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무리를 잘 한 사람들
디모데후서 4:6-8
6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포인트 워드: 마무리
활용: 사람은 시작이 중요하다. 또한 끝도 중요하다. 어떻게 하면, 우리 인생의 성공자가 될까?
성경을 가슴에 안고 고백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영혼의 양식이며 영적 전쟁에 무기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오늘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말씀은 디모데후서4:6-8입니다. “마무리를 잘한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요한 3서 1장 2절에서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하노라”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해 지기를 바랍니다. 주 예수님의 은혜가 충만한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서양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마무리를 잘 한 사람이 인생을 성공한 사람이다.” 사람은 시작도 중요하지만, 마무리가 더욱 중요합니다. 목사로 부름을 입었다가 점쟁이로 인생을 마친 사람도 있었습니다. 장로의 일을 하다, 자살로 인생을 마감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데마는 바울과 함께 전도의 일을 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디모데후서 4:10절에 그에 대해 말씀합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딤후4:10), 가룟 유다는 자살로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성경에는 믿음의 길에서 파선한 자들도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9:27) 오늘 아침 마무리를 잘 한 몇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첫째로,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은 처음에는 예수님을 믿던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습니다. 그는 교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복음의 전파자가 되고 그는 겸손한 자가 되었습니다.
바울 서신 가운데 마지막이 디모데 전후서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서 자신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 사도 바울은 처음에는 자기를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고전15:8)라고 표현했고, 그 다음에는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엡3:8)라고 표현했고, 마지막에는 “죄인 중의 괴수”라고 표현했습니다.
바울은 나이가 들수록 자기를 낮추고 겸손한 자가 된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어떤가요? 자기가 이룬 성공을 바라보면서 자기를 대단한 사람으로 착각합니다. “내가 누군데?” 그러나 바울은 자기를 낮추고 있었습니다.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교만이 얼마나 무서운 죄입니까? 하나님 앞에 교만하다가 버림받은 자가 구약의 사울왕이었습니다. 베냐민 지파에서 하나님께서 왕으로 세웠더니, 결국은 자기를 자랑하고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기 까지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사무엘 선지자의 말에 순종하다가 나중에는 교만해졌습니다. 아말렉을 진멸시키라고 했는데,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을 남겨 놓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다.”(삼상15:22-23) 결국 사울은 버림을 받습니다.
신앙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 경륜이 오랠수록 자신을 낮추고 살아가는 사람이 축복입니다. 교만이 가장 큰 무서운 죄입니다. 겸손과 참회가 가장 아름다운 축복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말합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4:7) 바울은 믿음의 길에서 완주한 사람입니다. 선한 싸움을 싸운 축복의 사람입니다. 일평생 하나님만 의지하고 섬겼으니, 축복을 받은 자입니다.
천국을 바라보면 사는 삶이 축복입니다. 지난 주에 문자를 받았습니다. 정수리를 판매했던 백영실 회장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아마 71-2세가 될 것입니다. 백회장은 돈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조용기 목사님도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부르면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라하는데 거부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천국을 바라보는 삶이 최고의 삶인 것입니다.
두 번째가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어부출신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습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변화된 모습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아이를 살릴 때에도 함께 했었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12명의 제자들 중에 중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붙잡힐 때, 예수님을 모른다고 3번이나 부인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욕설을 하고, 저주하기도 했었습니다. 너무나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성령을 받고는 예수님과 십자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자가 되었습니다. 베드로 전서 5:1절입니다.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벧전5:1).
베드로는 고난의 증인이요, 장차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도 사도 바울과 비슷한 고백을 한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의 고난의 증인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놀라운 변화입니다. 베드로는 고난을 싫어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이야기 했을 때, 반대 의견을 낸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16장 21-22절입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에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16:21-22). 베드로가 “간했다”고 말합니다. 개역개정에서는 “항변했다.”고 말합니다. NIV 성경에서는 “꾸짖었다.”고 말합니다. rebuke. 베드로는 고난받기 위해 예수님을 따라온 사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나중에는 고난을 받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고난을 즐기고 고난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베드로전서 4:12-13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4:12-13)
베드로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죽는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가장 영광스런 죽임을 맞이한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마무리를 아주 잘 한 사람입니다.
그는 천국을 소망했습니다.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 (벧전5:1)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4:13).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벧전5:4). 사도 베드로는 마무리를 너무너무 잘 한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마지막에 겸손을 강조하고 강조합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4:5-6)
베드로는 본래 자신만만하고 교만하던 사람입니다. 물 위를 걸어 보기도 하고, 변화산에서 놀라운 것을 체험하고, 제자들 중에서도 으뜸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 앞에 겸손한 삶이 최고인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어느 원로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나를 울리랴?” “누가 나에게 감동을 주랴?” 40년간 설교를 해 왔기에 본문만 보면 내용을 다 압니다. 별 감동을 받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들의 착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본인이 인정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모세의 함정을 설교 했잖아요? “반석을 향해 명령하라.” 그러나 모세는 반석을 지팡이로 내려 칩니다. 결국 물은 나오기는 했지만, 그 일로 인해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어느 통합측 장로님은 암으로 죽으면서 말했습니다. “예수가 있기는 뭐가 있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죽었습니다. 교회에서 사무 장로로 월급을 받으면서 생활했는데, 그 안에는 예수님이 전혀 없었습니다. 단지 종교인일 뿐입니다. 결국 장로님이 죽자, 아들 4형제는 교회를 떠났습니다.
지하상가의 가게 점주는 장로님 딸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가정 예배를 드렸습니다. 교회 출석을 열심히 했습니다. 28세에 불교에 갔다고 합니다. 28년 동안 예배드리고, 교회 생활하던 것이 무효였습니다. 물론 아직 살아 있기에 끝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셋째, 안나는 마지막이 좋은 사람입니다.
누가복음 2장에서는 끝이 좋은 사람 시므온이 나옵니다. 또한 안나가 나옵니다. 시므온은 성령의 감동을 받고 성령의 지시를 받고, 성령이 그 위에 머물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보자마자 예언의 말씀이 나옵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눅2:30-32)
안나는 선지자였습니다. 출가한 후 7년 동안 남편과 살다가 과부된지 84년이 되었습니다. 10대에 결혼을 했다고 하면, 적어도 안나 선지자는 100세가 넘습니다. 그녀의 일상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과부된지 팔십사 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가도함으로 섬기더니”(눅2:37) 성전에게 살면서 금식하고 기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기도의 사람이며 신앙의 본이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시므온이 예수님에 대해 축복 예언을 할 때, 안나 선지자도 함께 있었습니다.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눅2:38)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신앙은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길 위에 서 있습니다. 천국에 이를 때까지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중간에 딴 길로 샌 사람들도 있습니다. 믿음의 길에서 파선된 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끝까지 완주하고 천국에서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가 가야할 최종 목적지입니다.
손양원 목사님과 정양순 사모님을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분이라 많은 분이 알고 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나병환자들을 사랑하고 섬긴 분입니다.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을 용서와 사랑으로 품는 놀라운 사랑의 사람입니다. 목사님은 전쟁이 일어나자 피난가지 않고 1950년 9월 13일 공산군에 체포되어 2주간 온갖 수모를 겪다가 9월 28일 개머리 판으로 입을 얻어 맞아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천국에 가셨습니다. 그의 나이 48세입니다.
이튿날 아침 남편의 순교 소식을 접한 정양순 사모님은 남편의 시신 앞에서 지난 밤에 갓 태어난 아기를 안고서 비통해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오! 당신 소원대로 됐군요. 평소 주기철 목사님을 그렇게 부러워했는데... 하나님 감사합니다. 평생 동안 주의 일을 하게 하시고 손양원 목사가 소원하던 순교를 허락해 주신 은혜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 내리고 있었습니다.
정양순 사모님은 가슴에는 한 없는 슬픔이 가득했습니다. 아들들이 죽었습니다. 남편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보다는 감사와 감격으로 가득했습니다. 정양순 사모님은 마지막까지 나환자들의 친구로 살다가 1977년 11월 26일 사랑하는 남편과 두 아들이 있는 천국에 가셨습니다. 그녀가 죽기 전에 가슴에 꼬깃꼬깃 간직했던 돈을 꺼내어 딸에게 전하며 말합니다. “이 돈을 밀양교회에 전해 주어라.” 밀양교회는 건축 중에 있던 나환자 교회였습니다. 그의 시신은 남편의 무덤과 합장되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과 정양순 사모님은 순교적인 믿음을 지킨 믿음의 사람들이었고, 생명을 다 바쳐 나환자들과 원수를 사랑한 사랑의 성자들이었으며, 천국을 바라보며 산 소망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축복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과 함께 2021년을 달려 왔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완주해야 합니다. 어느 뇌성마비 선교사가 하는 말이 있습니다. “아버지 집에 도달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바울도 고백합니다.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4:7)
시므온은 말합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눅2:29)
마지막 날 이런 음성을 주님으로부터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마25:21).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25:34-36).
마무리를 잘 하시고, 2022년 또 다시 믿음의 행진을 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신 강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브라함의 별세 신앙(창22장) (0) | 2022.01.19 |
---|---|
영원하신 하나님(엘 올람, 창21장) (0) | 2022.01.19 |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1장) (0) | 2022.01.19 |
시므온의 예언(눅2장) (0) | 2022.01.19 |
끝이 좋은 사람 시므온(눅2장) (0) | 2022.01.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