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
마태복음 5:1-7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포인트 워드: 복
목적: 하나님 앞에 우리는 복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인가?
성경을 가슴에 안고 고백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영혼의 양식이며, 영적전쟁에 무기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신 산상수훈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산상수훈은 복음의 핵심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꼭 들어야 합니다. 산상수훈은 우리 신앙을 바르게 잡아 주는 역할을 합니다. 살다보면, 우리도 잠시 빗나갈 수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산상수훈을 통해 우리 신앙을 바르게 교정해야 합니다. 정형외과 아시죠? 뼈를 잡아 주는 곳입니다. 산상수훈은 정말 중요합니다.
말세의 특징 중의 하나가 무관심, 무감동, 무감격입니다. 또한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서 충동적으로 행동을 합니다. 또 하나는 긍휼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강퍅해지고 삶이 점점 완악해지고 있습니다. 돈을 위해서는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굶겨 죽이지 않나, 연인에게 폭행을 행사하지 않나? 돈 때문에 가족간에 다투지 않나? 점점 사랑이 식어지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떡을 해도 동네 사람들이 서로 나눠 먹었습니다. 냉장고가 없을 시대에는 서로 나눠 먹었는데 냉장고가 생기고 나서는 서로 나눠 먹는 것이 사라졌습니다. 긍휼을 찾아 보기 어려운 시대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아야 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5:7)
긍휼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레헴’이라고 합니다. 어머니의 자궁을 의미하는 ‘라함’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어머니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 그것이 긍휼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불쌍히 여기고 상대방의 어려움을 돕기 위해 구체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긍휼입니다. 긍휼이 여김을 받는다는 말은 “상대방을 긍휼히 여기면, 현재에는 긍휼이 여김을 받지 못해도 멀지 않은 미래에 긍휼히 여김을 꼭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으면 결국 사람들로부터도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어야 할까요?
첫째, 마음부터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우리가 대화 할 때에 명심해야 할 것이, 상대방의 입장에서 상대방이 듣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면 안 됩니다. 상대방 입장이 되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마음에서부터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마음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남녀 사이를 보아도 마음이 다릅니다. 여자는 남자가 옷을 멋있게 입고 나오면, 바람둥이라고 생각합니다. 옷을 아무렇게나 입고 나오면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자가 자기를 칭찬하면, 사람을 제대로 볼 줄 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를 칭찬해 주지 않으면 예의 없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차를 탈 때, 남자가 문을 열어 주면, 작업한다고 생각하고, 도와 주지 않으면, 매너가 빵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녀 사이에 마음에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진심은 언제나 통하는 법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을여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예수님은 섬기로 오신 분입니다. 대접을 받기 위해, 영광을 얻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한 영혼 한 영혼을 섬기기 원합니다. 예수님은 속 마음에 긍휼의 마음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창기들의 친구였습니다. 그 당시 세리는 매국노의 역할을 했고, 창기들은 품행이 바르지 못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죄인의 대명사였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의 별명이 “세리와 창기들의 친구”였다면, 예수님 주변에 이런 자들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두명을 친구로 두었다고 그렇게 까지는 표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마음 속 깊은데서부터 긍휼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실망을 해도 서운해 하지 않습니다. 배신을 당해도 욕을 하지 않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와도 입술로 죄를 짓지 않습니다.
“내 마음에 사랑이 싹이 트고 있어요 예수님 만날 날부터 내 마음에 사랑이 오직 예수”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의 달스트롬 교수가 의대생들을 대상으로 분노와 죽음의 관계를 연구했습니다. 감정의 응어리를 풀지 못하고 적대감이 높은 그룹과 낮은 그룹을 정하고 25년이 지나 그들이 50대가 되었을 때, 사망률을 조사했습니다. 적대감이 높은 그룹이 낮은 그룹보다 사망률이 사망률이 7배나 높았고 심장질환 환자도 5배가 많았습니다. 또 법대생을 조사해 보니, 25년이 지난 후 적대감이 낮은 그룹은 사망률이 4%에 불과했는데, 적대감이 높은 그룹은 이미 20%가 사망했습니다.
우리가 마음 속에 미움과 원망을 가지면 자기 몸이 먼저 망가집니다. 제 명에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원수라도 불쌍히 여기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편하게 해 주시고, 우리 육신도 건강하게 해 주십니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 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3:8-9)
요셉을 보세요. 그는 17세에 형들에 의해 미디안 사람들에게 종으로 팔립니다. 그러나 그는 110에 죽었습니다. 창세기 50장 26절입니다. “요셉이 일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창50:26)
요셉은 그 마음으로 형들을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애굽 종살이부터 93년 동안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던 비결은 용서였습니다.
둘째, 말도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우리는 말로 상처를 주고 받습니다. 그런데 잠언 15장 1절은 말씀합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시키느라”(잠15:1) 말 한 마디에 정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사랑의 마음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퉁명스러운 말투는 결코 사람을 얻지 못합니다.
우리가 여행을 하면 사진을 찍습니다. 그런데 멋진 작품이 나올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와, 참으로 멋진 작품입니다. 솜씨가 보통이 아니네요. 대단합니다. 다음에는 우리 사진도 부탁해야겠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진들이 멋지네요. 카메라가 좋은가 봐요.”
사람의 말은 ‘아’ 다르고 ‘어’ 다릅니다. 같은 말이라고 기분좋게 말해야지, 감정을 상하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어느 집에 가서 음식 대접을 받았다고 해 보세요. 어떻게 말해야 합니까? “음식 솜씨가 보통이 아닙니다. 음식점을 내도 되겠어요. 평생에 이런 맛은 처음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녁 식사를 잘 했어요. 아마도 좋은 요리기구를 쓰시나 봐요.”
우리 신앙인들은 영혼을 살리는 말을 해야 합니다. 용기와 격려를 주는 말, 사람을 일으켜 주는 말을 해야 합니다. 절대 죽이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비난 비방 조롱, 참소, 이간질. 이런 말들은 사람을 죽이는 말입니다. 그러나 “인정, 격려, 용기를 주는 말, 칭찬” 이런 말들은 살리는 말입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4:29)
더러운 말이 무엇인가요? 사탄이 좋아하는 말입니다.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하는 것, 하나님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원망 불평, 비방 험담, 마찬가지입니다. 남을 험담하고 음해하는 말은 좋은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칭찬하고 격려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때 있었던 일입니다. 이탈리아와 경기를 하고 설기현 선수가 골을 넣지 못하고 지쳐 있을 때, 히딩크 감독이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넌 세계 최고 축구 선수가 될 수 있으니까 힘내!” 그 말을 들은 설기현 선수가 다시 기운을 내서 동점골을 터뜨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히딩크가 패널티킥을 실축해서 실망에 빠진 안정환에게 이렇게 격려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난 다시 너를 믿을 거야. 너는 꼭 골을 넣어서 모든 국민들에게 희망을 줄 거야.!” 결국 안정환 선수는 연장전에서 시원하게 헤딩슛으로 역전골을 터뜨렸습니다. 후에 안정환 선수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히딩크 감독님이 날 믿고 격려해 주는 순간, 하나님께서 내 머리에 골을 얹어 놓듯이 골이 날아와 헤딩슛을 성공시킬 수 있었어요.”
감독의 칭찬과 격려가 선수들에게 큰 힘이 되었답니다.
‘참 좋은 한 마디’라는 글이 있습니다.
천하보다 소중한 한 글자: 나
그 어떤 것도 이길 수 있는 두 글자:우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세 글자: 사랑해
평화를 가져오는 네 글자: 내 탓이오
돈 안 드는 최고의 동력 다섯 글자: 정말 잘했어.
더불어 사는 세상 만드는 여섯 글자: 우리 함께 해요.
뜻을 이룬 사람들의 일곱 글자: 처음 그 마음으로
인간을 돋보이게 하는 여덟 글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일어서게 하는 아홉 글자: 지금도 늦지 않았단다.
나를 지켜 주는 든든한 열 글자: 내가 항상 네 곁에 있을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마음에 있는 것을 말로 표현합니다. 마음 속에는 영혼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입으로는 사랑의 말이 표현되어야 합니다. 생명의 언어가 나와야 합니다. 우리는 언어 훈련을 해야 합니다.
한 번 해 볼까요?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잘 했어요. 힘내세요. 최고입니다. 내 잘못입니다. 미안합니다. 항상 응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셋째, 물질로도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물질이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
누가복음 16장에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가 나옵니다. 학자들은 실제 이야기라고 말합니다. 부자는 자색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잔치를 했습니다(눅16:19). 평생 먹고 쓸 수 있는 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자 나사로는 가난했습니다.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 먹으려고 생각했습니다. 부자집 대문에 누워 있었습니다. 기구한 운명의 주인공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죽었을 때, 부자는 지옥에 갔습니다. 나사로는 천국에 들어갔습니다. 부자가 지옥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니이다”(눅16:24)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긍휼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이 땅에 살면서 거지 나사로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았던 부자에게는 긍휼의 은혜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물질을 나누는 일을 손해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주변의 주위의 어려운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물질을 나누어 주면, 그것이 우리에게 축복이 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잠11:24-25)
신명기 15장 4-6절은 말씀합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정녕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신 대로 네게 복을 주시리니 네가 여러 나라에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하겠고 네가 여러 나라를 치리할지라도 너는 치리함을 받지 아니하리라”(신15:4-6)
유대인에게는 ‘쩨다카’라는 좋은 문화가 있습니다. 자선의 문화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선을 베풀면 하나님께서 갚을 것을 생각합니다. 안식일 전에 팔다 남은 물건은 가난한 자들이 가져 갈 수 있도록 포장해 놓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잠19:17)
탈무드에 있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을 돕기 전에 네 가족이나 친지가 밥을 굻고 있지는 않은지 먼저 돌아보라. 네 가족과 친지를 도운 다음에는 네 이웃이 굻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라. 또한 힘이 닿으면 네가 사는 동네와 도시의 이웃을 돌아보라.”
믿음의 역사를 보면, 구제를 많이 하는 분들이 큰 복을 받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석유왕 록펠러부터 시작해서 빌 게이츠, 세계적인 투자자 워렌 버핏 등. 2015년 페이스 북의 설립자인 마크 저크버그는 딸 맥스의 생일을 맞이하여 자신의 보유한 회사 지분의 99%, 450억 달러, 한화로 약 52조 1100억원을 평생에 걸쳐 기부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유교문화는 내 가정, 내 가문, 내 사업, 내 자녀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서구문화는 가난하고 약한 자들에게 섬기고 나누며 베푸는 삶을 실천합니다. 기독교 문화는 베푸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에서 기억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를 위해 돈을 쓰고, 내 자녀를 위해 물질을 쓴 것은 하나님께서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냉수 한 그릇 남에게 대접한 것은 상이 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섬기고 나누는 삶을 실천해 보세요. 하나님은 반드시 말씀하셨습니다. “정녕 복을 받으리라.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꾸어줄 지언정 꾸이지 아니하리라.”
누가복음 6장 38절입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6:38)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섬기고 나누는 일이 가장 아름답고 귀한 일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우리는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남의 입장에서 긍휼히 여길 때, 긍휼히 여김을 받습니다. 우리 마음에서부터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우리 마음 속에 예수님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말로도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가 사람에게 용기와 희망을 줍니다. 마지막으로 물질로도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는 자를 긍휼히 여기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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