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유한 자의 복
마태복음 5:1-5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포인트 워드: 복
목적: 하나님 앞에 우리는 복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인가?
성경을 가슴에 안고 고백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영혼의 양식이며, 영적전쟁에 무기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요즘 세대를 ‘충동 조절 장애의 세대’라고 말을 합니다. 자신의 충동도 조절하지 못하고 감정도 절제하지 못하고 분노도 억제 하지 못하는 세대입니다. 분노의 감정이 치밀어 오르면 그대로 행동을 합니다. 데이트 폭력, 총기 난사와 테러, 층간 소음, 보복운전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명심해야 합니다. 신앙인들은 감정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요즘은 자기와 정치적인 성향, 이념적인 성향이 다르면 아예 마음 문을 닫아 버립니다. 부부간에도 가족간에도 세대 간에도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찬송가 가사를 명심해야 합니다. “감정을 버리고 말씀에 서니, 불완전한 믿음 완전해 지고 내가 이제부터 주만 붙드네.”
우리는 본문 말씀 5절을 다시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5)
‘온유한 자’는 ‘하나의 힘이 잘 조절되어 그것이 인격에 나타나는 덕성’을 의미합니다. 부드러운 마음으로 대하면서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어떠한 악의에도 오래참는 것을 의미합니다. 온유한 자는 ‘잘 길들여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사람입니다.
우리 주변에 보면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은 사람들이 다 좋아합니다. 반대로 자신만 의로운 척하고, 큰 소리 치고 감정을 터트리고 혈기를 부리면 사람들이 다 등을 돌립니다. 이들이 잘 될리는 만무합니다. 하나님은 분명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이 어떻게 하면 온유한 자가 될 수 있을까요?
첫째, 예수님의 온유함을 배워야 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9-30)
예수님은 스스로를 온유한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온유한 사람인가요? 아니면 다혈질의 사람인가요?
사람의 감정이 성령님의 어루만짐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님을 만나면 사람이 온유한 사람으로 변화가 됩니다.
예수님에 대해 이사야 선지자는 예언을 합니다. 이사야 53:7절입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53:7) 예수님은 죽음의 형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고 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십자가의 6시간 동안 변명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항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주의 말을 쏟아내지 않았습니다. 죄없는 예수님이 마땅히 당해야 하는 것처럼, 입을 열지 않고 잠잠히 고통을 받아 들이셨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덴마크 수도 코펜하겐의 한 교회에 신고전주의 조각가 소왈슨이 만든 예수님의 유명한 동상이 있습니다. 한 관광객이 그 동상 앞에 서서 한참을 바라보더니 그러는 것입니다. “유명한 동상이라고 해서 일부러 여기까지 보러 왔는데, 별거 아니구먼.” 실망해서 돌아가는 사람에게 그 교회 교인이 말하더랍니다. “이 동상은 그렇게 앞에 서서 보지 말고 더 가까이 다가서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올려야 봐야 예수님의 얼굴이 바로 볼 수 있어요.”
관광객이 동상 앞에 무릎을 꿇고 올려다 본 순간, 사랑으로 보라 보고 계시는 예수님의 얼굴을 보고 뜨거운 감동을 받고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성도가 예수님을 만나야 진정으로 온유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본 받으려고 하면,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자는 자기 성깔대로 살아갑니다. 성품이 전혀 만진 바가 되지 않았습니다. 잘못 믿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 자는 예수님을 닮아가려고 합니다.
저는 천주교에서 배울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수녀들이 수녀가 되는 순간입니다. 견습 과정을 끝내고 진짜 수녀가 되는 것이죠. 마치 신학생들이 목사 안수를 받는 것과 같습니다. 앞에서 예식을 인도하는 수녀가 한 사람 이름을 부릅니다. 그 때, 수녀가 되려고 하는 사람이 말합니다. “예, 주님 말씀하옵소서.” “예 주님 말씀하옵소서.” 이 짧은 말을 듣는 순간, 감동이 밀려 왔습니다. 이들은 수녀가 신부가 예식을 인도할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삶은 예외일 수 있겠지요?
우리가 진짜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의 짐을 지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의 모습에서 예수님이 나와야 하지, 인간의 모습이 나오면 안 됩니다.
356자 ‘성자의 귀한 몸’이란 찬송가가 있어요?
“성자의 귀한 몸 날 위하여 버리신 그 사랑 고마워라
내 머리 주 앞에 조아려 하는 말 나 무엇 주님께 바치리까“
“주님의 십자가 나도 지고 신실한 믿음과 마음으로
형제의 사랑과 친절한 위로를 뉘게나 베풀게 하옵소서“
둘째, 하나님의 사랑을 행해야 합니다.
고린도 전서 13장 4-7절입니다.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13:4-7)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온유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사랑입니다. 온유함으로 표현되어 집니다. 사랑하는 자는 무례히 행하지 아니합니다. 성내지 아니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어떤가요? 자기 이해관계에 따라 너무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않아요? 자존심이 조금만 상해도 화를 버럭버럭 냅니다. 자기의 유익만을 구하고 남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지 않습니까? 너무나 감정적이라 말씀도 없고 진리도 없고, 심지어 하나님도 없이 행동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요?
2015년 지방에서 의학전문대학원생이 밤중에 여자친구에게 데이트 폭력을 행사한 것은 기가 막힙니다. 새벽 3시에 전화해서 성의없게 전화 받았다고 해서 여자 친구를 4시간 동안 감금한 사건입니다. “치아를 뽑아 버리겠다. 이제야 죽일 수 있어서 속 편하다.” 등. 온갖 폭언을 하고 빰을 100대 때리고 발길질 하고 목을 졸랐다고 합니다. 결국 112 신고를 통해 여자는 구출 되었지만, 앞으로 의사가 될 사람이 사람을 살릴 사람이 사람을 패 죽이려고 하니, 이 어찌 된 일입니까? 결국 그 남자는 의학전문대학원에서 제적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총칼로 전 세계를 지배하려고 했지만, 결국은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유배당하고 일생을 마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비폭력, 무저항, 박애의 정신으로 온유하게 섬기다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전 세계인들 가운데 크리스찬이 24억 명이 넘습니다.
우리 사회의 문제는 너무 감정적이라는 것입니다. 크리스찬의 삶은 어떤가요?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가 자신과 정치적인 성향이 달라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처칠 수상에게 연극이 입장권 2장을 보냈습니다. 그 초대장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제가 하는 새 연극의 첫날 공연 입장권 2장을 보냅니다. 한 장은 당신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한 장은 당신의 친구를 위한 것입니다. 혹시 당신에게 친구가 있다면 말입니다.”
처칠에게 무슨 친구가 있겠느냐는 비아냥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처칠이 답장을 보냅니다.
“시간이 없어서 당신의 첫날 공연에는 가보지 못하지만 둘째날 입장권을 보내 준다면 기꺼이 가도록 하지요. 혹시 당신 연극이 둘째 날에도 공연된다면 말입니다.”
버나드 쇼와 처칠이 감정으로 대하니, 서로 막상 막하 아닙니까?
예수님은 누가복음 6:27-28절에서 말씀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라고 말씀합니다.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원수를 선대하고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다면,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해 축복기도 해야 합니다. 와, 이렇게 힘든 것을 우리가 해 낼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놀라운 일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또한 악한 영들도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넘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어야 원수를 축복하고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첫째, 예배의 현장입니다. 둘째, 성만찬입니다. 셋째, 사랑의 나눔이 있는 곳입니다. 누구나 자기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자기의 것으로 남과 나누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나눔이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도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이 지금 가족들에게 베풀어지면 어떨까요?
하나님의 사랑이 교회 공동체 회원들에게 베풀어지면 어떨까요?
누구나 만나면 헤어지게 됩니다. 지금 함께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면 어떨까요?
결국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한 자가 땅을 차지하게 되어 있습니다.
셋째,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성령을 받고 성령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온유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충만의 열매가 온유함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우리가 성령님을 주목하고 성령님께 복종할 때, 성령의 열매를 맺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24)
우리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데, 우리 힘으로 안 됩니다. 성령님이 도우셔야 합니다.
모세를 보세요. 그는 다혈질의 사람입니다. 불의를 보면 참을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을 괴롭히는 애굽의 병사를 쳐서 죽였습니다. 그런데 40년 동안 광야에서 양치기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납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원망과 믿음 없음을 대할 때, 예전 같으면 어떠했을까요? 포기했을 것입니다. 욕을 해 댔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방법을 택합니다.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합니다. 형제지간에 갈등이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니라”(민12:3) 지구 상에서 어떤 사람보다 온유한 사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날마다 회막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더니, 모세의 성품이 변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성품이 성령님에 의해 변화받았습니까? 그러면 진짜 그리스도인입니다.
성령님에 의해 만진 바가 되어야 진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에 의해 만진 바 되지 못하면, 아직도 신앙의 어린아이입니다.
김치 사오론이 있잖아요? 김장 김치는 5번 죽어야 한다. 땅에서 뽑힐 때, 한 번 죽습니다. 배추 통을 갈라야 합니다. 세 번째는 소금에 절여지면서 죽어야 합니다. 네 번째는 고춧가루와 젓갈에 버무려져서 죽고 다섯째는 김장독에 들어가서 죽어야 합니다. 맛있는 김치를 만들기 위해 배추가 죽어야 합니다. 신앙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을 때, 진정한 신앙인이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자신을 죽일 수 있습니까? 삶의 순간마다 “주여, 주여”를 외치면서 성령님이 내 맘을 어루만지도록 내어 드려야 합니다. 미움 다툼 시기 질투를 버리고, 사랑과 용서의 삶을 살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혈기등등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던 사람입니다. 자기 속의 분노의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그는 고백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따라 해 볼까요?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나는 별세했습니다.”
예화) 김군희 선교사 간증
우간다 선교사로 사역하는 분이 있습니다. 김군희 선교사입니다. 원래 천주교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고집불통이었다고 합니다. 서너 살 때까지는 한 번 울기 시작하면, 눈물이 마르고 목이 쉬어 머리가 아프고 음성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울었다고 합니다. 사춘기 때에 아버지가 말합니다. “너는 네 뱃속에 철로 만든 꼬챙이가 서 있구나.” 아버지 말씀도 듣지 않고, 아버지 일에 대해 옳고 그름을 지적할 정도로 버릇이 없었다고 합니다. 20대에 연애 할 때는 그 강한 고집 때문에 남자친구와 의견 충돌이 있었고, 화가 풀리지 않아 버스로 가야할 거리를 세 시간 이상 걸어서 집에 돌아올 정도였다고 합니다. 고집이 너무 세서 먼저 용서를 구한 적이 없었답니다. 상대방이 용서를 구할 때까지 2-3주간 냉전을 거듭했다고 합니다.
결혼후에는 남편과 충돌로 인해 너무도 힘든 고통과 불행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특히 남편의 음주 때문에 부부싸움은 끊이지 않았고, 더욱이 가정부로 들어온 할머니가 주인 행세를 해서 심한 갈등을 겪었습니다.
그러다가 친구의 권면으로 금식 기도원에 들어가서 기도합니다. “주여, 주여, 주여”를 하고 힘을 다해 외치는데 갑자기 뱃속 깊은 곳에서 그 동안 가슴 속 깊이 억눌려 있던 감정의 응어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한 없이 울면서 부르짖는데 주님의 음성이 들여 옵니다. “네가 나를 죽였느니라.” 선교사님은 대답합니다. “제가 얼마나 하나님을 믿고 섬겨 왔는데요. 왜 제가 주님을 죽여요?”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 주시는데, 자신이 사형수로 감옥에 갇혀서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더랍니다. 너무도 살고 싶어서 외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죄 많은 저를 살려 주시옵소서. 용서해 주시옵소서.” 한 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통회하고 자복합니다. 그렇게 울부짖는 가운데 해방되는 환상을 보게 됩니다. 성령을 받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으로 살기 시작합니다. 고집 세고, 자기 중심적인 삶이 온유하고 겸손한 삶으로 변하고 주변 사람을 사랑으로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나이 60에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우간다로 선교사로 나가 사역을 하게 된 것입니다. 육신적으로는 힘들지만, 가슴이 아프지만, 노년에 성령님의 도움으로 15년 동안 우간다 선교를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땅을 선물로 받고 싶으세요?
천국에서 큰 자가 되고 싶으세요?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싶으세요? 예수님의 온유를 배워야 합니다. 성령으로 살아야 합니다.
'성신 강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 (0) | 2022.06.15 |
---|---|
부활신앙으로 승리하자 (0) | 2022.04.21 |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 (0) | 2022.04.21 |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0) | 2022.04.21 |
히스기야의 영적반응 (0) | 2022.03.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