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신 강단

피투성이라도 살아라

박도식 2021. 6. 17. 18:43

피투성이라도 살아라

16: 1-14

1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2. 인자야 예루살렘으로 그 가증한 일을 알게 하여

3. 이르기를 주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네 근본과 난 땅은 가나안이요 네 아비는 아모리 사람이요 네 어미는 헷 사람이라

4. 너의 난 것을 말하건대 네가 날 때에 네 배꼽줄을 자르지 아니하였고 너를 물로 씻어 정결케 하지 아니하였고 네게 소금을 뿌리지 아니하였고 너를 강보로 싸지도 아니하였나니

5. 너를 돌아보아 이 중에 한 가지라도 네게 행하여 너를 긍휼히 여긴 자가 없었으므로 네가 나던 날에 네 몸이 꺼린바 되어 네가 들에 버리웠었느니라

6.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하고

7. 내가 너로 들의 풀같이 많게 하였더니 네가 크게 자라고 심히 아름다우며 유방이 뚜렷하고 네 머리털이 자랐으나 네가 오히려 벌거벗은 적신이더라

8. 내가 네 곁으로 지나며 보니 네 때가 사랑스러운 때라 내 옷으로 너를 덮어 벌거벗은 것을 가리우고 네게 맹세하고 언약하여 너로 내게 속하게 하였었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9. 내가 물로 너를 씻겨서 네 피를 없이 하며 네게 기름을 바르고

10. 수놓은 옷을 입히고 물돼지 가죽신을 신기고 가는 베로 띠우고 명주로 덧입히고

11. 패물을 채우고 팔 고리를 손목에 끼우고 사슬을 목에 드리우고

12. 코고리를 코에 달고 귀고리를 귀에 달고 화려한 면류관을 머리에 씌웠나니

13. 이와 같이 네가 금,은으로 장식하고 가는 베와 명주와 수놓은 것을 입으며 또 고운 밀가루와 꿀과 기름을 먹음으로 극히 곱고 형통하여 왕후의 지위에 나아갔느니라

14. 네 화려함을 인하여 네 명성이 이방인 중에 퍼졌음은 내가 네게 입힌 영화로 네 화려함이 온전함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포인트 워드: 희망

활용: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붙잡고 살아야 합니다.

 

다같이 따라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영혼의 양식이며 영적 전쟁에서 무기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1998년도 어느 날 나의 심정을 적은 글을 보면서 잠시 읽어드리고자 합니다.

아동부, 주일 대예배와 청년부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갑자기 허무와 허탈 좌절감이 내게 밀려왔다. 집에 와서 아내에게 나의 심정을 고백했다. 현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응답과 계획은 있으나 그것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오는 염려와 고민이었다. 아내는 장애인과 노인선교에 대한 교회복지를 공부하려고 하고 있다. 성운이는 어린이집에 보내야 하고 경제적 어려움은 가중되었다. 내 마음은 신학생이면서 가장으로서 불안해 하기 시작하였다. 월요일까지 마음은 불안했고 행복하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마음이 떠올랐다.

“It will be good." " It will be good in the future." ”잘 될 거야. 미래에는 좋아질 거야.“ 그런데 신기하게도 마음의 불안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미래에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내 마음속에서 들려온 그 음성이 내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여러분을 응원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고단한 인생길 힘겨운 오늘도 예수 내 마음 아시네. 지나간 아픔도 마주할 세상도 예수 내 마음 아시네. 하루를 살아도 기쁨으로 가리 예수 늘 함께 하시네 후회도 염려도 온전히 맡기리 예수 늘 함께 하시네.”

 

삶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오늘의 말씀이 큰 힘과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첫째, 세상에는 우리보다 힘든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너를 돌아보아 이 중에 한 가지라도 네게 행하여 너를 긍휼히 여긴 자가 없었으므로 네게 나던 날에 네 몸이 꺼린 바 되어 네가 들어 버리웠었느리라” (16:5)

 

오늘 성경 말씀을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사람을 보게 됩니다. 태어날 때부터 불행합니다.

먼저 신분을 보겠습니다. 그의 근본과 난 땅은 가나안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모리 사람이고 어머니는 헷 사람입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이 부모이었습니다. 가나안 족속은 바알과 같은 우상을 섬기는 족속이었으며, 그 외에도 다른 여러 음란한 신을 섬겼습니다. 특히 (크데심)이란 명칭을 가진 종교상의 창녀를 두고 있었으며, 몰렉이라는 신에게는 자식들을 제물로 바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출생할 때의 모습: 이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어느 누구도 배꼽줄을 잘라주지 않았습니다. 물로 씻어 정결케 하지 않았습니다. 소금을 뿌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소금은 고대 중동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소금으로 피부를 문지르는데 이는 피부를 강하게 하고 소독하는 의미가 있는 것으로 지금도 이렇게 하는 민족이 있다고 합니다. 그 누구도 이 아이를 위해 강보로 쌓아주지도 아니하였습니다. 그만큼 이 아이가 태어날 때 주변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냥 아무렇게나 방치된 아이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사랑받지 못하고, 태어날 때부터 환영받지 못하고, 태어날 때부터 무관심 속에 방치된 가엾은 아이였습니다.

 

우리 한 번 상상해 보세요.

독사가 있고 전갈이 있는 광야에 어린아이가 버려져 있습니다. 아이가 탯줄도 제대로 잘려지지 않은 채, 피투성이의 모습으로, 강보에 쌓이지도 못한 채 버려진 이 모습을 말입니다. 누구 하나 이 아이에 대해 관심을 표명하는 사람이 없는 처량한 모습. 이 아이의 앞길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단지 우는 일과 죽는 일 만 남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렸을 때, 부모가 집에 놓고 일하러 갔습니다. 부모가 집에 돌아왔는데, 아이를 감쌌던 수건이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습니다. 들 짐승이 눈을 파먹은 것입니다. 자기 실수가 아닌데, 눈 하나가 없습니다. 얼마나 아팠을까요? 피로 범벅이 되었지만, 아무도 없었습니다. 장애를 지닌 채 자라오다 결혼을 했습니다.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장애를 입은 아내를 버리고 가 버렸습니다. 이 여인의 기쁨은 아들 하나를 키우는 것입니다.

 

베토벤을 아시죠? 아버지는 매독에 걸려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폐결핵에 걸려 있었습니다. 4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한 명은 병으로 죽었고, 남은 아이들도 결핵으로 살아날 것 같지 않았습니다. 베토벤은 폐결핵에 걸린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습니다. 베토벤이 태어나보니 기가 막힙니다. 베토벤은 불우한 가정에서 어릴 때부터 일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의대 교수가 이 가정을 말했을 때, 학생들은 말합니다. “그 어머니의 뱃속의 아기를 죽여야 합니다. 낙태시켜야 합니다.” 교수의 말은 자네는 방금 베토벤을 죽였네.” 정상적인 가정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베토벤은 음악의 성인으로 성장했습니다.

 

우리는 대한민국 백성입니다. 그러나 아프리카나 북한에 태어난 사람들은 얼마나 힘겹게 하루를 살아갑니까? 오늘 내가 살아 있음으로 인해 감사해야 합니다. 오늘 내가 예수님을 믿고 있음으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피투성이라도 살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하고”(16:6)

 

피투성인 채 들에 버려진 아이를 하나님이 지나가십니다. 탯줄이 있는 그대로 광야에 버려진 아이,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데 오직 하나님만이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이 지나가시고 하나님이 이 아이의 이런 장면을 외면치 않으시고 보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애굽의 압제 밑에서 고통당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긍휼히 여기신 것을 말합니다.

 

피투성이라도 살아라.” “포기하지만 말아다오.” “죽지만 말아다오.”

왜요?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6절을 보세요.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하고”(16:6)

 

우리가 고통 속에 벗어날 길이 없고 희망을 상실한 채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인생의 무거운 짐 때문에 너무 고통스러워, 삶을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신가요? 우리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찾아오십니다.

 

창세기 16장에는 하갈이 나옵니다. 그녀는 사라의 몸종이었습니다. 이집트 여인입니다. 그러나 노예입니다. 젊은 나이에 80이 넘은 아브라함의 아이를 임신합니다. 사라의 박해를 피해 수르 광야에 갑니다. 왜 수르 광야인가요? 수르 광야를 지나면, 정다운 고향 이집트가 나옵니다. 내 형제가 살던 곳, 내 부모가 살던 곳, 내 민족이 살던 곳. 너무 서럽고 힘들어서 고향땅에 가고 싶었습니다. 그녀의 인생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버림받은 인생입니다. 그런데 수르 광야에서 천사를 만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잉태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라”(16:11) 이스마엘에 대한 축복을 예언합니다. 하갈은 놀랍니다. 그녀의 인생은 버림받은 인생이고 비참한 인생인데 하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아타 엘로이” “감찰하시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알고 계셨군요.”

 

이스라엘 백성들도 조금만 힘이 들면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일에 관심이 없어. 하나님은 원통한 일을 해결해 주지 않아.”(40:27) 아닙니다. 하나님은 누구보다 우리를 잘 아시고, 우리 일에 관심을 보이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응답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화담 숲에는 여러 소나무가 있습니다.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든 분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연적으로 휘어진 소나무도 있었습니다. 위로 잘 자라다가 갑자기 90도로 꺾인 소나무도 있었습니다. 옆으로 자라고 있었습니다. 어떤 소나무는 아래부터 한 바퀴 휘어진 소나무도 있었습니다. 사람으로 보면, 장애인입니다. 몸이 불편한 사람입니다. 그런 소나무가 살아 있기에 작품이 되어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었습니다. 그 소나무는 살아 있기에 멋진 작품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 힘을 더하시나니”(40:28-29)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40:31)

 

우리는 버림받은 아이의 입장에서 항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버림받은 아이의 마음을 아십니까? 누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일가 친척들의 축복속에 자라 나는데, 나는 탯줄을 잘라 줄 사람이 없습니다. 피투성이인데 목욕시켜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소금으로 소독시켜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강보로 싸주지도 않고 심지어 무자비하게 들짐승이 있는 들에 내어 버렸습니다. 이처럼 기구한 인생에게 왜 더 살라고 말합니까?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해서 무릎을 꿇고 도움을 구하는데, 왜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습니까? 내 마음이 미어지는 데, 이 가슴 누구하나 위로해 줄이 없는데 왜 더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은 그래도 말씀하십니다. “피투성이라도 살아야 한다

예화) 중국 선교사

태어나면서부터 몸이 약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뼈가 종잇장처럼 약했습니다. 정형외과 수술을 10번이상 받았습니다. 뼈를 자르고 늘이고 붙이고. 이 과정을 수도 없이 반복했습니다. 자기 힘으로 설 수도 없는 연약한 자였습니다. 잘 걸을 수도 없었습니다. 가장 연약한 자의 모습으로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이가 하나님 앞에 웁니다. “하나님, 왜 나를 태어나게 하셨습니까? 왜 이런 몸으로 살라고 하십니까?” 그런데 환상이 열리면서 예수님이 보입니다. 자기에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자기 발 앞에 무릎을 꿇더랍니다. 연약한 발을 붙잡고 울면서 말씀합니다. “얘야, 미안하다. 죽지만 말아다오. 죽지만 말아다오.” 예수님의 눈물이 뚝뚝 발에 떨어집니다. 본인도 웁니다. 지금은 목발을 짚으면 걸고 있습니다. 결혼도 했습니다. 2명의 자녀도 얻었습니다. 중국 땅에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합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돌보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물로 너를 씻겨서 네 피를 없이 하며 네게 기름을 바르고 수 놓은 옷을 입히고 물돼지 가죽신을 신기고 가는 베로 띠우고 명주로 덧입히고 패물을 채우고 팔고리를 손목에 끼우고 사슬을 목에 드리우고 코고리를 코에 달고 귀고리를 귀에 달고 화려한 면류관을 머리에 씌웠나니 이와 같이 네가 금 은으로 장식하고 가는 베와 명주와 수 놓은 것을 입으며 또 고운 밀가루와 꿀과 기름을 먹음으로 극히 곱고 형통하여 왕후의 지위에 나아갔느니라”(16:9-13)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요? 시편685절입니다.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68:5) 예수님의 별명은 세리와 창기의 친구였습니다. 사회적으로 멸시받고 천대받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친구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추하다고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더러운 사람들, 인간 쓰레기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가난하고 약한 자들의 친구로 사셨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삭개오입니다. 키가 작은 삭개오, 동족의 피를 빨아 먹는 사람이라고 손가락질을 받던 사람. 어느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던 사람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본문에서 피투성이인 채 발짓하던 사람에게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내가 너를 씻겨 줄게. 내가 너를 먹여 줄게. 내가 너를 예쁜 옷으로 단장시켜 줄게. 내가 패물로 장식해 줄게. 내가 면류관을 씌워 줄게. 내가 너를 왕후가 되게 할게. 내가 너를 존중히 여길께.”

 

하나님은 상대평가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우리를 평가하지 않습니다. 절대평가를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깁니다.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을 하길 바랍니다. 절대로 명석한 두뇌를 가진 사람과 장애인을 비교하지 않습니다. 장애인에게 왜 어리석게 행동하냐고 책망하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힘들다고 포기하지 말고, 말씀 붙잡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향한 믿음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삶의 모든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통이나 고난도 의미가 있습니다. 의미가 없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느 과학자나비의 출생 과정관찰하고 있었습니다. 나비가 되기 전에 껍질을 벗고 나오려는 나비의 몸부림치는 과정을 보니 매우 불쌍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 과학자는 그 나비의 껍질을 칼로 찢어서 벗겨 주었습니다. 과학자의 도움으로 그 나비는 편하게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날아가야 할 나비가 날지를 못하고 날개만 퍼덕이다가 잠시 후 죽고 맙니다. 껍질에서 나오는 나비의 몸부림은 의미있는 몸부림이었습니다. 껍질에서 나오는 그 나비의 몸부림은 나비가 되기 위한 꼭 필요한 과정 중의 하나였습니다. 과학자는 말합니다. “나의 서푼짜리 자비심이 나비의 날기 위한 꿈을 꺾어 버렸다.”

 

내가 불행한 일을 당하고 있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오늘 내가 당하고 있는 그 일에 대하여 아무런 의미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불행한 것입니다. 모르고 가는 길은 힘들고 어려울 수 밖에 없습니다. 내가 가는 길을 알고 가야 합니다. 오늘 내가 어려워하고, 힘들어하는 그 몸부림은 의미있는 몸부림입니다. 이 어려움은 하나님이 나를 쓰시기 위하여 연단하는 시험의 자리입니다. 오늘 무슨 일을 하든, 누구를 만나든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이요, 하나님이 만나게 하신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친절하게 기쁘게 그 일들을 감당하면 됩니다.

 

예화)

1990년에 노벨평화상 후보에 올랐던 엘레나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의 별명은 "노인의 어머니"입니다. 그는 세계적으로 가장 크고 훌륭한 양로원을 만들었습니다. 그래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고, 노벨상 후보에까지 올랐습니다.

 

이 분은 본래 하나님께 헌신하고 중국으로 가서 중국선교사로 일했습니다. 힘써서 중국선교사로 일하려고 했는데 폐결핵에 걸렸습니다. 그 불결한 환경 속에서 폐결핵에 걸려 각혈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여, 어째서 내게 이런 병을 주십니까?'하는 원망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제게 지금 무엇을 원하십니까?" 그리고 조용히 겸손한 기도를 하면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고향에는 아버지가 유산으로 물러준 넓은 불모지가 있습니다. 이걸 개간해서 농사를 했습니다. 거기서 수확한 것으로 중국선교사들의 선교비를 많이 보냈습니다.

 

그런데 농사하다가 추수하고 탈곡하던 중 탈곡기에 손이 끼어들어가는 바람에 손이 부러져서 자르게 됐습니다. 오른손이 잘려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어찌해서 이런 일이 있는 겁니까?"하지 않고 "하나님, 하나님은 지금 내게 무엇을 원하십니까?"하고 겸손하게 기도했습니다. 농사를 멈추고 그 땅에다가 양로원을 짓고 노인들을 위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성공적으로 확장되어서 세계적인, 유명한 양로원이 되고 그는 "노인의 어머니"라고 하는 높은 칭호를, 사랑스러운 칭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내 앞에 검은 그림자가 강하게 드리워지는 것은 태양빛이 그만큼 강하다는 뜻입니다. 그림자만 보고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의 해가 그만큼 강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소망을 끊은 채 죽음을 기다리는 버려진 아이에게 희망의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멸망으로 갈 때에 이 기차를 멈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벌거벗은 채 죽기만을 기다릴 순간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힘으로 불가능하다고 하는 현실에 하나님의 능력이 개입하기 시작하더니 절망을 향해 가던 기차가 멈추기 시작합니다. 이제는 희망의 창구를 향해 기차가 달리기 시작합니다. 살았다고 하는 안도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마지막으로 룻을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룻은 모압여인입니다. 그녀의 남편은 유대인입니다. 기룐입니다. 결혼한지 10년이 못되어 남편이 죽었습니다. 젊은 나이입니다. 청상과부가 된 것입니다. 나오미가 유대로 간다고 하자 따라갔습니다. 베들레헴에서 이삭 줍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삭을 줍는 일입니다. 제대로 쉬지 못하고 일을 했습니다. 남편 복도 없고, 자식 복도 없었습니다. 형제 지간의 복도 없었나 봅니다. 그런데 룻은 어머니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섬겼습니다. 어머니 말씀을 하나님 말씀처럼 순종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떤가요? 그녀는 보아스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다윗 왕의 증조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경에 여자의 이름으로 책이 기록된 것이 2권입니다. 한 권은 에스더, 한 권은 룻기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입니다. 피투성이 같은 인생도 왕후의 지위에 오르게 하시는 분. 지금 힘들다고 포기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살아계십니다. 삶이 고단하다고 낙심하지 마세요. 하나님께 기도해 보세요. 하나님이 도우십니다. 반드시 우리 인생은 축복으로 끝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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