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신 강단

상한 감정을 치유하시는 성령님

박도식 2021. 3. 22. 17:09

상한 감정을 치유하는 성령님

사도행전 10:38

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포인트 워드: 성령님

활용: 성령님 우리에게 여러 가지 일을 하신다. 그 중에 한 가지가 우리의 상한 감정을 치유하신다. 마음 속에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가 충만하게 하신다. 우리로 하여금 마음의 병에서 고침을 허락하신다.

 

성경을 가슴에 안고 고백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영혼의 양식이며, 영적 전쟁에 무기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오늘도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잊지 아니하시고 이렇게 예배 드리려고 올라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해서 이렇게 올라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마음이 예쁘고 발걸음이 아름다워서 환영하시고 여러분의 가정에 큰 은총을 부으실 것입니다.

 

우리 가정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우리 아버지는 6남매 중 다섯 번째로 태어났습니다. 중학교를 중퇴하고 미장을 배웠습니다. 할아버지를 돕고자 함입니다. 정직하고 착실한 분입니다. 돈을 벌면 할아버지에게 다 드렸습니다. 할아버지는 둘째 아들 이름으로 땅을 샀습니다. 군대 갔다 오면 주려고 말입니다. 그런데 작은 아버지, 아버지의 동생이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면서, 그 땅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자기가 경작해 왔다고 하면서 주변 사람들의 확인서를 받아서 말입니다. 아버지 마음이 얼마나 아펐을까요?

 

큰 아버지의 큰 딸이 있습니다. 미국에 이민 가려고 하면서 쌀 18가마를 주었습니다. 1974년도에 한 가마에 90kg일 때입니다. 큰 아버지가 계를 타면 갚아 준다는 약속을 받고 말입니다. 그런데 30년이 넘도록 그 빚을 갚지 않고 있습니다. 큰 아버지도 책임을 회피했고, 큰 어머니도 책임을 회피했습니다. 40년 전의 쌀 18가마는 큰 돈입니다. 지금으로는 1억 이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누구도 미안하다고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큰아버지도 미국에 사촌누나도 말입니다. 이 일로 인해 아버지 어머니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잘 압니다.

 

여러분은 이런 아픔을 경험하지는 않습니까? 친척이 배신을 하거나, 사기를 친 적은 없었나요? 남에게 말할 수 없는 쓰라린 상처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습니까? 누구나 인생에서 좋은 만남과 아름다운 추억이 있으면 좋으련만 우리네 인생을 절대 그렇지 못합니다. 악한 영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상처를 주기 때문입니다. 도적질하고 멸망시키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상처를 싸매주고 위로해 주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상처에 빨간약을 발라주고 치료해 주시는 분입니다. 아버지 어머니의 상한 마음을 위로하시고 치료하는 분이었습니다. 내년이 결혼 60주년이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사야 3026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칠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30:26)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저희 상처를 싸매시는도다”(147:3)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103:3-4)

 

성령님의 기름부음이 임하면 우리에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이사야 61:1-2입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61:1-2)라고 합니다.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오늘은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는 성령님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마음의 공간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쉽게 상처 받을 수 있지만 쉽게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마음 속 깊은 곳의 짙은 상처라도 다 치유하시는 분입니다.

 

첫째, 성령님은 요셉의 상처를 치유하셨습니다.

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하고”(41:38)

 

바로 왕은 요셉을 표현할 때,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요셉이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임을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왕이 그 말을 할 때에 요셉은 보디발 장군의 감옥에 갇혀 있을 때입니다.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고 있을 때입니다. 죄를 지어 감옥에 들어가면 억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 죄도 없는데 옥살이를 한다면 마음이 편치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요셉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성령의 충만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인생을 한번 말해 볼까요? 17세에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양을 치는 형들에게 갑니다. 형들은 동생의 옷을 채색옷을 벗깁니다. 옷을 찢어 버립니다. 빈 구덩이에 놓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울면서 애원했을 것입니다. “, 왜 이러세요. 형들 살려 주세요.” 어느 누구 하나 동생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습니다. 그리고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렸습니다. 인신매매를 당한 것입니다. 말이 다르고 풍습이 다른 애굽에 노예로 팔립니다.

 

참으로 기가막힌 인생입니다. 우선 옷이 찢기는 아픔이 얼마나 큽니다. 인격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하찮은 존재로 취급을 받습니다. 그 당시 노예는 인격도 없고, 생명도 귀중하지 않습니다. 단지 주인의 재산목록에 들어갈 뿐입니다. 노예는 죽여도 살인죄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아버지 야곱에게 사랑을 받는 위치에서 하루 아침에 자유롭게 행동할 수 없는 노예가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상처받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나요?

 

어느 부부는 남편이 경제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내에게 생활비 외에는 다른 돈을 주지 않습니다. 부부간에 문제가 발생하여 상담을 받습니다. 남편이 어렸을 때, 이야기 합니다. 5살인가 6인가? 집에서 놀다가 넘어졌답니다. 그런데 마루 위에 앉아 있는 부모님이 관심이 없더랍니다. 누나도 아퍼서 울고 있는 동생에게 다가오지 않더랍니다. 그러면서 어린 나이에 결심했답니다. ‘인생은 나 혼자다. 믿을 사람은 나 밖에 없다.’ 그래서 결혼을 하고도 아내에게 돈을 맡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의 상처가 성인이 되고도 그래도 표현된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보통 사람이라면 평생 아프다가 죽을 수 밖에 없는 경험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39:2)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사람이 되었답니다. 형통한 자가 되었답니다. 보디발 장군이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했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위하여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주셨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요셉이 가해자들을 용서했기에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는 말입니다. 성령충만함으로 그 상처를 딛고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보통사람이라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형들에 대한 증오와 원한으로 이를 갈고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다시 형들을 만날 수만 있다면 반드시 복수하리라. 두고 봐라.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 용서 못해.’ 아니면 아버지와 동생 베냐민,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눈물로 지냈을 것입니다. 사춘기에 언어나 문화적인 충격으로 인해 매사에 소극적일 수 있습니다. 노예라는 신분으로 인한 열등의식으로 심한 갈등을 겪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하나님을 향해 원망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하나님 도대체 왜 이러세요?”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사람을 향한 증오심, 슬픔과 눈물이 얽힌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요셉과 같은 입장이었다면 어떠했을까요?

여러분을 향해 형들을 용서하라고 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우리 인생에서 우리를 힘들게 한 사람을 떠 올리면 어떤 반응이 일어나나요?

제 경우는 심장이 벌렁벌렁했습니다. 그 사람과 비슷한 색깔의 옷만 봐도 가슴이 두근두근거렸습니다. 쉽지 않더라구요?

 

그런데 요셉은 엄청난 상처를 입었지만, 깨끗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나면 그의 얼굴을 보면 압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자는 얼굴에 살기가 느껴집니다. 미움과 증오심 가운데 독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디발 장군은 요셉의 얼굴에서 살기를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가정의 총무의 일을 다 맡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셉은 상처받은 감정으로 산 것이 아니라 늘 하나님을 생각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노예로 만드신 것은 무슨 뜻이 있을거야?” 하나님을 늘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성령충만을 쉽게 표현하면 하나님 생각으로 가득하면 됩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생각하면 성령의 충만함을 받습니다.

 

로마서 1219-21에서 말씀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12:19-21) 예수님도 마태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5:44)

 

사랑하는 여러분,

원수 마귀는 우리에게 불화살을 쏘면서 우리를 공격해 옵니다. 우리에게 상처를 줍니다.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불화살을 맞으면 치명적인 상처를 받게 됩니다. 마귀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야 합니다. 늘 하나님을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성령의 충만함입니다.

 

요셉이 형들을 만나고 나서 말합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45:7-8)

 

성령님은 요셉을 붙잡고 계셨다. 성령님은 요셉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집중하게 했다.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게 했다. 하나님이 미리 아버지와 형제들과 조카들을 위해 자기를 애굽에 보내셨다는 것이다.

 

따라합시다. 성령님은 요셉의 상처를 치유하셨다. 내 상처도 치유하신다. 우리가 성령충만하면 상처가 고침받는다.

 

둘째, 성령님은 스데반을 치유하셨다.

스데반이 성령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7:55)

 

스데반은 초대교회 집사였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과 부활하신 것을 말했습니다. 성령충만한 설교였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종교지도자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고, 마음에 독이 가득했습니다. 이를 갈면서 스데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눈에 살기가 있었습니다. 스데반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서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스데반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달려들었습니다. 성밖으로 끌고 나가서 돌을 들어 내려 쳤습니다. 스데반의 말이 참람하다는 것입니다. 어처구니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복음을 전하고 돌에 맞아 죽는 상황이 온다면 어떨까요?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순간일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그 순간 무릎을 꿇습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큰 소리로 기도합니다. “주여! 저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자기를 향해 돌로 쳐 죽이는 사람들을 향해 용서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스데반의 행위는 인간의 이성이나 지성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만약에 스데반의 부모나 자녀, 형제가 이 광경을 보았다면 어떠했을까요? 충분히 상처로 남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은 자기 아들들을 죽인 원수를 양아들로 삼고 목회자가 되어 살게 했습니다.

 

우리가 받는 상처를 한 번 생각해 볼까요? 언어적인 아픔을 당할 수 있습니다. 무시당하거나 모욕을 경험할 때입니다. 물리적인 아픔도 있을 수 있습니다. 성폭행이나 폭행의 고통을 당한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물질적인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재정적으로 사기를 당하거나 많은 손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마음이 아픈 상처들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요셉이 당한 아픔이나 스데반의 경우보다 더 심한 아픔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한결같이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은 상처를 별로 만들어 갔습니다. 아시죠? 상처는 scar이고 별은 star입니다. ct로 바꾸면 됩니다. 성령님과 동행할 때, 가능한 일입니다.

 

코리 템 붐의 이야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녀는 폴란드 사람으로 전쟁 중에 포로로 잡혔습니다. 언니가 포로 수용소에서 죽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독일에서 간증집회를 합니다. 간증 집회 후 한 사람 한 사람이 나와서 악수를 합니다. 그런데 한 남자가 다가 오는데 가슴이 두군거립니다. ‘누구일까?’ 답답해 오는 느낌을 외면할 수가 없습니다. 포로 수용소에서 잔인하기로 유명했던 간수였습니다. 수용소 죄수들의 옷을 벗기고, 언니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장본인입니다. 그때 기억이 떠 오릅니다. 절대 이 사람만은 용서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도우십니다. 인간의 본성으로는 용서할 수도 없고, 용납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코리 템 붐의 손을 들어 화해의 악수를 받아 들이게 됩니다. 이 때 그녀는 고백합니다. 성령님으로 충만함을 느꼈다고 말입니다. 사랑의 은혜가 충만하게 부어짐을 느낍니다.

 

성령충만이 능력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절대 원수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원수가 안 되어야 통쾌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용서의 영입니다. 우리 안에서 용서를 이루게 하십니다. 현대 신앙인들을 향한 말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술을 마시고 화해하면 된다. 그러나 성도들은 죽을 때까지 원수를 맺으면서 살아간다. 무엇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하나님은 원수를 용서하고 축복하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정반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할 때, 우리는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셋째, 성령님은 예수님의 상처를 치유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23:34)

 

빌라도 총독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고 예수님이 처음으로 받은 고난은 채찍에 맞는 것입니다. 채찍에 맞고는 군병들에 의해 옷 벗김을 당하는 수치를 경험했습니다. 누군가 내 옷을 찢는다는 것은 굉장한 인격적인 수치였습니다. 그 다음 침 뱉음과 온갖 희롱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벌거벗김을 당한 채로 나무에 달리는 고통을 경험합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임을 당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맞을 만한 이유가 있나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습니다. 예수님이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고통은 결국 우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사건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에 의해 처참하게 죽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는 사건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면 엄청 억울하게 고통스러울 텐데, 예수님이 그때 기도합니다. 아버지,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벌거벗기고 나무에 달린 상태에서 이런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 군병들과 사람들은 예수님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셨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중학교 3학년 때, 억울하게 선생님께 맞은 적이 있습니다. 정말로 그렇게 맞아 본 적은 없습니다. 항상 모범생이었고, 학생회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억울하게 맞았을 때, 그냥 참았습니다. 그 학교가 우리 교회에서 세운 학교였고, 교장 선생님이 친구 아버지였고, 우리 교회 장로님이셨습니다. 무식하게 때렸던 선생님을 향해 무어라 말하지 않았습니다. 내 맘이 선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냥 참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느낍니다. 예수님은 얼마나 아프셨을까?

 

우리 중에 누가 예수님처럼 상처를 받은 사람이 있나요? 예수님이 드려야 하는 기도는 바로 내가 드려야 할 기도입니다. “아버지,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이 기도가 우리 안에서 살아 역사해야 합니다. 모든 신앙인들이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모든 상처의 치유는 벌거벗고 신음하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다 해결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그 상처가 바로 나를 위한 치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못할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도우시면 우리 또한 용서의 사람이 될 수가 있습니다. 상처 입은 우리를 끌어 안아 주고 치료해 주시는 분은 하나님 이십니다.

 

우리 주변에는 상처받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가족내에도, 교회에서도 직장에서도 많습니다. 그들을 누가 치유할 수 있나요? 누가 그들의 아픔을 들어주고 깨끗하게 할 수 있나요? 성령님이 하십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예수님이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면 상한 감정이 치유가 됩니다.

 

우리의 감정들이 치유받을 때, 우리는 남의 상처가 보입니다. 얼마나 아플까? 얼마나 괴로울까? 그 상처를 끌어안고 기도해 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아픔을 가지고 계신가요? 그 아픔을 가지고 예수님을 만나보셨습니까? 아니면 그 상처를 숨긴 채 그대로 아파하고 괴로워합니까? 상처가 곪으면 터집니다. 상처가 치료받으면 약이 되고 능력이 됩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만나야 그 상처가 치유받고 남을 치유하게 됩니다. 우리 교회는 가정을 치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상한 마음을 치유하시고, 권능으로 입혀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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