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신 강단

베뢰아 사람들

박도식 2021. 3. 22. 16:48

베뢰아 사람들

 

1710-15

10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저희가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11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12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13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이 하나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케 하거늘

14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어 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유하더라

15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바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을 받고 떠나니라

 

포인트 워드: 신앙

활용: 신앙인은 믿음의 행적을 남기게 된다. 나는 어떤 모습의 삶을 살 것인가? 그리고 우리 공동체는 어떤 모습을 가져야 하는가 생각해 보자.

 

사람을 죽어서 무엇을 남기는가? 어떤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고 한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 신앙인은 무엇을 남기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믿음의 행적을 남긴다. 하나님을 어떻게 믿고 살았는지 그 삶이 남겨진다.

 

서울 영락교회에는 김응락 장로님의 순교비가 있다. 비석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무거운 발길을 옮겨 골고다로 향하신 피어린 주님 발자국 따라 생을 다하고 의의 길 택하시오며 모진 붉은 돌에 쓰러지시 올 때 스데반의 미소 또한 그 광채 만면에 사무치고 마지막 한 방울 피 흘리시도록 영락의 제단 부둥켜 안으사 숨을 거두셨으니 베다니 뜰에 첫 번 맺은 순교의 원공은 장하시다.”

 

김응락 장로님은 19세 청년으로 집사가 되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었지만 그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돈을 쓰는 것을 기쁨으로 삼았다.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월남하였고 1945년에 월남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개척예배를 드렸다. 성도들의 땀과 피와 눈물이 담겨진 영락교회는 195065일에 350평의 석조건물을 봉헌했다. 김응락 장로님은 자신의 전 재산을 쏟아 부어가면서 교회를 건축했다. 65일 하나님께 감사 예배 드렸는데 20일 후에 6.25가 터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피난을 갔다. 한경직 목사님도 피난 가시게 했고 장로님이 남아서 교회를 지키기로 했다. 장로님은 피난가면 살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성전을 버리고 어디 가고 싶지 않았다. 1950921일 기도하기 위해 교회로 들어가려다 인민군에게 잡히게 되었다. 장로님은 모진 고문과 학대를 받았다. 몸에서 피가 났다. 자기의 마지막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장로님은 말했다. “이 죄인의 피로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순교비가 있던 자리에서 순교의 피를 흘렸다. 그가 마지막 부른 찬송은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되시며... 늘 아쉰 마음 뿐일세.”이다. 45세의 젊은 나이에 순교의 제물이 된 것이다.

우리는 어떤 믿음의 행적을 남길 것인가?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믿음의 좋은 소문을 내는 교회이었다. 환난과 시련이 있는 시기에도 불구하고 성령님의 능력과 큰 확신으로 믿음을 지킨 신앙인이었다. 대단한 신앙인들이었다. 예수님을 믿기가 어려운 환경 속에서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 신앙인 더욱 빛난 것이다. “밤이 깊어 갈수록 새벽이 가까이 온다.”는 말이 있다. 고통스럽고 어려운 환경을 견디면 새롭고 희망찬 내일이 온다는 말이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은 하나님께 칭찬을 받았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그런데 오늘은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더 믿음이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베뢰아는 데살로니가에서 남서쪽 약 80km에 위치한 도시이다. 그곳에는 회당이 있었다(10). 빌립보에는 회당이 없어 바울은 기도처를 찾았다. 빌립보 보다 훨씬 더 많은 유대인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베뢰아에 있는 유대인들의 태도는 데살로니가 유대인들보다 더 믿음이 좋았다는 것이다. 그들이 남긴 믿음의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첫째, 베뢰아의 유대인은 신사적이었습니다.

 

국어사전에 신사란 예절이나 품행이 바르고 교양이 있어 젊잖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헬라어 원문에서는 유게네스테로이(ευγενεστεροι)입니다. 이는 출신이 좋은, 가문이 좋은 고귀한이라는 뜻입니다. 상류층 사람들이 보여주는 고상하고 우아한 태도를 가리킵니다. 개역개정판에서는 신사적이다는 말을 더 너그러워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새번역 성경은 보다 마음이 넓어로 기록되었고 공동번역에는 마음이 트인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영어 성경에도 'open-minded'(J.B)로 표현되었습니다. “신사적인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몇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우선 천성적으로 성품이나 심성이 좋다는 것입니다. 마음씨가 곱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심성이 고운 사람이 있고, 예수님을 믿어도 심성이 좋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 술을 먹어도 끄떡 하지 않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맥주 한 잔만 해도 얼굴이 벌건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의 체질입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사람의 품성이 좋은 사람들입니다. 또 다른 의미는 열린 마음, 넓은 마음을 뜻합니다.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자세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대화를 할 때 열린 마음의 사람과 대화를 하고 싶어합니다. 자기의 것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과는 대화하고 싶지 않습니다. 남의 것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사람과는 가까이 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부부간의 대화에서 필요한 것이 열린 마음입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부부 싸움이 어디에서 일어날까요? 자기의 이야기가 옳다는 것입니다. 부부는 심판자를 원하지 않습니다. 잘잘못을 따지면 갈등하게 됩니다. 공감해주는 사람을 원합니다. 행복한 부부는 갈등이 없는 부부가 아니라 갈등을 지혜롭게 해결하는 부부입니다. 부부싸움을 하되 생산이 되는 쪽으로 결론을 내야 합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신사적인사람들입니다. 성품이 좋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의견도 수용할 줄 아는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미국의 모 교회에 K장로님이 계십니다. 이분은 과거에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시고 신앙과 지식이 겸비된 분입니다. 중고등학교 교장으로 근무하신 분입니다. 장로님은 두 아들 중에서 머리가 영리한 아들을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그에게 힘겨운 투자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 아들은 명문 대학을 나오고 박사학위를 받고 엘리트의 한국 여성과 결혼했습니다. 아들 내외가 박사이며 미국 대기업에 취직했습니다. 장로님은 은퇴하여 한국의 집을 정리하고 미국으로 갔습니다. 그가 준비한 돈을 다 써버렸습니다. 노부부가 먹을 것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교인들이 쌀을 사 주고 라면도 사 주었습니다. 자존심이 강한 장로님이 아들에게 전화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궁핍함이 심해지자 아들에게 전화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버지, 미국은 사회보장 제도가 잘 되어서 사람을 절대고 굶어 죽게 할 나라가 아닙니다. 내일 사회보장 사무실에 가셔서 등록하시면 그곳에서 극빈자 보조금이 나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돈 문제로 나에게 전화하지 마세요.” 장로님은 아들에게 지식 교육은 시켰지만 품성 교육은 시키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기본 교육을 시키지 않은 것입니다.

 

베뢰아 사람은 신사적입니다. 이 말은 그들의 인품이 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루 아침에 덕이 있고 넓은 마음이 있는 사람이 됩니까? 사람의 천성도 중요하지만 후천적인 교육이 중요합니다. 위로 하나님을 섬기고 아래로 부모님을 공경할 줄 알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고 남을 배려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집안에 어른이 온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합니까? 자녀들은 어디에 있지요? 부모님이 집에 돌아오면 자녀들이 문 앞에 나와서 맞이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출근할 때 자녀들이 자기 방에 있거나 하면 안 됩니다. 문 앞까지 나와서 인사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런 교육이 사라졌습니다.

 

한국 교회의 위기는 신앙인들의 됨됨이가 영 형편없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남들의 본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많이 하는데 품행은 단정하지 않습니다. 남의 의견을 들어 줄 줄 알아야 하는데 자기 말만 하려고 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보고 긍휼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을 섬기는 것을 싫어합니다. 감사한 일이 있으면 감사해야 하는데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신앙인의 품성은 사람의 됨됨이입니다. 우리 성신 교회는 신사적인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된 사람이 되자는 것입니다. 얼마나 멋집니까? 하나님께 인정받고 사회에서 인정받는 사람.

 

둘째, 베뢰아 사람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세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비록 목회자가 경건한 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받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면 역사는 일어납니다. 그러나 현대인은 목회자의 설교와 더불어 인격을 생각합니다. 목회자가 은혜스런 설교를 했으나 그 삶이 뒷받침 되지 못하면 설교 말씀을 받지 않으려 합니다. 위선적이라는 말을 하면서 거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말씀을 받는 자세에 대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가로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으니라”(삼상1:17-18) 엘리 제사장이 한나의 기도에 대하여 하나님의 은총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한나는 그것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 처럼 엘리는 경건한 제사장이 아니었습니다. 영적으로 무디었고 주님의 이름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그런 사람입니다. 자녀 교육도 실패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본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를 대하는 한나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종으로 대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우신 주의 종들을 통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아멘으로 받으면 됩니다.

 

말씀을 들을 때 중요한 태도는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간절한 마음은 집중해서 받았다는 말입니다. 모든 마음과 모든 열심을 다해 말씀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한 말씀 한 말씀을 놓치지 않기 위해 정성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말씀을 받는 태도는 이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2:13)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전하는 자가 어떠한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받는 자가 어떤 심령으로 받느냐가 중요합니다. 데살로니가가 교인들이나 베뢰아 사람들이 말씀을 듣는 태도는 정말 탁월했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의 귀감이 됩니다.

 

오늘날 내 영혼이 살고 죽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달려 있습니다. 말씀이 들려오지 않으면 내 영혼은 점점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성령님이 역사함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거역하는 것은 자기 신앙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모든 설교가 모든 사람을 감동시킬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설교에도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설교를 통해 은혜를 받은 사람은 영적으로 살았지만 그 말씀에 찔림을 받고 더욱더 패역한 자들은 영혼이 멸망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역사하는 설교에 내가 은혜를 받지 못하고 있다면 몇 가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나와 주님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나와 목회자와의 관계는 어떠한가?” “내 심령이 옥토인가? 아니면 가시밭이나 돌짝 밭이 되어져 있지 않는가?” 내 밭의 심령 상태에 따라 말씀의 씨앗이 뿌리 내리는 정도가 다릅니다.

 

1990-1991년으로 생각합니다. 그때 한국 복음화 협의회가 처음으로 결성되었습니다. 한양대학교에서 청년 집회를 했는데 전기 공급이 중간에 끊겼습니다. 그래서 주최측에는 원형극장 앞으로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김동호 목사님이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설교를 듣기 위해 한 사람씩 앞으로 모였습니다. 정확한 내용은 모르지만 그 때 은혜스러운 설교였습니다. 마이크를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흡입력있는 설교였습니다. 청중들이 은혜를 받으려고 하니 말씀이 은혜스럽습니다.

 

지금 CTSCBS 방송을 보면 여러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은 진짜 설교의 내용이 별로 없습니다. 일단 목소리부터 거북스럽습니다. 그리고 설교의 내용도 별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교인들은 아멘으로 받으면서 은혜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 자신이 고민을 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날 설교자들이 은혜스런 설교를 많이 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변화를 받지 못한다. 무엇이 문제인가? 설교자의 문제인가? 아니면 청중의 문제인가? 생각해 보니 설교 말씀을 듣는 내 자신의 문제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내 자세가 온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내가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면 은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목회자로서 설교를 평가하는 내 자신을 보게 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별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설교를 듣는 우리 자세가 무척이나 중요합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데살로니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그러면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있습니까? 말씀을 듣는 사무엘의 태도입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3:1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1:20)

 

셋째, 베뢰아 사람들은 성경을 날마다 상고했습니다.

 

바울의 설교를 듣고서 성경을 상고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단어는 날마다입니다. 매일 같이 반복해서 말씀을 읽고 묵상했다는 것입니다. “상고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새 번역에는 자세히 공부했다고 합니다. 공동번역은 연구했다고 합니다. 헬라어 상고하다아나크리노입니다. 이 뜻은 자세하게 골라내다, 체를 쳐서 가려내다, 탐색하다, 조사하다입니다. 베뢰아의 유대인은 말씀을 들을 때 간절함으로 받고 성경을 연구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말씀을 다시 생각하고 연구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의 자세는 여기에 있습니다. 한 번의 설교로 사람이 변하지 않습니다. 물론 특히 은혜스러운 설교가 우리의 심령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매주 주옥같은 설교를 듣지만 상고하지 않으면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합니다. 말씀이 내 안에서 역사하지 않으면 내 삶의 변화는 멀어지게 됩니다. 솔직히 우리가 얼마나 많은 설교를 들었습니까? 때때로 많은 설교가 우리의 심령을 요동치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전율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무엇인가 부족함을 느끼지 않습니까? 묵상함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깊게 연구함이 부족합니다.

 

어떤 분은 우리의 신앙이 콩나물이 자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콩나물에 물을 주면 언제 자랐는지 보이지 않지만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들으면 들을 수록 믿음이 생긴다고 합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우들은 사역자들입니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제자로 삼아야 합니다. 내가 말씀을 연구하지 않으면 내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설교를 들으면 집에 가서 한 번 묵상해 보세요. 그리고 그 느낌을 노트에 기록해 보세요. 하나님이 내 마음속에 주신 감동을 적는다면 그것이 또 하나의 설교가 되어 다른 사람을 지도할 수 있습니다.

골프 선수들이 시합을 하고 나서 어떻게 합니까? 골프 연습을 합니다. 개그맨이 무대에서 남을 웃긴 후 어떻게 합니까? 끊임없이 연습을 합니다. 우리는 야구 선수들이나 축구 선수들의 시합을 봅니다. 그들이 그 한 번의 시합을 위해 야구 방망이를 수도 없이 흔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게 주어진 한 번의 기회에서 홈런을 치기 위해 무수히 연습을 합니다. 투수가 던진 공이 3초나 4초면 타자에게 옵니다. 정말 짧은 순간이지 않습니까? 그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한 그들의 노력이 그들을 프로 선수로 만듭니다.

 

옛말에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編意自現)이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어렵고 난해한 책이라도 백번을 읽으면 그 뜻이 확연해 진다는 말입니다. 어려운 책도 한 번 두 번 읽으면 그 뜻을 압니다. 설교와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번 읽을 때와 두 번 읽을 때가 다릅니다. 10번 읽을 때와 100번 읽을 때가 다릅니다. 특히 우리 교회 성도들은 평신도 사역자들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저 교회에 와서 은혜만 받고 돌아갈 사람들이 아닙니다. 지금 훈련받고 준비되면 다른 사람을 지도할 사람입니다. 내가 받은 은혜, 내가 받은 축복을 남들에게 전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 때를 위해 지금 준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삶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말씀에 대한 묵상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조지 뮐러 하면 평생 5만번의 기도의 응답을 받은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그는 고아의 아버지이며 많은 사람을 구원한 사람으로 압니다. 그는 자기의 삶을 이렇게 말합니다. “내 삶의 비결은 성경 말씀과 기도였습니다. 하루에 2시간에서 4시간씩 기도하였습니다. 나는 평생 성경을 200번 읽었습니다. 단 한 번도 싫증을 느낀 적이 없지요. 내가 성경을 읽지 않은 3년은 잃어버린 시간이었습니다. 하루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않으면 영적인 활력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내 사역의 힘은 성경입니다.”

 

베뢰아 사람들이 대단하지 않습니까? 이들이 신사적이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성경을 날마다 상고한 결과가 어떤 것입니까? 12절을 보세요.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이 말이 무엇입니까? 다른 지역에 비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유대인의 수가 많았습니다. ! 대단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넓은 마음을 가지고 좋은 품성을 지니면 저절로 전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닮아가면 다른 사람이 감동을 받고 주님께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말씀을 듣는 자세가 달랐고 적용하는 것도 달랐습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하니 전도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성신교회 교우들의 성품을 생각해 봅니다. 얼굴은 예수님을 닮아 인자함이 가득하고 웃음꽃이 있습니다. 마음에는 영혼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불타고 있습니다. 웃어른을 보면 공손히 인사할 줄 알고 존대할 줄 압니다. 어린 사람들을 사랑으로 감싸 줄줄 알고 힘들어 하는 이들을 향해 손을 내밀 줄 압니다. 넓은 마음으로 많은 이들의 친구가 되어 집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닮아 정직하고 진실하게 살아갑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고 얼마나 많은 영혼이 주님께 돌아오겠습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성신교회 사람들그들은 어떤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으십니까? 우리 함께 칭찬받는 신앙인이 되십시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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