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신 강단

새마음훈련18

박도식 2021. 4. 12. 18:19

새마음 훈련18

 

8:32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은성 수도원에 갔을 때였다. 수도원은 원래 침묵을 하면서 묵상을 하는 곳이다. 거의 말이 필요 없고 단지 주님을 묵상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곳이다. 오후에는 일을 하면서 노동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신대원 3학년 때 동기들과 함께 갔는데 목사님이 우리가 신학생인줄 알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권사님은 훌륭한 목사님들을 위해 중보기도하는 사람인데 수도원에 올 때는 참 평안을 얻지 못한 가운데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주님을 만나고 나서 참 안식을 얻고 돌아갔다. 현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무거운 짐을 지고 일은 많이 하는데 그 가운데 주님의 평안과 기쁨을 상실한 것이 문제이다.

 

참으로 맞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참된 자유와 행복이 있어야 하는데 오히려 부담이 되고, 고통을 당하고 있다. 예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얼굴에 기쁨이 없이 일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 우선 그 사역을 내려놓고 주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주님이 중요하지 주님을 위한 일이 중요하지는 않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주님을 위해 일하려고 한다.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혼자 고생하면서 땀을 흘린다. 그리고 얼굴에 인상을 쓰고 돕는 사람이 없다고 불평과 불만이다. 그들은 마치 이런 사람과 일반이다. 결혼을 하였는데 아이를 가지는 것이 목적이다. 신랑에게 늘 하는 말이 내게 아이를 갖게 해 주세요.” 하면서 요구하는 것이다. 매일 같이 내게 아이를 갖게 해 달라고 하면 신랑이 피곤할 것이다. 그러나 신랑과 친밀한 사랑을 나누게 되면 자연히 아이는 생기는 것이다. 영적인 사람은 예수님과의 교제를 더욱 중요시 한다. 주님과 친밀함을 나누다보면 자연히 사역이 이루어지고 결실을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신앙인들은 주님보다는 사역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결실을 보고자 하는 경우가 많다. 아직 영적인 성숙함으로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떤 자매가 남편을 잃고 혼자 살면서 외동아들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였다. 아들이 십대가 되면서 여학생들과 데이트를 하자 그것이 못마땅했다. 어머니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아들이 여학생들과 교제하는 것을 막았다. 자기 삶의 유일한 지주인 아들이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주는 것이 용납할 수 없었다. 아들이 대학에 입할 때 어머니는 아들이 집 근처의 대학에 가기를 바랐다. 그러나 아들은 집에서 멀리 떨어진 대학에 진학했다. 아들은 자기에 대한 어머니의 집착과 간섭에서 되도록 이면 멀리 떨어지고 싶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이렇게 행동을 하자 심한 배신감과 모욕감으로 괴로워했다. ‘내가 어떤 고생을 하면서 길렀는데 나를 이렇게 대할 수 있는가?’ 그러던 중 자신의 집착이 옛사람의 집착이었으면 육적인 그리스도인의 전형적인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아들에 대한 인간적인 욕망과 집착을 내려놓는 훈련을 하였다. 자신의 집착에서 아들을 떼어 놓았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아들에 대한 욕망과 집착을 내려놓으니 아들에 대한 관심이 없어지기보다 아들에 대한 성숙한 애정과 관심이 생기는 것이었다. 이제 아들은 그녀의 대리 만족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겨주신 기업이었다. 어머니는 아들의 인생에 개입하지 않으면서도 아들과 함께 성숙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아들은 어머니의 달라진 모습을 보자 이전에 나누지 않았던 깊은 대화까지 나누게 되었다.

 

우리 신앙인들이 무엇에 강한 집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직도 옛사람이 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주님께 집착하는 부분을 내려놓고 주님께 시선을 고정한 순간부터 주님의 평강을 경험하게 된다. 이런 진리를 어디서 얻을 수 있는가? 새마음을 소유한 사람들로부터 얻을 수 있다. 겉사람이 완전히 깨어질 때 속사람은 더욱 강건하게 되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하게 된다.

 

겉사람은 쉽게 깨어지지 않는다. 겉사람을 깨뜨리시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이다. 거짓말쟁이 야곱은 자기보다 더 간교한 삼촌 라반을 만나면서 20년 동안 연단을 받는 과정을 경험하게 되었다. 라반은 몇 번이나 야곱을 속이면서 야곱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그러나 그 아픔은 야곱 자신을 깨뜨리시는 하나님의 망치질이었다. 야곱은 자기 앞길이 보이지 않을 때 속이는 방법을 동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에서의 장자권을 빼앗았던 얄팍한 수를 쓴 것이 아니었다. 자기의 방법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였다.

 

모세의 겉사람이 깨어지는 시기도 광야 40년의 시간이었다. 애굽의 최고 학문을 접하고 지도력이 있는 사람이 광야에서 양이나 치고 있으니 그의 인생에 희망은 없어보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의 겉사람을 광야 40년 동안에 철저하게 깨뜨리셨다. 그리고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그의 나이 80에 그를 들어 쓰셨다. 요셉과 다윗도 마찬가지이다. 겉사람이 깨어지지 않으면 주님이 쓰실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교만끼가 있어서 늘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나쁜 본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그 영광을 홀로 받고자 하신다. 그래서 철저하게 겉사람이 깨뜨려지고 속사람이 강건한 사람을 사용하신다. 겉사람이 깨어지는 시기가 오랜 사람도 있고 갑자기 이루어지는 사람도 있다. 사울은 자기 의에 차서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극적 체험을 통해 예수님의 대적자에서 예수님의 전파자로 변신했다. 강한 성령체험을 통해 겉사람이 깨어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속사람이 생긴 것이다.

 

영에 속한 사람은 모두가 겉사람 곧 옛사람의 깨어짐을 경험한다. 그리고 속사람이 강건해지는 사람들이다. 속사람은 갑자기 형성되기도 하지만 매일 기도와 말씀을 통한 경건의 훈련을 통해 영글어진다. 영에 속한 사람이 될수록 우리 속사람은 강건해진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을 자랑하고 뽐내는 사람이다. 자기만이 최고이다. 그리고 자기의 이익과 영광을 구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지만 온전하게 주님을 왕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주님을 이용하는 것이다. 육적인 사람은 파벌과 당을 짓는다. 또한 쉽게 상처받고 잘 토라진다. 자기 기분이나 감정에 쉽게 좌우된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철저하게 자신을 죽이고 주님을 위한 삶을 살기 시작한다.

 

요즘은 인본주의 신앙을 지닌 사람들을 보게 된다. 이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아니다. 주님 때문에 그저 행복하고 나 혼자 잘 살면 된다는 아주 이기적인 마음을 지녔다. 이런 마음은 주님께 합당하지 않다. 우리는 주일 예배나 말씀 묵상을 통해 하나님을 만난다. 그러나 이는 콩나물 물주는 식이 아닌가! 말씀을 들으면 은혜가 되고 어느 순간 믿음이 자란 것이다. 경건의 훈련과 예배는 우리의 속사람을 자라게 한다. 그러나 새마음 훈련을 내 안의 상처와 죄악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다. 내 속에 쌓여 있는 죄악을 찾아내어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 안에 쓰레기를 청소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악취가 난다. 인본주의 신앙인은 쓰레기를 청소하지 않고 좋은 옷만 입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몸은 냄새가 나는데 좋은 옷을 걸친 듯 그 옷에서 향취가 나는가! 아니다. 악취가 난다. 그러나 속사람이 강건한 영적인 사람은 그 내면의 쓰레기를 청소하였기에 어떤 옷이나 걸쳐 입어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난다.

 

겉사람을 철저하게 깨뜨리는 것이 새마음 훈련이다. 우리가 이전에 집착했던 것이 학식이나 은사, 자녀가 하나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내 욕망의 산실임을 알게 된다. 놀라운 것은 이것들이 나를 자유케 한 것이 아니라 나를 속박한 멍에이었음을 알게 된다.

 

미국의 조엘 오스틴 목사님이 이런 말을 하지 않는가? 자기가 목회할 때 옆의 목사님은 새벽예배도 철야기도도 하면서 교회가 부흥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주변에서는 조엘 오스틴 목사님도 그 분을 따라서 철야기도와 새벽기도를 해야 하지 않느냐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맨 처음에는 상당히 고민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내린 결론은 나는 내게 주어진 방법대로 목회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철야기도를 하지 않고 새벽기도를 하지 않지만 주님 안에게 자기에게 주어진 목회를 즐기고 있다. 그런데 그의 교회가 미국에서 가장 큰 교회로 급성장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욕망과 집착의 껍질을 벗겨내야 한다. 남에게 잘 보이고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으로부터 자유해야 한다. 이런 껍질이 있으면 속사람이 드러나는 것을 강하게 막고 있었을 것이다. 무엇을 많이 가지고, 무엇을 많이 하면 보람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다.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8:32)”고 말씀하셨다. 유대인은 우리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남의 종이 된 적은 없는데 어떻게 우리가 자유케 되느냐고 불평을 하였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8:34) 그렇지만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8:36)고 하셨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지금까지 예수 믿고 충성스럽게 섬겼는데 열심히 봉사했는데 내가 다시 자유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내가 자유케 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잠에서 깨어나야 내가 잤다는 사실을 알듯이 내가 진정한 자유를 맛보아야 이전에 멍에와 속박에 묶여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나를 묶고 있었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와지는 것이 중요하다.

 

솔타이(영혼의 결합)을 끊어야 한다. 우리가 어떤 것이나, 어떤 사람을 하나님보다 더 좋아하고 시간을 투입하면 영적인 솔타이가 생겨 자신도 모르게 그것에 집착한다. 예를 들면, 밖에 나갔다 오면 무조건 TV를 본다. 아내가 있어도 밤새도록 TV앞에서 지내는 사람이 있다. 텔레비전과 강한 솔타이가 형성이 된 것이다. 우리 아이들은 미우나 고우나를 본다. 한 번 두 번 재미삼아 보다가 이제는 미우나 고우나를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성은이 말로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미우나 고우나를 보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어린 아이도 솔타이가 있다. 집착이 있는 것이다. 욕망과 집착이 강하면 솔타이를 끊는 것만으로는 안되고 회개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집착에서 벗어나는 순간 우리가 집착했던 것들을 더 이상 나를 힘들게 하지 않는다.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는 수단이나 도구가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된다. 물질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면 물질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 내 사업도 하나님의 것이요, 자녀들도 하나님의 것이요, 내 재능과 은사도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한다. 내 사역이나 목회가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자유이다. 주님께 내려놓아야 되는데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다.

 

원숭이 잡는 법을 우리는 많이 들었다. 원숭이 손이 들어갈 공간을 만들어 놓고 상자 안에 많은 음식물을 집어넣는다. 그러면 원숭이는 손을 집어넣어 음식물을 빼내려고 하는데 음식을 잡았기에 손이 빠지지 않는 것이다. 그 손을 펼 때 나올 수 있는데 손을 움켜쥐고 있으니 잡히는 것이다. 마음이 새롭게 되어 속사람이 강건해 지는 사람들은 쉽게 내려놓는다. 오직 하나님만 기뻐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으로 더 즐거워한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내가 집착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인가 아니면 나의 개인적 욕망인가를 살펴야 한다.

 

은혜는 두가지이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부어주시는 은혜가 있고, 내 심령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은혜이다. 소낙비 퍼붓듯 갑자기 강하게 임하는 은혜는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 받은 은혜를 잘 간직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러나 내 심령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은혜는 봄 햇살에 눈이 녹듯이 우리의 겉사람을 하나하나 깨뜨린다. 그리고 속사람이 새롭게 되어 끊임없이 우리 안에서 넘쳐나게 된다. 내 안에 속사람이 강건하게 될 때 끊임없이 은혜의 강물이 흘러나온다. 바울은 자신의 겉사람을 철저히 깨뜨렸고 속사람이 날마다 주님과 만나 교제하는 삶을 살았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2:20) 자기 자신 안에 주님이 주인이 되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로 만족하지 않고 내 안에 살아계신 주님이 왕이 되는 단계로 나아갔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주님 안에 있으나 그 마음속에 주님을 왕으로 섬기지 않는다. 그래서 밖에 모른다. 내 체험, 내 은사, 내 가족, 내 사역, 내 교회. 그러나 이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들의 태도이다. 보다 신령한 사람은 나를 통해 주님이 살아 역사하시도록 양보하는 사람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놀라운 진리의 말씀을 주셨다. 주님이 주인이 되면 자유하다. 그러나 내가 주인이 되어 살려고 하면 불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 나의 것을 내려놓음으로 주님이 역사하게 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진정한 영성이다.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한다.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27)

'성신 강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용서하고 축복하라  (0) 2021.04.12
새마음훈련7  (0) 2021.04.12
새마음훈련17  (0) 2021.04.12
새마음훈련16  (0) 2021.04.12
새마음훈련15  (0) 2021.0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