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하신 하나님
레위기 20:6-8
6 음란하듯 신접한 자와 박수를 추종하는 자에게는 내가 진노하여 그를 그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7 너희는 스스로 깨끗케 하여 거룩할찌어다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8 너희는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 나는 너희를 거룩케 하는 여호와니라
로마서 6:13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4 죄가 너희를 주관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포인트 워드: 하나님
활용: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에게는 죄가 없다. 우리 자신을 거룩함의 도구로 드리자.
청교도 시대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한 자매가 교회의 장로님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자매님은 예수님을 믿기 전에 자신이 죄인이었다는 것을 인정합니까?” 물론 자매는 “예”라고 대답합니다. 장로님은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지금 예수를 믿은 후에는 자신을 어떻게 느끼십니까?” 자매는 말합니다. “지금은 전보도 더 큰 죄인이라고 느낍니다.” 장로님이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기 전과 믿은 후에 달라진 점이 무엇입니까?” “예, 전에는 제가 죄를 향해 달려가는 죄인(a sinner running after sin)이었지만, 지금은 죄로부터 도망치는 죄인(a sinner running from sin)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아직도 죄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죄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중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은 죄 문제와의 싸움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고 회개하면 100% 죄 용서함을 받고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죄와의 싸움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창세기 3장에서 교만과 대적, 세상의 영으로 아담과 하와를 타락시킨 마귀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을 죄의 구렁텅이로 끌고 가고자 합니다. 어떻게 하든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키려 합니다. 어떻게 하면 성도들을 타락시키고 하나님이 주고자 하시는 축복을 받지 못하게 하려고 합니다. 우리 인생 최대의 적은 원수 마귀요, 그 결과는 죄로 인한 거룩함의 상실입니다. 거룩함을 잃어버린 성도들로 만들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할지어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희는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니라”(레20:7-8)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또 다른 이름을 만납니다. 우리를 거룩케 하시는 여호와(여호와 카데쉬)입니다. ‘카데쉬’라는 말은 히브리어 ‘카도쉬’에서 나온 말입니다. 영어의 ‘holy’입니다. ‘거룩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거룩함입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레 11:45) 어떻게 우리가 감히 거룩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습니까? 거룩이라는 단어는 오직 하나님께만 사용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거룩의 은혜를 베풀어 주고자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거룩해 질 수 있을까요? 로마서 6장 13절에서 그 방법을 말합니다.
첫째, 자신을 죄에게 드리지 말아야 합니다.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롬6:13)
거룩의 열쇠는 우리 스스로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로마서에서는 “죄에게 드리지 말라”고 합니다. ‘드린다’는 말은 ‘갖다 바친다. 항복하다’는 말입니다. 이제는 자신을 죄에게 갖다 바친다든지 죄에게 항복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개역 개정판에서는 ‘내 주지 말라’로 번역했습니다. 죄인 줄 알면서 행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죄의 유혹을 이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인디언 부족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체로케 부족의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말합니다. 우리 마음에는 두 마리의 늑대가 있다. 검은 늑대와 흰 늑대이다. 항상 싸우며 살고 있지. 흰 늑대는 겸손하고 절제하며 온유하다. 착하다. 사랑으로 가득찼다. 그러나 검은 늑대는 게으르고 교만하고 질투하고 쉽게 분노한다. 너의 마음에 있는 늑대 둘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손자는 본능적으로 검은 늑대가 강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할아버지에게 묻습니다. “할아버지 둘이 싸우면 누가 이겨요?” “네가 먹이를 주는 늑대가 이긴단다.”
정답입니다. 우리가 먹이는 주는 쪽이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함의 열쇠가 우리에게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먹이를 주는 쪽이 승리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죄의 유혹을 이길 힘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나서는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죄를 일깨워 주고, 죄와 싸워 이길 수 있는 힘을 공급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내 힘으로 죄와 싸우려면 100번 실패하지만, 성령님을 의지하면 우리는 이길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죄와 싸우려는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입니다.
요즘 많은 성도들이 넘어지는 것이 음란입니다. 음란은 눈으로 보는 것에서 들어옵니다. 텔레비전, 인터넷, 스마트폰을 통해 음란물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음란한 생각이 들어오게 되고, 결국 음란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5:28)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간음하였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생각의 죄를 처벌하는 법은 없습니다. 행동의 죄를 처벌하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생각의 죄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좋은 것이 무엇입니까? “남의 여자는 3번 이상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건 훈련을 해야 합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4:7-8)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12:14) 경건 훈련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신부는 거룩함으로 단장해야 합니다.
예화) 존 물린디 목사
아프리카 우간다에 존 물린디라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우간다 부흥에 귀하게 쓰임받은 분입니다. 목사님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치유가 일어났습니다. 예배드리기 전에도 고침받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처럼 환상을 보고, 예언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역자들 중 한 자매가 환상 중에 예수님으로부터 편지를 받습니다. 담임목사에게 전해 주라는 것입니다. “회개하라. 위선을 버려라. 주님과 바른 관계를 가져라.”는 내용입니다. 목사님은 자기의 죄가 아니라 팀원들의 죄인줄 알았습니다. 팀원들을 모아놓고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자기는 하나님께 죄가 없고 꽤 괜찮은 목사인줄 알았습니다.
기도에 열중하던 어느 날, 하나님이 찾아 오셔서 3번이나 그의 이름을 부르며 말씀하십니다. “존, 내가 지금 나의 거룩한 신부를 데리러 온다면 나는 너를 데려가지 않을 것이다.” 충격적인 말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직장을 버렸는데, 부모님의 재산까지 버렸는데 말입니다. 신학적으로 신앙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자기는 거룩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너는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살아가야 할 그런 삶을 살고 있지 않고 있다. 너는 온갖 더러운 것이 너의 삶에 흘러 들어오도록 허용하고 있다. 너는 나의 재림을 기다리지 않는 자처럼 살고 있다. 너의 삶은 더러운 것으로 가득차 있다. 너의 삶이 간음으로 가득차 있다.” 목사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마음 속에서 그 음성을 거부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한 장면을 보여 주셨습니다. 택시를 타고 앉아서 창 밖을 보다가 한 여자를 보고 더러운 상상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밤에 침대에서도 생각 속으로 음란의 죄를 짓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설교단에서도 여인을 보면서 음란한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물린디 목사님은 통곡하며 회개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물린디 목사님이 실제로 간음을 했습니까? 아닙니다. 상상한 것입니다. 음란한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목사님의 생각을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물린디 목사님은 설교를 잘하는 분입니다. 기름부음이 강합니다. 치유의 역사도 강합니다. 그러나 속 마음을 살피는 하나님은 NO를 선언한 것입니다. 겉으로는 거룩하고 청결한 사람인데 속사람은 더럽다는 판단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요. 사람들은 겉 모습을 보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속을 살피십니다.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
저는 물린디 목사님의 간증을 들으면서 회개를 했습니다. “생각의 죄, 상상의 죄”는 어느 누구도 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 때문에 감옥에 가지 않습니다. 경찰이 출동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생각을 정확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경건 훈련을 해야 합니다. 매일 매순간을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특히 혼자 집에서 쉬고 있을 때 조심해야 합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아니요. 하나님이 보고 계십니다. 천사가 우리 영혼을 보고, 마귀도 우리 영혼을 보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업적에 관심을 갖지 마세요. 오직 우리 영혼을 거룩하고 깨끗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욥은 경건훈련을 한 사람입니다. “내가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언제 내 마음이 여인에게 유혹되어 이웃의 문을 엿보다 기다렸던가”(욥31:1.9) 다윗은 경건훈련에 실패하여 남의 아내를 빼앗고, 우리야를 죽게 만들었습니다. 경건훈련에서 실패했습니다.
둘째, 자신을 다시 산 자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롬6:11)
거룩함은 무엇을 안 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거룩의 첫 처방은 죄를 향해서는 끊임없이 NO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둘째 처방은 하나님을 향해 끊임없이 YES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롬6:11) 우리는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들입니다. 죄를 짓는데 죽은 자처럼 행동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는 산 자처럼 행동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일에는 적극적이라는 말입니다.
레위기에서 ‘거룩하다’는 말은 ‘구별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구별’이라는 단어는 2가지의 뜻을 가집니다. 속되고 더러운 것에서의 분리의 의미도 있습니다. 또한 분리한 것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는 것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우리에게 주일이 왜 소중합니까? 그 시간이 다른 시간과 구별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를 안 짓는 날이어야 하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일에 전념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성전이 거룩한 것은 죄를 짓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장소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을 성도라고 부릅니다. 거룩한 무리라는 말입니다. 왜 성도입니까? 단순히 죄를 짓지 말고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까? 더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우리의 입을 통해 말씀하시기 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얼굴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 주기 원합니다. 우리의 손을 통해 하나님의 손길을 보여주길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거룩해야 될 이유는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에 합당한 사람이 되기 위함입니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선교사의 아버지인 윌리엄 캐리는 말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자.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것을 시작하자.” 그는 구두 수선공입니다. 구두를 수선하면서 라틴어와 헬라어를 포함하여 5개 국어를 혼자 공부했습니다. 그의 나이 19세입니다. 인도 선교의 꿈을 꾸고 영국 침례교로부터 파송을 받습니다. 인도어를 공부하여 영인사전을 편찬합니다. 인도어 성경을 만듭니다. 그러나 전도여행을 하는 동안 번역했던 성경이 불에 타서 한줌의 재가 되었습니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성경 번역이 부족하기에 다시 하라고 태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인도 뱅골어 성경이 번역되었습니다. 그 후에도 24개 인도어로 성경 번역이 이루어졌습니다. 윌리엄 캐리, 그는 위대한 것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그 자신을 기꺼이 하나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종살이 하던 백성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만 축복하기 위함입니까? 아닙니다. 거룩한 이스라엘을 통해 열방을 축복하길 원하셨습니다.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찌니라”(출19:6) 한 마디로 이스라엘이 축복의 통로가 되길 바라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도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축복의 통로는 거룩한 자만이 될 수 있습니다. 거룩한 자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운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지 못한 자는 사람들에게 밟혀 조롱을 당합니다. 이제 하나님을 위해 봉사를 시작하십시오. 삶이 예배가 되게 해보세요.
셋째,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야 거룩해 집니다.
“너희는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 나는 너희를 거룩케 하는 여호와니라”(레20:8)
성경은 죄를 찾는 현미경입니다. 우리가 죄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우리 영혼을 갉아먹는 치명적인 것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당연한 것이지만 성경은 그것을 죄라고 지적한다면 죄인 것입니다. 이걸 찾아내서 회개해야 합니다. 존 물린디 목사님이 하나님께 지적받은 죄가 간음죄만은 아닙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는 작은 죄였습니다. 질투, 조정, 중상 모략같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합니다. “너는 겉으로는 최고였다. 노력하고 설교도 잘하고 기적도 많이 일으키고 기름부음도 강했다. 그러나 무수하게 조정하여 자신을 높이고, 다른 사람이 높여지고 인정받으면 원한을 품었다.” 한 마디로 교만한 목사였다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 목사님은 하나님의 인정보다 사람의 인정을 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변질된 모습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물린디 목사님의 사역에 감탄했지만 하나님은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물린디 목사님은 자신이 잘못되고 있는 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NO라고 하시는데, 본인은 청결하다고 거룩하다고 합니다. 이 정도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5:5-6)
우리가 할 일은 ➀우리 영혼을 살피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에서 사데교회에 대해 말씀합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계3:1-3)
➁ 우리는 초점을 예수님께 맞추어야 합니다. 사울과 다윗을 보세요. 똑같이 가난한 가정의 목동이었습니다. 힘이 없고 나약한 자였습니다. 처음에는 겸손한 자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끝까지 하나님께 인정받고 사울은 중간에 버림을 받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울은 처음에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었지만, 나중에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였습니다. 사람들의 인기를 구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체면을 유지하길 바랐습니다. “사울이 가로되 내가 범죄하였을찌라도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의 앞과 이스라엘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삼상15:30) 그러나 다윗은 끝까지 하나님의 얼굴을 구했습니다. 하나님께 겸손했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시16:8) 사람들은 행동을 보지만 하나님은 그 속마음, 곧 태도를 보셨던 것입니다.
➂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6:63) 예수님은 말이 영이라고 하셨습니다. 비난과 조롱, 비방을 하면 그 안에 그런 종류의 악한 영이 있는 것입니다. 마귀가 사람의 입을 통해 말을 합니다. 거룩한 말을 하면 거룩한 영이 흐르게 됩니다. 더러운 말을 하면, 더러운 영이 흐르게 됩니다.
➃ 예수님의 보혈로 자주 씻어야 합니다.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7) 눈으로 보는 것, 생각하는 것, 우리 입의 말들, 우리의 행동, 모두에게 예수님의 보혈로 덮어 달라는 기도를 해야 한다. 오직 예수님의 피만이 우릴 정결케 할 수 있다.
많은 주의 종들이 예언하는 한 가지는 한국 교회가 간음과 부도덕으로 무너질 것을 말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6:9-10)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라”(살전4:3-5)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신부단장을 해야 합니다. 주님이 오늘 오실지, 내일 오실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우리 영혼을 깨끗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 영혼이 청결해 지기 위해서는 회개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회개의 눈물은 영혼을 깨끗하게 합니다. 회개하는 영혼위에 하나님은 죄 용서의 긍휼을 베풀어 주십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5:8) 눈으로 보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룩한 생각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을 늘 예수님의 보혈로 씻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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