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하고 축복하라
잠언 24장 17-18
17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18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 아니하사 그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
포인트워드: 용서
활용: 용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다. 타인을 용서하는 것은 결국 내 자신을 새롭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과정이다.
우리가 삶을 살다보면 축복의 만남이 있다. 남을 통해 도움을 받거나 내가 남을 도와주는 것이다. 은총의 만남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삶은 꼭 은총의 만남만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거북한 만남이 있고, 내 인생에 방해가 되는 사람도 만나게 된다. 소위 원수라고 불릴 정도로 내 인생을 좀먹고 내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긴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대하는 방법을 성경을 통해 말씀하고 계신다. 원수를 용서하라고 하신다. 아니 오히려 더 한발 나아가서 원수가 잘 되기를 축복하라고 하신다.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6:28)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19-21)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물어볼 것이다. “목사님 그런 말씀 마십시오. 원수를 용서하기도 힘든데 축복까지 하라니요. 원수를 용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십니까! 성경은 성경이고 우리는 현재를 살기에 더 이상 그런 말씀하지 마십시오. 저는 용서할 수는 있겠지만 도저히 그 원수 같은 인간을 축복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를 힘들게 하고 내 인생을 구겨지게 만든 원수를 용서한다는 것은 힘들고 한츰 더 나아가 주님의 이름으로 그 영혼이 잘 되길 바라는 것은 더더욱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걸 알아야 합니다. 남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병은 이 세상의 어떤 약으로도 치료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람들은 시간이 치료할 것이라 합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과거의 기억이 잊혀지지만 그렇다고 온전하게 치유받은 것은 아닙니다. 과거의 기억속으로 잊혀진 것 같지만 어느덧 우리에게 떠올라 우리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 과거의 상처요 아픔입니다. 우리가 남을 미워하면 할수록 우리는 내 가슴에 굵은 대못을 망치로 쾅쾅 박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것을 치료하는 약은 오직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원수를 용서하고 축복하는 것입니다. 우리 심령이 새마음을 가지면서 주님과 함께 동거하기 위해서는 미움과 증오의 가시를 뽑아내야 합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결국 내 심령을 굳은 심령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술을 마시면서 함께 어우러져 한바탕 놀다보면 친구가 되어져 있습니다. 원수도 미움도 사라진 채 서로가 나약한 인간임을 깨닫고 오해를 극복하며 용서와 화해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죽을 때까지 앙심을 품고 있지 않습니까?
안산제일교회 고훈 목사님이 이런 간증을 하시더라구요. 남자 집사님이 유방암이었습니다. 암이야 어느 곳이든 생길 수 있지만 남자도 유방암이 있습니다. 임종 직전에 있는데 목사님이 심방을 갔습니다. 집사님이 이런 말을 합니다. “목사님, 너무 고통스럽고 힘든데 하나님이 안 데려 가시네요. 하나님이 저를 고통 중에 놓으신 이유가 한가지 있습니다. 예전에 논에 물을 대려고 할 때 위의 논에서 물을 받아썼습니다. 그런데 위의 논 주인이 물을 대지 못하게 하자 몰래 위 논의 물을 다 뺐습니다. 그러자 위의 논 주인과 대판 싸웠습니다. 그런데 그 위논 임자가 우리교회 000집사입니다. 그 분에게 가서 내가 잘못했다고 용서를 빈다고 전해주십시오.” 목사님은 투병중인 집사님의 손을 붙잡고 말했습니다. “내가 꼭 가서 용서를 빈다고 말해주겠소” 그리고 나서 투병중인 환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목사님은 위논의 주인에게 가서 손을 붙잡고 말했습니다. 000집사가 예전의 일로 용서를 비는데 용서해 줄 수 있느냐?
하나님은 성도와 성도사이에 원수 맺히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이런 생각을 하면 어떻겠습니까? 자식들이 서로 얼굴을 보지 않고 왕래하지 않고 원수를 삼는다면 부모님들의 마음은 얼마나 아플까요? 명절이 끝난 후 꼭 형제간의 금전문제로 불화가 폭발하여 다툼이 있는 기사가 있습니다. 그걸 보는 이웃의 시선도 따가운데 부모님들의 찢어지는 심정을 누가 알아 주겠습니까?
우리가 원수를 용서하고 축복할 때 나를 괴롭히던 증오의 가시를 뽑혀져 나갑니다. 그리고 내 심령에는 평강과 안식이 임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이렇게 하면 좋을 것입니다.
“주님, 저의 원수를 용서하고 축복합니다.
그의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하게 하옵소서.”
형제 자매를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어떤 불이익이 있을까?
첫째, 자신이 하나님의 용서함을 받지 못한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막11:25)
성경에 의하면 우리에게 죄 지은 형제에게 스스로 원수를 갚겠다고 하는 것은 월권행위이다.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의 권한이지 우리의 권한은 아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12:19)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 백 데나리온을 빚진 자의 비유가 나온다. 일만 달란트를 빚진 자는 그 나라와 왕에게 엄청난 빚을 졌다. 1달란트가 6000데나리온이다. 1데나리온은 하루 품삯이다. 일만 달란트는 6000만 데나리온이며 6000만일 동안 곧 20만년 동안 일해야 빚을 갚을 수 있는 돈을 빚졌다. 그런데 왕은 그를 불쌍히 여겨 20만년이나 일해 갚을 수 있는 돈을 탕감해주었다. 그런데 일만 달란트 빚진 자는 자기에게 100데나리온 곧 100일의 분량을 빚진 자를 용서하지 않았다. 20만년과 100일 비교할 수 있는가! 인간의 수명이 100이라면 일생토록 먹고 쓰지 않고 일해도 갚을 수 없는 빚을 탕감받았는데 겨우 100일의 빚을 용서하지 않은 것이다. 이때 주인은 노하여 은혜를 모르는 무자비한 종을 체포하여 감옥에 집어 넣고 옥졸들에게 붙이셨다.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18:34-35)
옥졸들에게 붙이셨다는 옥졸들에게 처분을 맡겼다는 것이다. 인권이 발달한 미국이나 한국의 교도소에서도 간수들은 죄수를 심하게 다룬다. 이라크의 포로들을 미군들이 얼마나 심하게 다루었는가? 동영상을 보면 옷을 완전히 다 벗기고 인간의 수치를 들어나게 하면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지 않는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멸감을 느끼게 하고,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으며 마치 동물원의 짐승같은 대우를 받았기에 국제사회에 소개되지 않았는가! 현대에도 그런 일이 일어나는데 과거에 옥졸들은 얼마나 죄수를 심하게 했을 지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이웃을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투옥되고 옥졸들에게 붙여지게 된다. 다시 말하면 누가 나를 해코지 했을 때 그를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할 때까지 우리를 괴롭히는 옥졸들에게 붙이시는 것이다. 그러기에 원수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먼저 그를 위해 기도하고 그를 선대하고 축복하는 일이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은 원수가 잘못되는 것을 기뻐하다가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둘째, 원수를 용서하지 않으면 사랑하는 사람들을 괴롭힌다.
내가 마음 속에 앙심을 품으면 그 화살이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날아간다. 원수에 대한 앙심으로 인해 만나는 사람들에게 투명스럽게 대하거나 상처가 주는 말들을 본인도 모르게 쉽게 한다. 과거에 어떤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입었는데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결국 사랑하는 가족 남편이나 아내, 또는 자녀들이 그 피해자이라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사랑하는 가족을 다치게 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 속에 많은 상처와 아픔을 지닌 부부들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며 가정이 위기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미움과 증오라는 감정은 어디서 그것을 얻었는지 개의치 않는다. 꼭 그것은 자극을 받으면 바로 주변 사람들에게 화풀이를 해야 한다. 마치 종로에서 빰맞고 한강에서 눈물을 흘리듯 것과 같다. 과거의 아픔으로 인해 현재 사랑하는 가족에게 분을 내고 있다는 것이다.
용서는 우리의 정신 건강에 매우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데이비드 옥스버거는 말한다. “용서해 주는 사람은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자기가 손해 본 만큼의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다.” 용서를 하게 된다면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한 분노를 그에게 쏟지 않고 자발적으로 그가 입힌 피해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부부가 싸움을 하면 꼭 화풀이 대상으로 아이들을 이용한다. 이는 결국 사랑하는 가족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는 행위이다. 그러기에 우리 신앙인은 새마음 훈련을 해야 한다. 용서해 주는 것은 내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고, 결국 사랑하는 가족과 주변 사람들과 좋은 유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저는 개인적으로 말씀을 보다가 성신교회를 세울 때 무관심했던 사람들이 떠오를 때가 있다.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질 때 어찌 그렇게 무관심할 수 있을까? 그리고 십원 한 장 헌금 하지 않은 부자들도 있었다. 인간적인 마음으로는 그들에 대해 섭섭하고 섭섭하다. 그러나 내가 섭섭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결국 피해는 내 자신이 받는 것이고, 사랑하는 가족이 또한 피해자가 될 수 밖에 없다. 더 나아가서 내 심령의 상태가 온전하게 아버지의 마음으로 바뀌지 않았는데 생명의 말씀이 어찌 은혜스러울 수 있으랴? 나는 그들의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그들을 용서하고 축복한다. 그들의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해 지기를 기도한다. 그러면 놀라운 것은 그들에 대한 서운한 감정이 사라지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긴다는 것이다.
셋째, 용서하지 않으면 영, 혼, 육의 고통을 당하게 된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롬2:9-10)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사48:22)
마음의 고통은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전형적인 증상들이다. 용서할 때 가장 많은 혜택을 보는 사람은 원수가 아니라 바로 용서하는 사람자신이다.
나를 괴롭히고 상처를 준 사람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은 결국 자기를 멸망시키는 것이다. 증오심이 지나치면 혈압이 오르고 맥박이 뛴다. 오래된면 화병이 되어 몸져 눕기도 한다. 신체의 병의 70%는 마음의 병이며 분노에서 오는 병이다.
용서하지 못하고 분을 품었을 때, 우리의 몸은 격렬한 신체 활동을 했을 때와 비슷하다. 숨을 가쁘게 내쉬고 근육이 긴장되고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입안이 마른다. 위는 불편해진다. 소화기관으로 가야할 혈액이 근육으로 가기 때문에 소화작용이 정지되고 소화 불량이 생기는 것이다.
용서를 하지 못하면 신체도 이상이 오게 된다. 영혼은 피폐해 진다. 왜냐하면 주님과의 기도가 막히기 때문이다.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잠28:9)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사59:1-2)
우리가 용서한 것 같은데 온전히 용서하지 않았을 경우가 있다. 우리가 용서를 제대로 했나 알아보는 쉬운 방법은 이것이다. 나에게 힘들게 했고 나를 괴롭힌 사람이 잘되었거나 잘못되었다는 소문이 들릴 때 내가 어떻게 반응했느냐를 보면 나의 용서를 알 수 있다. 그 사람이 잘 되었을 때 배가 아프고 잘못되었을 때 고소한 마음이 생기면 중심으로 용서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또한 가해자가 먼저 사과하지 않았기에 용서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먼저 용서하였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5:10)
1950년대 미국 필라델피아의 한 신문에 대서 특필되었던 사건이다. 가난한 한국인 유학생이 필라델피아의 좋지 않은 지역에 살고 있었다. 그는 명문인 펜실베니아 대학교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어느 날 청년은 편지를 부치러 동네 인근의 편의점에 갔다가 귀가 길에 그만 동네이 십대 깡패들에게 붙잡혔다. 십대 깡패들은 이 청년을 이러저리 끌고 다니면서 구타하여 이 청년은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 1950년대 어려운 시기에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면 엘리트 중의 엘리트이다. 그는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였다. 그러나 가엾게도 이국땅에서 꿈을 펼쳐보지 못하고 매맞아 죽게 되었다. 범인들은 체포되었고 법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되었다. 한국에 있는 홀어머니는 교회에서 마련해준 여비로 외아들 유학생을 죽인 살인범들의 선고 공판에 참석할 수 있었다. 배심원들은 이미 유죄를 내렸다. 이들은 무기징역이나 사형에 처해질 운명에 놓였다. 판사는 형량을 선고하기 전에 이 어머니에게 할 말이 있으면 하라고 했다.
외아들 유학생을 졸지에 이국 땅에서 잃은 어머니는 무엇이라고 말을 했을까? 여러분 이라면 아들을 죽인 사람들의 공판에서 무엇이라 말을 할 것인가? “판사님, 이것들은 사람이 아닙니다. 짐승이니 사형시켜 주십시요”라고 했겠는가? 아니다. 이 어머니는 무릎을 꿇고 판사에게 애원했다. “판사님,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자기들에게 저주의 욕설을 퍼부을 줄 알았던 여인이 용서를 구하자 얼음기둥처럼 얼어붙어 있던 십대 깡패들은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들을 체포한 경관도 울음을 터뜨렸고 장내는 삽시간에 울음바다가 되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우리를 힘들게 했던 사람들이 부모님이 될 수 있다. 내 혈육이 남보다 못하게 나를 괴롭혔을 수 있다. 심지어 내 아내나 내 남편이 내 인생의 발목을 잡는 가해자 일 수 있다. 교회의 목회자도 여러분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 놓은 사람일 수 있다. 하나님 만나고 싶고 은혜받고 싶어 교회에 나왔는데 은혜는 커녕 오히려 상처만 입고 돌아간 사람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시간 그들의 이름을 그들의 얼굴을 떠올려야 하는 고통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 그들의 이름을 나열하라. 때로는 3-4명, 많게는 수십명이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했을 것이다. 이제 그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용서하라 그리고 그들의 영혼이 잘되기를 축복하라. 용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표현이다. 성도들은 죄지은 형제를 용서해줄 권세가 있다.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요20:23)
“하나님 제가 000를 용서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또는 하나님, 제가 000를 용서하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하지 말아라. 오히려 “하나님 아버지 저는 저에 대해 험담했던 000를 용서합니다. 그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되게 하옵소서. 또는 용서합니다 라고 기도하라.
용서하면 마음이 평화롭고 기쁘다. 우리는 원수가 잘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마음으로 기뻐해야 한다. 잘못되었을 때 같이 슬퍼할 수 있어야 한다. 여러분, 그것을 아는가? 우리가 원수를 용서하면 이는 결국 그의 머리에 숯불을 올려놓는 것이다(롬12:20-21). 모든 책임은 그에게 있지 여러분에게 있지 않다. 여러분은 원수를 용서하고 축복함으로 축복의 대열속에 서 있지만 원수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진노하심 가운데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에 있는 줄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불쌍한 사람이 어디 있으랴.
“너희가 무슨 일이든지 뉘게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이는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고후2:10-11)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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