탁월했습니다. 일주일에 2번씩 금식하고, 박하와 회향 근채의 십일조를 철저하게 드리고, 기도 생활도 열심이었습니다. 이들은 세리나 창기와 같은 사람이 아닌 것을 자랑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교만한 자들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세속적인 사람들입니다. 세상 권력과 야합을 하고 부를 누리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천국과 지옥도 믿지 않았습니다. 영혼의 존재도 천사들도 믿지 않았습니다. 단지 이 땅에서 권력을 누리고 부요하게 사는 것을 최고의 낙으로 여겼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종교적으로 지적으로 지위적으로 높은 것을 자랑하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부유한 자들이며 잘난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이 전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의 의로 충만하고 영적 교만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회개할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세리와 창기는 다릅니다. 하나님 앞에나 사람들 앞에 내세울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멸시와 천대의 대상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였습니다.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잘못된 삶을 철저하게 뉘우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창기의 친구”라는 별명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겸손한 자들, 약한 자들의 친구였습니다. 사회적인 명성이 없는 자들, 가난한 자들, 종교적인 의가 없는 자들. 이들이 가난한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겸손한 모습을 보여 주신 분입니다. 빌립보서 2:6-8절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예수님은 하나님과 같은 분이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습니다. 오히려 종의 형체를 빌려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낮추니, 하나님은 예수님께 선물을 주셨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9-11)
예수님의 모습은 겸손한 모습입니다. 겸손한 자는 마음이 가난한 자입니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자신의 부유함을 자랑하지도 않습니다. 젊음도 자랑하지 않습니다. 지식도 자랑하지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뿐입니다. 우리가 만약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다면, 우리는 교만한 자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18세기에 영국의 부흥을 이끈 목사님이 “요한 웨슬레 목사님과 조지 휫필드 목사님”입니다. 이들은 한 시대에 귀하게 쓰임받은 분들입니다. 그들의 영혼 구원의 열정이 뜨거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차이점은 구원론이 달랐습니다. 웨슬레 목사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한 알미니안주의자였습니다. 나중에 감리교를 창시했죠. 휫필드 목사님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한 칼빈주의자였습니다. 감리교는 인간의 열심과 노력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장로교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합니다. 두 사람의 구원론이 다른 것을 알고 어느 교인이 휫필드 목사님께 물어 봅니다. “목사님, 웨슬레 목사님과 구원론이 다른데 천국에서 두 분이 만나 볼 수 있을까요?” 심술궂은 질문입니다. 조지 휫필드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마도 나는 천국에서 웨슬레 목사님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목사님은 하나님의 보좌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 계실 것이고 내 자리는 멀리 떨어져 있을 것입니다.”
조지 휫필드 목사님은 비록 구원론이 다르지만, 웨슬리 목사님의 신앙을 그대로 인정했던 것입니다. 휫필드 목사님의 겸손이 영국과 미국의 대각성 운동에 귀하게 쓰임받게 되었습니다.
겸손한 자는 늘 하나님을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춥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5:5-6)
누가 천국에 들어갑니까?
겸손한 자가 들어갑니다. 겉으로 겸손한 체 하면서 그 안에 교만이 가득한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종교적인 열심히 자기 의를 삼는 사람은 교만한 자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종교적인 열심으로 말하면 바리새인을 따라갈 사람이 없습니다. 성품이 겸손한 사람은 한 때는 어려움을 당해도 나중에는 하나님께서 잘 되게 하십니다. 마지막 때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마음 속에 사랑의 겸손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천국의 복을 누리게 됩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듯 하나님의 은혜는 겸손한 자에게 주어집니다.
둘째, 심령이 가난한 자는 세상 욕심을 버린 자입니다.
누구나 욕심을 가지고 살아 갑니다. 그러나 심령이 가난하면 세상 욕심을 다 버리게 됩니다. 심령이 가난하지 못하면 자꾸 세상적인 부요함을 추구하게 됩니다. 세상 욕심을 부리게 됩니다. 이 ‘욕심’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감사하고 만족하기 보다 더 많은 것을 바라는 마음입니다. 물질이나 명예나 향락을 더 구하지만, 그러한 욕심은 허무하고 무상한 것입니다. 더 많은 부, 더 많은 쾌락, 더 많은 명예를 추구하면 만족함이 없습니다.
전도서 6장 2절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심령에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능히 누리게 하심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전6:2) 하나님께 간구하여 재물을 얻었습니다. 부요와 존귀를 얻었지만, 누리는 축복을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욕심을 내서 바라는 것을 얻으면 잠시 잠깐 낙을 누릴 지는 몰라도 주님을 떠난 인생은 결코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이 욕심을 부리다가 어느날 갑자기 인생을 마치게 되면, 얼마나 허무하고 무상합니까?
2011년 10월 5일 56세의 젊은 나이에 췌장암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스티브 잡스가 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비즈니스 세계에서 성공의 끝을 보았다.
타인의 눈에 내 인생은 성공이 상징이었다.
하지만 일터를 떠나면 내 삶에 즐거움은 많지 않았다.
결국 부는 내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하나의 익숙한 사실일 뿐이었다.
지금 병들어 누워 과거의 삶을 회상하는 이 순간에 나는 깨닫는다.
정말로 자부심 가졌던 사회적 안정과 부는 결국 닥쳐올 죽음 앞에 희미해지고 의미가 없어져 간다는 것을......”
결국 스티브 잡스는 자신의 모든 것을 쏟으며 부를 얻었다. 명예를 얻었다. 그러나 그는 행복한 인생이 아니었다. 죽음의 문턱에서야 무엇이 중요한 지를 깨달은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삶에 만족하며 살자. 부요하면 부요한 데서 만족하고 남을 섬기는 데에 물질을 써라. 그 섬김이 하늘나라에 상급이 되어 돌아온다. 가난하면 가난한 데로 만족하며 살자. 애쓰고 수고한다고 되지 않으면 그저 감사함으로 받자. 그러나 흘러 보내는 것을 잊지 말자. 부자는 큰 돈을 흘러 보내고 가난한 자는 작은 것을 흘러 보내면 된다. 일주일에 4천원 5천원을 남을 위해 쓸 수 있지 않을까? 그 섬김이 하늘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예수님은 세상 욕심을 다 물리치고 청빈하게 사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8:20)
우리는 예수님에 비하면 얼마나 잘 먹고 잘 살고 있는가?
대한민국은 전 세계인들에 비하면 얼마나 잘 사는가?
우리 주변에 굶어죽는 삶이 없고, 돈이 없어 공부 못하는 사람이 없다. 본인이 하고자 하면, 누구나 공부할 수 있는 나라에 살고 있다. 대한민국 국민은 일자리가 필요하면 일자리를 줍니다. 집이 필요하면 집을 줍니다. 먹을 것이 필요하면 먹을 것을 줍니다. 본인이 마음먹기에 달려 있습니다.
자족하며 사는 삶이 마음이 가난한 자의 삶이다. 비록 가진 것이 없고 내세울 것이 없고 자랑할 것이 없어도 하나님의 은혜에 만족하며 사는 것이다. 욕심을 부리면 불행하다. 감사하면서 하루 하루를 사는 것이 행복이다.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6:6-8)
우리 한 번 고백해 볼까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오늘도 감사합니다. 하나님 오늘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셋째,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는 자입니다.
마음이 부요한 자는 자기를 바라봅니다. 자기의 형편을 바라보고 만족해 합니다. 통장의 돈을 생각하면 든든하게 여깁니다. 젊음을 생각하면 흐뭇해 합니다. 직장이 안정적이라 만족합니다. 집안이 배경이 좋으니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수많은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삶을 사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을 보세요. 예수님의 죽음을 앞에 두고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심정이었을까요? 오죽했으면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되었을까요? 필사의 기도, 생명을 다한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22:42)
제자들은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예수님은 하나님만 바라보며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겸손히 피를 흘리며 기도드린 것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이 땅에서 여러분을 도와 줄 사람이 누구인가요?
부자 아버지가 있나요? 좋은 남편이 있나요? 친척중에 높은 사람이 있나요?
만약 아무도 없다면 복을 받은 것입니다.
사람들을 의지할 수 없어서 더욱더 하나님만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삶이 힘들고 어렵지만 축복입니다.
새53장(통342장)
“어려운 일 당할 때 나의 믿음 적으나
의지하는 내 주를 더욱 의지합니다.
세월지나갈수록 의지할 것 뿐일세
아무 일을 만나도 예수 의지합니다.”
“생명 있을 동안에 예수 의지합니다.
천국 올라가도록 의지할 것 뿐일세
세월 지나 갈수록 의지할 것 뿐일세
아무 일을 만나도 예수 의지합니다.”
최근에 돌아가신 이어령 교수님이 있잖아요? 그는 철저한 무신론자였습니다. 그는 이화여대 명예교수였고, 문교부장관을 역임한 분입니다. 지성인인 중의 지성인입니다. 그러나 그를 위해 딸 눈물로 기도하고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가 쓴 “지성에서 영성으로”의 서두에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당신의 제단에 꽃 한 송이 바친 적이 없으니/ 절 기억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모든 사람이 잠든 깊은 밤에는/ 당신의 낮은 숨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너무 적적할 때 아주 가끔/ 당신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립니다.
.
좀 더 가까이 가도 되겠습니까?/ 당신의 발끝을 가린 성스러운 옷자락을/
때 묻은 손으로 조금 만져 봐도 되겠습니까?
아, 그리고 그것으로 저 무지한 사람들의/ 가슴 속을 풍금처럼 울리게 하는 아름다운 시 한 줄을/ 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하나님
이어령 박사는 평생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어 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가 세례를 받을 때 처음으로 무릎을 꿇었다고 합니다.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면서 고백합니다.
“그 동안 누군가에게 몸을 맡겨 본 적이 없었으니 얼마나 외로운 삶이었겠습니까?
혼자 바들바들 떨면서 여기까지 온 내가 너무도 불쌍했습니다.”
이어령 교수님은 하나님만 의지하면서 복음을 전하다 하나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어느새 부요한 자가 되었습니다.
이 땅에 집도 있고 자녀도 있고 먹을 것도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 없이 살 정도로 사는 분들도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내 맘대로 해도 되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어느 새 우리 마음이 부요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누가 심령이 가난한 자인가요?
하나님 없이는 안 된다고 고백하는 자가 겸손한 자입니다.
세상 욕심을 버리고 하늘나라 가치로 살아가는 자가 가난한 자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는 자가 가난한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에게 천국을 주시기 원합니다.
우리 이 땅에서 천국의 축복과 행복의 감격속에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
'성신 강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 (0) | 2022.04.21 |
---|---|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 (0) | 2022.04.21 |
히스기야의 영적반응 (0) | 2022.03.03 |
위로하시는 하나님 (0) | 2022.03.03 |
새로운 미래를 여시는 하나님 (0) | 2022.03.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