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꿈꾸는 교회(데살로니가)
데살로니가 1장 2-8
2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5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진 고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노라
포인트 워드: 데살로니가 교회
활용: 데살로니가 교회는 아름다운 교회이다. 본받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한다. 그의 신앙과 삶을 한 번 연구해 보자.
기업체는 홍보를 하기 위해 많은 광고비를 지출합니다. 인기 연예인에게 수 억원을 주면서 물건을 광고해 줄 것을 부탁합니다. 아마 연예인으로 최고의 광고비를 받은 사람은 마이클 잭슨일 것입니다. 코카 콜라 광고에 출연하여 1000만 달러(약120억)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돈 안들고 광고하는 것은 입소문이 잘 나는 것입니다. “그 집 음식 맛이 대한민국 최고이다. 대한민국 사람으로 그 집 맛을 안 보면 사람이 아니다.” 이 정도의 소문은 나야 합니다.
요즘 충북대학 병원은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피부과 윤태영 교수로 인해 돈방석에 앉은 것입니다. 머리가 난다는 소문이 전국적으로 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심지어 미국, 일본에서도 예약을 하고 진료를 받으려 합니다. 지난 번에는 교수님이 일주일에 3일만 진료했는데 지금은 4번을 합니다. 그래도 9월까지는 예약을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모이는 지 대머리가 그렇게 많은 줄 예전에 미처 몰랐습니다. 특진을 신청해서 갔지만 1시간이나 늦게 진료를 받았습니다. 주변에 탈모로 고생하는 분은 충북대학 병원 피부과에서 상담하세요. 사람의 입소문은 무서운 것입니다. 광고하지 않아도 사람들을 모이게 합니다.
미국에 해리 에머슨 포스딕이라는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록펠러가 지은 뉴욕의 강변 교회(리버사이드 처치)를 담임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뉴욕을 관광하기 오신 분들은 꼭 강변 교회를 들렀다고 합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그 당시 목사님의 설교는 경제 공황으로 실의에 빠진 이들에게 큰 힘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듣기 위해 교회에 찾은 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록펠러를 보기 위해 교회에 들렀습니다. 교인은 700명인데 참석인원은 매번 1500명입니다. 800명은 세계적인 부자인 록펠러를 보기 위해 교회에 참석한 것입니다.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당시의 미국인들은 뉴욕에 와서 강변 교회에 가보고 예배드리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름다운 꽃이나 탐스러운 과일 아래에는 길이 나 있습니다. 그 매력이 사람들의 발걸음을 인도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매력이 있는 교회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어 있습니다. 성장하는 교회들을 보면 소문이 좋은 교회들입니다. 잘 되는 집은 입소문이 좋은 집안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꿈꾸는 교회는 어떤 교회의 모습을 가져야 하겠습니까? 데살로니가 교회의 모습을 살펴 보고자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해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살전2:19-20) 바울의 기쁨이며 자랑의 면류관이랍니다. 주의 종이 그토록 사랑하였던 교회라는 것입니다. 본문 1장 7절에서는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는 자들의 본이 된 교회입니다. 8절에서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진 고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고 합니다. 교인들의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습니다. 아름다운 소식이 널리 전파된 교회입니다. 그래서 그러면 데살로니가 교회의 특징이 무엇인지 말씀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믿음의 역사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살전1:3)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한 것이 아닙니다. 정말 진지하게 말씀대로 살려고 했습니다.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가 있었습니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은 내적인 자세를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 수고, 인내”는 그것의 외적인 표현입니다.
믿음의 역사란 믿음으로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은 돈이 밑천이고 우리 신앙인은 믿음이 밑천입니다. 세상에서는 지식이 있고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이 인기입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믿음이 있고 믿음의 행함이 있는 사람이 최고입니다. 교회는 믿음의 사람들의 공동체이지 지식이 많은 사람들의 공동체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과 지식을 밑천으로 삼습니다. 방백들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찌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시146:3-4) 하나님은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간답니다. 그 도모하는 것이 소멸된다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에게 믿음으로 살 것을 말씀하십니다. 믿음은 우리를 지탱해 주는 힘입니다. 믿음이 우리를 붙잡아 주는 에너지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을 때 생동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으면 김빠진 사이다 같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행동으로 그 믿음을 보여 줍니다. 믿음은 인간의 이성과 지식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 대해서 로마서 4장 19-2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 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의 나이 100세가 되어 힘이 없었습니다. 사라도 90세로 의학적으로 임신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분명히 이걸 알았습니다. ‘자기들의 몸은 의학적으로 죽은 것이다. 우리 힘으로는 아이를 가질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식을 주신다고 하셨다. 하나님을 믿자.’ 아브라함은 자기 몸이 쭈글쭈글하고 나약한 것을 본 것이 아닙니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약속한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믿음이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 믿음을 의롭다고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기뻐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예화) 컬럼버스 데이
미국 국경일 가운데 컬럼버스데이(Columbus Day)가 있습니다. 10월 12일에서 가장 가까운 월요일로 되어 있습니다. 컬럼버스가 1492년 10월12일 신천지 중 하나인 바하마 열도에 도착한 날입니다. 왜 그날을 국경일로 했을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의심과 두려움의 나날을 보내던 선원들은 매일 되돌아 갈 것을 선장 컬럼버스에게 요구합니다. 때로는 선장을 위협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컬럼버스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동쪽으로 전진하도록 명령했습니다.선원들은 10월11일 저녁에도 폭동에 가까운 데모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튿날 10월12일 새벽이 밝았을 때 안개 속에 육지가 드러났습니다. 컬럼버스는 그 때를 회상하면서 말합니다.
“내가 신천지를 발견한 것은 나의 수학의 힘이나 항해술 때문이 아니라 믿음 때문이었다.”
우리에게도 믿음이 필요하고 믿음에 의한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매사를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14:23) 사업을 해도 믿음으로 하고 공부를 해도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목회를 해도 하나님을 향한 견고한 믿음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하지 아니한 모든 것을 하나님은 죄라고 여기신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반드시 축복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신다. 우리 집은 잘 되는 집안이다. 우리 자녀들은 세계를 주름잡을 믿음의 일꾼이다.”라고 믿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할 것입니다. “그건 니 생각이고 그건 불가능하다.” 우리도 종종 이런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세계적인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성신교회가 언제 지상에 세워지나” 그런데 누에고치를 보세요. 누에는 길이가 8cm도 안 됩니다. 그러나 그 누에고치의 실을 풀면 1km가 넘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왜소하고 보잘 것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온 세계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자의 기운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힘이 없어도 하나님은 힘이 무한하십니다. 우리는 왜소해도 하나님은 위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베드로 전서 2장 9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이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나라다. 위대하신 하나님이 우리안에 내주하고 계십니다. 전능자의 능력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기도하고 믿음으로 행동에 옮겨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에 하나님이 역사하면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면 우리는 모든 일이든 성공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들의 본이 되었습니다.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났습니다. 믿음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후서 1장 3절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찌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 믿음이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며” 믿음이 점점 자랐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정체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자라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이런 간증을 합니다. 교회 부지를 준비하고 단돈 천만원이 남았습니다. 낙심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교회는 돈으로 짓는 것이 아니다. 기도로 짓는다.’ 교회를 설계합니다. 하나님이 감동을 주셨습니다. 문을 길가로 내지 말고 공장 앞으로 내라는 감동입니다. 공장은 남의 땅입니다. 그리고 공장의 담과 교회 정문과는 1m도 안됩니다. 생각을 해도 말이 되지 않습니다. 1m 앞이 남의 공장인데 어떻게 거기에다 문을 냅니까? 그러나 목사님은 성령님의 음성에 따라 문을 남의 공장 쩍으로 냈습니다. 그리고 그 공장을 사게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설계했더니 그 문이 교회의 정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바라보고 믿음으로 행동하니 믿음대로 되는 것입니다. 파스칼이 말했습니다. “믿음은 한 판의 도박이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믿음에는 행동이 따릅니다. 이것이 믿음의 역사입니다.
둘째는 사랑의 수고가 있었습니다.
역사와 비슷한 말이 수고입니다. 역사는 결과적인 면을 강조하고 수고는 동기에 강조를 두고 있습니다. 즉 “사랑의 수고”란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사랑하기 위해서 애쓰는 것입니다. 수고하는 것은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하면 수고가 힘들지 않습니다. 야곱은 라헬을 연애하였습니다. 아내를 사랑하니 7년을 수 일처럼 여겼다고 했습니다. 머슴살이는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만 사랑으로 하니 힘들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이를 키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젖을 먹어야 하고 기저귀를 빨아 주어야 합니다. 분유를 타 먹어야 하고 옷을 구입해 주어야 합니다. 아이들 학원에 보내야 하고 뒷바라지 하는 것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서 요즘 DINK족이 유행이지 않습니까? Double Income No Kids. 수입은 두배로 아이는 갖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희생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부부를 놓으신 이유가 있습니다.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안쓰러워서 였습니다. 부부는 서로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누구 하나가 외롭다고 느끼는 것은 창조 질서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서로를 사랑한다면 외롭다는 마음을 느끼게 해서는 안됩니다. 결혼 예비 학교에서 이런 것을 합니다. 매일 한 번씩 고백하게 합니다. “나는 외로와도 괜찮으니 당신은 외로우면 안 돼.” 아내가 남편을 보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남편이 아내를 보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그러면 부부는 서로에게 꼭 필요한 동반자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힘들어도 아내가 외로움을 타지 않는다면 사랑의 수고를 할 수 있습니다.
여수에 가면 애양원이 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생각나지요. 그런데 애양원의 시작은 최흥종목사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광주에서 최초로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고 광주지역 최초이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가 죽었을 때 전국에서 문둥병환자, 결핵환자, 수백명의 걸인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울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가시면 누가 우리를 보호해 줍니까?” 그가 죽을 때는 성인으로 인정받았지만 그는 동네에서 유명한 깡패였습니다. 그런데 최흥종이 포사이드 선교사를 나주에서 광주로 인도하다 변화를 받았습니다. 도중에 구걸하는 여인을 만났습니다. 그냥 걸인이 아니라 나병으로 걷지도 못하는 여자였습니다. 가마니로 덮여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완전히 초라한 여인입니다. 몸에서는 악취가 풍겼고 머리는 완전히 떡진 머리입니다. 조선 사람도 꺼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포사이드 선교사는 말에서 내려 그녀를 자기 말에 태웠습니다. 나병 환자를 자기 몸으로 안은 것을 보았습니다. 환자를 옮기다 지팡이를 떨어뜨립니다. 선교사님은 최흥종에게 지팡이를 집어 줄 것을 부탁합니다. 그러나 최흥종은 집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고민을 했습니다. “왜 선교사님은 하는데 나는 하지 못하는가? 나는 내 동족인데도 피해 도망치는데 어떻게 그는 자기 자식을 대하듯 안을 수 있는가? 그와 나 사이의 다른 점은 무엇인가?” 최흥종이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믿음의 차이다. 예수 믿는다는 것이 그렇게 사는 것이다.” 그 이후 최흥종이 나병환자들을 모아 전문 요양원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오늘의 애양원이 된 것입니다.
사랑에는 수고가 따르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은 음성 나환자의 집에 갔습니다. 숟가락이 하나입니다. 그래서 환자가 먹는 숟가락으로 밥을 먹었습니다. 환자가 놀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 사람은 내가 먹던 숟가락으로 먹을 수 있는가?’ 사랑은 수고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런 사랑의 수고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이 점점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이 수고만이 우리의 신앙과 사랑이 진실함을 보여 줍니다. 여러분은 어떤 수고를 하고 계십니까? 주님을 향한 여러분의 사랑을 보여 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많은 영혼들에게 그 사랑을 보여 주십시오. “한 영혼을 위한 천 번의 기도와 백번의 만남” 얼마나 아름다운 수고입니까? 우리 교회 또한 사랑의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한 사람을 세우기까지 누군가의 눈물과 기도가 필요합니다. 물질적인 지원이 필요합니다. 우리 교회가 이 일을 하려는 것입니다. 사랑이 필요한 자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자 합니다.
셋째는 소망의 인내가 뛰어났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는 소망의 인내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소망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입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하면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가 있어도 소망의 인내가 없으면 결국은 실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날까지 주님을 기다리며 사모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만난다는 소망이 있을 때 우리는 어떤 어려움도 참을 수 있습니다. 다시 오실 주님이 공의로 심판하시는 것을 소망하고 기다리는 것 때문에 참을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 생활을 하기 지극히 힘든 곳입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깡패들을 동원하여 막었던 지역입니다. 사도행전 17장 5절에 보세요.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괴악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하여......” 시장에서 할 일 없이 빈둥빈둥하며 노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상인들을 상대로 폭력을 행사하는 사악한 무리들입니다. 유대인들이 조직폭력배를 동원하여 복음전도를 막았습니다. 예수님을 믿다가는 조폭들의 테러 대상이 되는 교회였습니다. 복음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바울 일행을 가리켜 “천하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로마의 황제 외에 다른 임금 예수를 전한다고 하면서 체제의 전복을 꾀하는 나쁜 무리라고 악담을 하였습니다. 반역의 무리라고 외쳤습니다. 그들은 바울 일행에 베뢰아에 가자 거기까지 가서 방해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베뢰아는 80km 정도됩니다. 복음전파를 막기 위해 원정대를 조성하는 지역의 사람들입니다. 굉장히 거칠고 험악한 사람들이 있던 땅이 데살로니가입니다. 복음 전파에 척박한 땅입니다. 예수님을 믿다가는 깡패들에게 얻어 맞고 핍박을 당하는 지역입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은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많은 환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다시 오심을 소망하니 참지 못할 상황이나 참지 못할 인간관계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소망을 품으면서 인내할 수 있었습니다.
시편 146편 5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참고 인내함이 있었습니다. 야고보서 1장 4절에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함이라”
아무리 믿음으로 일을 하고, 사랑으로 수고해도 인내하지 못하면 아기입니다. 아기는 참지 못합니다. 소변 보는 것도 참지 못합니다. 아기들은 ‘쉬’하고 싶다는 말이 나오면 화장실에 갈 틈도 없이 소변을 바로 누지 않습니까? 그래서 플라스틱 물통을 가지고 있다가 ‘쉬’하면 바로 갖다 대고, 바로 갖다 대곤 합니다. 아기는 화장실에 갈 때까지 소변을 참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른은 다릅니다. 아무리 소변이 급해도 의자에서나 택시에서 소변을 보지 않습니다. 아기는 인내하지 못하지만 어른은 인내합니다. 조금 열을 받으면 화를 벌컥 내는 사람은 아직도 정신연령이 어린 것입니다. 러시아 격언에 “병사여, 인내하라. 곧 장군이 될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앙의 거장이 되려면 인내해야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13장 11절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데살로니가 교회가 이처럼 모델 교회가 될 수 있는 비결이 6절에 있습니다. 첫째는 성령의 기쁨으로 주를 받았다. 그리고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복음을 들을 때 기쁨으로 받은 것입니다.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복음 전파에서 씨앗이 문제가 아닙니다. 밭이 문제입니다. 길가와 같은 밭, 가시 밭, 돌짝 밭, 옥토가 있습니다. 내 심령 상태가 어떠한가가 중요합니다.
이걸 깨달은 사람은 천로역정을 지은 존 번연입니다. 그는 교회에 출석하면서도 무신론자였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예배 드리고 교회에 출석하지만 하나님과 전혀 상관이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나는 교회에 오랫동안 출석했는데 나는 수없이 설교를 들었는데 왜 내 맘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없을까? 아직도 하나님을 알지 못할까?’ 그러다가 마13장에서 말씀의 씨를 빼앗아가는 것이 사단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만일 사단이 내 마음 속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빼앗아 가는 것이라면 나는 사단에게 속았던 것이다. 영적인 맹인으로 머물러 있던 것이 사단에게 빼앗겼기 때문이다. 그 날 이후로 말씀을 듣는 존 번연의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천로역정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듣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었습니다. 성령의 기쁨으로 받았습니다.
또한 그들은 바울사도와 예수님을 본받기 위해 노력을 하였습니다. 교인들의 모델이 예수님이었고 바울사도였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믿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과 예수님을 본받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런 책이 있습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늘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닮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아름다운 믿음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데살로니가는 3주 동안의 설교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신학자들은 바울이 3개월이나 8개월 정도 그곳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1년도 안된 교회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은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전파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우리 교회 성도들의 믿음을 부러워하고 있습니까? 주변 사람들이 부러워할 보배로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우리 안에 있습니까? 우리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아름다운 모델 교회를 뛰어넘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새로운 성신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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