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하시는 하나님
고린도후서 1:3-7
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오 자비의 아버지시오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라 혹 위로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 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포인트 워드: 위로하시는 하나님
활용: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말이 격려의 말이다. 용기를 주는 말을 들어야 한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우리를 격려 하시고 용기를 주시는 분이시다.
성경을 가슴에 안고 고백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영혼의 양식이며 영적 전쟁에 무기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오늘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말씀은 고린도 후서 1:3-7절입니다. “위로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요한 3서 1장 2절에서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하노라”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해 지기를 바랍니다. 주 예수님의 은혜가 충만한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1978년 로마교황 요한 바오로1세가 서거하셨습니다. 취임한지 겨우 33일만의 죽음이었습니다. 온 세계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장례절차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교황이 이 짧은 임기동안에 특별히 임종직전에 남긴 일기문이 공개되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부자들이여, 가난한 자들을 기억해 주십시오. 직장인들이여, 무직자들을 기억해주십시오. 건강한 자들이여, 병든 자를 기억해주십시오. 남을 위해서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라고 하는 간단한 기록입니다. 이 일기문이 온 세계에 공개되게 될 때에 제일 먼저 충격을 받은 것은 노벨평화상 위원회였습니다. 그들은 심사숙고한 끝에 인도의 빈민굴에서 한평생을 바친 테레사 수녀에게 평화상을 수여하게 되었습니다.
테레사 수녀의 기록을 보십시다. “가장 큰 질병은 결핵이나 문둥병이 아닙니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고 아무도 위로하지 않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 이것이 가장 무서운 질병입니다. 세상에는 빵이 없어서 죽어가는 사람도 많지만 작은 사랑이 없어서 죽어가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우리 가운데 위로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누구나 사랑받고 싶고, 위로받고 싶고 존중 받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난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남다른 고민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축복된 자들이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것은 그리 쉬운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에서 2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성도들에게 고난이 있다. 그리고 위로도 있다.” 우리가 고난 당할 때, 하늘의 위로를 기대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더 나아가서 교회 공동체는 위로의 공동체가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우리가 고난을 만날 때, 위로를 기대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첫째, 고난에는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실 때에는 다양한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실까요?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인가요? 예. 맞습니다. 우리를 영적으로 성숙시키기 위함인가요? 예. 맞습니다. 하나님이 큰 사람, 큰 인물로 만들기 위해 고난을 통해 연단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한 가지를 말합니다. 우리의 고난의 경험을 통해 우리가 다른 이웃들을 위로하는 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4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1:4) 6절에는 말씀합니다. “우리가 환난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고후1:6) 사도들이 고난을 받는 것은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한자어에 ‘동병상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같은 병을 앓은 사람끼리 서로 불쌍히 여기게 된다.’는 말입니다. ‘과부의 마음을 과부가 알아주고, 홀아비 마음을 홀아비가 알아준다.’는 말과 같습니다. 병들어 아픈 사람들의 마음을 누가 알아줍니까? 병든 사람이 그 마음을 알아 줍니다. 아픔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그 아픔을 모릅니다. 안다고 해도 그 고통의 깊이를 온전히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화) 옛날 영국 빅토리아 여왕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신하의 아내가 유산을 경험했습니다. 그후 그녀는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토록 원하던 자녀를 잃고 마음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런데 여왕이 직접 신하의 집에 방문하여 그 부인을 만났습니다. 여왕을 만나고 나서 다시 삶의 의욕을 회복했습니다. 사람들은 궁금했습니다. “도대체 여왕이 찾아와서 무슨 말을 했나요?” 부인이 말합니다. “여왕은 제 손을 잡고 한 마디 말을 하셨습니다.” “당신의 마음이 어떤지 내가 알아요.” 여왕도 얼마 전에 유산의 아픔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여왕이 직접 찾아와서 손을 잡아 주고 위로할 때, 유산의 아픔은 나 혼자만의 아픔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마음 속에 있던 고통이 사라졌답니다.” 이것이 바로 위로의 능력입니다.
오프라 윈프리를 아실 것입니다. 토크 쇼를 진행하던 방송인입니다. 성폭행을 당한 사람들이 나와서 끔찍했던 과거를 회상하며 말합니다. 그들이 고통의 기적을 끄집어 내어 말할 때, 오프라 윈프리도 울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오프라 윈프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게스트들을 끌어 안고 울면서 말합니다. “나도 당신의 아픔을 알아요. (I know yourn pain.)” 그리고 자신이 경험했던 끔찍한 과거를 다 이야기합니다. 그녀의 고백에 방청객도 울고 텔레비전을 보던 모든 사람들이 울었습니다.
오프라 윈프리는 18세의 미혼모의 딸이었습니다. 9살 때,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14살에 임신하여 조숙아를 낳았습니다. 마약도 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겪었던 아픔과 슬픔의 경험을 통해 고통당하는 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살고 있습니다.
위로를 영어로 comfort라고 합니다. com은 함께 라는 말이고, fort는 (fortare)는 힘을 돋운다는 뜻이 합쳐진 단어입니다. 고통받는 사람들이 함께 하는 자리. 그곳은 고난을 이기는 새 힘을 공급받는 능력의 자리요 치유의 자리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위로자가 되라는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환난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헨리 나우엔은 예수님을 ‘상처입은 치유자(wounded healer)’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예수님이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립니다. 예수님이 고통을 당했기에 우리에게 치유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난 속에서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이 상처입은 자들을 위로하고 치유자가 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소명이라는 목적으로 허용되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고난이 꼭 죄의 결과만은 아닙니다. 욥의 친구들은 위로자가 아니라 욥의 죄를 들추어 내며, 욥을 괴롭게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우리가 고난 가운데 위로를 기대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둘째, 고난 중에서 위로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많습니다. “전능한 하나님, 치료하시는 하나님, 준비하시는 하나님, 인도하시는 하나님, 거기에 계신 하나님 등” 오늘 본문에서는 위로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소개합니다. 인간의 방법으로 불가능한 일을 만났을 때, 우리는 전능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질병에 걸린 사람들은 치료하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무언가 부족하고 준비가 미흡한 사람들은 준비하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러면 위로의 하나님은 누가 만나나요? 고난과 환난을 당한 자가 만납니다.
3절입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오 자비요 아버지시오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고후1:3)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입니다. 위로의 하나님은 고난 속에서만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 속에서 위로의 주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복음 성가에 있잖아요?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보라 평화의 주님 바라보아라 세상에서 시달린 친구들아 위로의 주님 바라보아라 눈을 들어 주를 보라 네 모든 염려 주께 맡겨라 슬플 때에 주님의 얼굴 보라 사랑의 주님 안식 주시리.” “괴로울 때, 위로의 주님을 바라보고, 만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3절을 보세요.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오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환난 속에서 바울이 체험한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요, 위로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여기서 ‘모든’을 주목해 보세요. 하나님은 우리가 경험하는 온갖 사건 속에서 자비를 베푸시며, 모든 일에 위로자가 되신다는 말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고난과 고통을 허락하시느냐고 묻지 마세요. 성경을 묵상하고 기도해도 쉽게 알지 못합니다. 단지 신앙의 선배들은 ‘고난의 신비’라고 말합니다. 욥의 고난이나, 요셉의 고난, 다니엘의 고난, 예레미야의 눈물. 믿음이 좋은 신앙인들이 한결같이 고난 속에 있었잖아요?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마치 자식의 고통으로 아파해 주시는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의 몸을 입고 왔습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건이 십자가였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유한한 존재들에 의해 짐승같이 대접을 받은 것입니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니니라”(히2:18)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우리 예수님은 본인이 직접 고통을 당하시고, 시험을 당하셨기에 어려움에 처한 자들을 방관하지 않습니다. 연약한 자들을 능히 돕는 자요, 시험받는 자들을 돕는 자이십니다. 본인이 직접 고통을 당하셨기에 버림을 받고 조롱을 당하는 자들을 직접 찾아오셔서 만나주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빅토리아 여왕이 신하의 아내 곁에 찾아간 것처럼 말입니다.
본문 5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고후1:5) 고난 속에서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구약에서 엘리야 선지자가 나옵니다. 열왕기사 18장에서 갈멜산에서 대 승리를 거둡니다. 그러나 19장에서는 나약한 한 인간의 모습을 보입니다. 로뎀 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기도합니다. 살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빨리 천국에 가기를 소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는지 볼까요? “로뎀 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왕상19:5-6)
하나님은 죽기를 구하는 엘리야를 책망하거나 꾸짖지 않았습니다. 천사를 보내어 떡과 물을 주셨습니다. 천사가 준 따뜻한 빵과 물을 먹고 엘리야는 또 다시 눕습니다.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때 천사가 어떻게 합니까? “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왕상19:7) 하나님은 엘리야를 “어루만지며” 더 먹을 것을 원했습니다. 따뜻함을 느끼게 하셨습니다. “내가 네 편이야. 힘내” 이런 뜻으로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그에게 먹을 것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입니다. 지치고 상한 심령을 추하고 더럽다고 하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가오시어 지친 영혼을 어루만져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낙심하고 절망 속에 있는 나를 어루만져주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면서 힘없고 약한 자, 따돌림과 멸시 받는 자들,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우리의 격려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격려하시고 위로해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언제나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들 성도들이 고난 중에도 위로를 기대할 수 있는 이유는 또 무엇입니까?
셋째, 함께 하는 공동체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3-7절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고난과 위로’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우리’라는 단어입니다. 4절입니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5절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절입니다.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7절입니다.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사도바울은 단순히 자신의 고난을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의 고난에 대해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위로에 대해 고백합니다. “우리의 환난이 너희의 위로가 되고, 우리의 고난의 너희의 구원이 되고, 우리의 위로가 너희의 위로가 되어 우리가 함께 고난을 견딜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말에 이런 말이 있죠? “기쁨을 함께 하면 두배가 되고, 슬픔 함께 하면 절반이 된다.” 고난당하는 자와 함께 하면, 고난이 가볍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포스트 모더니즘의 사회는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팽배해져 있습니다. 무관심이 너무 팽배해져 있습니다. “나와 상관없어. 내 일 아니야.” 요즘 유행이 ‘혼술, 혼밥, 혼행, 혼영’입니다. 혼자 술먹는 사람이 혼술, 혼자 밥을 먹는 사람이 혼밥, 혼자 여행하는 사람이 혼행입니다. 혼영은 혼자 영화보는 사람입니다. 혼자 사는 세대가 많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혼자 살 수 없습니다. 서로 어울려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 공동체 속에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모릅니다. 그러나 초상이 나거나, 사고를 만났을 때, 공동체가 필요함을 절실하게 느낍니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가 서로 사랑하며 위로하는 공동체가 되어 주길 바랍니다. 초대 교회 공동체는 사랑의 공동체 였습니다. 로마서 12장 15절입니다.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롬12:15)
예화) 일본에서 일어났던 이야기입니다. 올림픽 때입니다. 경기장 보수를 하려고 지붕을 거둘 때, 목수들이 벽에 못이 박혀 있는 도마뱀 한 마리를 보았습니다. 3년 전 공사가 있었는데, 꼬리에 못이 박힌 녀석이 3년 동안 살아 있던 것입니다. 목수들이 궁금했습니다. 어떻게 해서 3년 동안 도마뱀이 살아 있을 수 있을까? 3일 동안 지켜 보았답니다. 다른 도마뱀 한 마리가 못에 박힌 도마뱀에게 먹이를 가져다 주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도마뱀이 누구였을까요? 부모일 수도 있고, 부부일 수도 있고, 형제일 수도 있습니다. 꼬리가 못에 박힌 친구를 위해, 3년 동안 어둠 속에 갇힌 동료를 친구를 위해 누군가는 희생했다는 것입니다.
미물도 이렇게 사랑하는데,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요? 우리 교회 공동체가 서로 사랑하고 돌보아 준다면 얼마나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
이사야 40장 1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사40:1-2)
이 세상에서 위로와 격려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우리가 우리 남편과 아내를 위로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는가? 열심히 일하는 자에게 위로해 주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그러나 그렇지 못한 자라도 “힘내. 내가 기도하고 있어.” 이렇게 용기를 주면 어떨까?
지그 지글러(Zig Ziglar)가 [정상의 법칙]에서 이런 말을 한다. “지구상에서 30억의 인구가 매일 밤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잠자리에 든다. 그러나 그보다 많은 40억의 인구가 매일 밤 따뜻한 격려의 말 한 마디를 아쉬워하며 잠자리에 든다.”
이제 우리는 생명의 말로 다른 사람에게 힘을 주고 응원해 줍시다. “제가 늘 당신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나는 당신 편입니다. 힘내세요.” “아자, 아자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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