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사랑하라
시편 84:1-4
1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2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3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4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포인트 워드: 교회
활용: 하나님의 성전이 교회를 사랑하자. 교회를 사랑함이 곧 하나님을 사랑함이다.
지난 몇 주간 교회에 대해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제가 아동부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교회가 무엇이지?” 어떤 아이가 대답합니다. “하나님의 거시기입니다.” 아주 멋진 대답입니다. 여기서 거시기란 몸이라는 말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1:23) 교회는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 있는 곳입니다. 축복의 통로입니다. 교회가 있는 나라는 복을 받습니다. 교회가 없는 나라는 축복의 통로가 막혀 버립니다. 만물을 충만케 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만물의 으뜸이 교회입니다. 세 번째로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딤전3:15)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주인의식을 가지고 섬길 뿐입니다.
예술가들이 혼신의 정성을 기울이면 하나의 작품이 나옵니다. 어머니가 산고를 겪으면 아기가 태어납니다. 농부들이 정성을 기울일 때 수확의 기쁨을 맛봅니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은 교회 탄생의 서막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교회를 무척이나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교회를 위해 자신을 주었기 때문에 교회를 영광스럽다고 말합니다(엡5:27).
초대교회의 키프리안은 말합니다.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 칼뱅도 말합니다. “교회를 어머니로 가지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없다.” 수많은 신앙인들은 교회를 가리켜 “은혜의 보고”라고 합니다. 교회라는 보배로운 창고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역사를 보면 악한 영들은 교회를 무너뜨리려 했습니다. 김일성이 정권을 잡으면서 제일 먼저 했던 일이 교회를 폐쇄하는 일입니다. 목사님들과 신앙인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악한 자들과 선한 자들은 쉽게 구분이 됩니다. 악한 자들은 교회를 무시하고 비방하거나 험담합니다. 그러나 신실한 사람들은 교회를 사랑하고 세워가려고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교회를 보호하고 지키려 했습니다.
“교회를 바로 알면 복 받는다”는 제목으로 몇 주간 은혜를 나눈 이유는 교회가 그 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심코 교회를 무시하거나 비방했다면 이는 곧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고 비방하는 행동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9장 4절에서 예수님이 바울에게 말합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9:4) 바울은 예수님을 핍박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지요. 예루살렘 교회를 공격했지 예수님을 핍박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말합니까?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합니다.
이 땅의 교회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교회는 만물의 으뜸이며 예수님의 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 가장 거룩하고 보배로운 곳이라 합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단지 눈에 보이는 것으로 교회를 보면 큰 실수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회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은 이 교회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첫째,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시84:1-2)
교회는 비난의 대상이 아닙니다. 조롱하거나 함부로 말할 대상이 아닙니다. 사랑의 대상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뜨겁게 사랑하는 시인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2절을 보면 기가 막힙니다.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하나님의 성전을 사랑하여 몸이 쇠약해질 정도라고 합니다. 상사병에 걸린 젊은이들과 같은 심정입니다. “보고 싶고 또 보고 싶은” 사랑의 대상이 하나님의 성전이랍니다.
시편기자가 사람을 향해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부모를 향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전을 향해 말합니다. 왜 시편기자는 이런 고백을 할 까요? 1절에는 “주의 장막”이라고 합니다. 2절에서는 “여호와의 궁정”이라 합니다. 3절에서는 “주의 제단”이라 합니다. 4절에서는 “주의 집”이라 표현합니다. 성전이 바로 하나님의 집이기에 사모한다는 것입니다. 현대적의미로 표현하면 교회가 하나님의 것이기에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회사의 CEO라면 어떤 직원을 좋아할까요? 능력이 있으나 회사를 향해 불평하는 사람입니까? 능력은 부족하나 회사를 사랑하는 사람입니까? 기왕이면 능력 있으면서 회사를 사랑하면 금상첨화이겠지요. 요즘은 명예퇴직, 조기퇴직을 많이 합니다. 어떤 사람은 회사에서 내 보내려고 안달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회사가 붙잡으려고 야단입니다. 회사에서 필요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회사를 사랑하며 맡겨진 일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유능해도 회사를 사랑하지 않고 불평과 불만을 내세운다면 조기 퇴직 1순위에 오르게 됩니다. 능력이 있으나 애사심이 없는 자들은 언제나 시한폭탄과 같습니다.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있던 일인데요. 록펠러가 세운 석유회사가 [스탠다드 오일]입니다. 이 회사에 존 아치볼드라는 석유 판매상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회사의 말단 직원입니다.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는 독특한 버릇이 있습니다. 출장을 가서 호텔이나 모텔에 숙박하면 자기 이름을 적고 늘 “한 통에 4달러 스탠다드 오일”이라고 씁니다. 직장 동료들은 쓸데없는 행동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존 아치볼드는 생각이 다릅니다. 자기의 조그만 행동이 회사에 반드시 도움을 줄 것이라 믿습니다. 회사에서도 그의 별명은 “한 통에 4달러 스탠다드 오일”입니다.
어느 날 존 아치볼드가 출장을 갑니다. 호텔에 숙박계를 쓰면서 “한통에 4달러 스탠다드 오일”이라고 씁니다. 유심히 한 신사가 이것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왜 숙박부에 그렇게 적습니까?” 아치볼드는 말합니다. “저희 회사를 조금이라도 알리고 싶습니다. 만약 석유가 급하게 필요하면 이 전화번호로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일이 있은 후 한 달 뒤에 존 아치볼드는 회장실에 불려 갑니다. 한 달 전에 호텔 로비에서 만난 사람이 록펠러였습니다. 그는 말단 직원이었지만 [스탠다드 오일]의 사장에 오르게 됩니다. 세계 최고의 재벌이 학벌도 없는 아치볼드를 사장에 발탁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의 외모입니까? 학벌입니까? 경험입니까? 아닙니다. 회사를 사랑하는 마음, 자기 일에 충성하는 마음을 보았습니다.
회사가 붙잡는 사람은 다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붙잡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8:17) 그러면 오늘날 어떻게 표현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분의 몸인 교회를 사랑하지 않으면 말이 안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반드시 교회를 사랑하게 됩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교회를 세워 나가는 자가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시84:4)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시84:12)
둘째, 마음을 다하여 사랑해야 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5)
하나님이 어떤 분입니까? 사랑이 많은 분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이 사랑이기에 우리에도 마음을 다한 사랑과 섬김을 요구합니다. 3절을 보세요. 주의 제단에서 참새가 제 집을 얻었다고 합니다. 참새는 어떤 새입니까? 예수님은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고 하셨습니다. 한 앗사리온은 화폐 단위 가운데 보잘 것 없는 작은 돈입니다. 앗사리온은 데나리온의 1/16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한 노동자의 하루 임금입니다. 하루 임금이 8만원이라고 하면 앗사리온은 5천원 정도의 돈입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면 2500원 정도하는 보잘것 없는 새입니다. 가난한 자의 번제물로 쓰였던 산비둘기 집비둘기 보다 못한 새입니다. 그런데 이런 새가 하나님의 집에서 보금자리를 얻었다고 합니다. 가장 하찮고 보잘 것 없는 사람도 하나님은 성전에 들어오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세상에서 형편없는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맞아주시고 예배를 받아주신다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제비는 어떻습니까? 대표적인 철새입니다. 먹이를 찾아 이리 저리 먼 거리를 떠도는 새입니다. 떠돌이도 보금자리가 필요합니다. 알을 낳고 부화시키고 돌보아야 합니다. 떠돌이 제비들이 성전에서 보금자리를 얻었나 봅니다. 정처 없는 떠도는 사람, 방황하는 사람도 받아 주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세상에서 방황하던 사람도 환영하십니다. 참새같이 보잘 것 없는 사람도 환영하십니다.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낙심한 사람이 교회에 나올 때 축복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시리니”(마12:20)
이 은혜를 절실하게 체험한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오늘 시를 지은 “고라 자손들”입니다. 고라 자손들은 아픈 과거를 지니고 있습니다. 민수기 16장에서 보듯이 그들의 조상은 모세와 아론에게 반역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스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위에 스스로 높이느뇨”(민16:3) 모세는 분개하였고 이들을 향해 “악한 무리들”이라고 합니다. 결국 어떻게 됩니까?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 가족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 물건을 삼키매”(민6:32) 주의 종에게 반기를 든 고라 자손은 생매장당합니다. 고라자손에게는 부끄러운 과거이며 지을 수 없는 상처입니다. 친일파의 후손들이 선조들을 얼마나 부끄러워합니까? 마찬가지입니다. 부끄러운 과거를 지닌 고라 자손들인데 하나님은 이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성전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다시 회복시키셨습니다.
고라 자손은 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감사가 나옵니다. 역대상 26장 1절에서 성전 문지기로 쓰임받습니다. “문지기의 반차가 이러하니라 고라 족속 아삽의 자손 중에 고레의 아들 므셀레먀와”(대상26:1) 아침마다 성전 문을 열었고 성전 안에 있는 각 방을 지키는 일을 합니다. 고라의 자손들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도 합니다. 역대하 20장을 보면 모압과 암몬이 남왕국 유다를 공격해 옵니다. 그때 왕은 고라 자손이 속한 레위 지파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송하게 합니다. “그랏 자손과 고라 자손에게 속한 레위 사람들은 서서 큰 소리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니라”(대하20:19) 군인들보다 앞장서서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그들에게는 무기도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군인들 뒤에서 안전하게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최전방에서 찬양을 부릅니다. 19절에서 말씀합니다. “심히 큰 소리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니라”(praised the Lord with very loud voice) 목숨을 걸고 찬양을 합니다. 조상들의 불명예를 씻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입장이라면 말할 것입니다. “우리가 총알받이야. 왜 아무 것도 없이 전쟁터에 보내. 군인들이 먼저 가야지 왜 찬양대가 먼저가. 국가가 나를 위해 해 준 것이 무엇이 있다고.” 고라 자손들은 불평하고 목숨을 다해 찬양합니다. 그리고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고라 자손이 오늘 본문에서 말합니다.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시84:2) 찬양이 다릅니다. 음악적인 기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찬양하는 마음의 자세를 말합니다.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20:5-6)
하나님께 은혜를 입기 위해 더욱더 주님을 사모하지 않았을까요? 조상들의 실수를 만회하고 복된 내일을 후손들에게 물려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지금 성전에서 찬양을 하고 문지기로 있는 것을 기뻐합니다. 10절에서 말합니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84:10)
사랑하는 여러분,
간절한 찬양이 기적을 가져왔습니다. 적들이 멸절 당했습니다. 고라 자손의 진실한 섬김이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멸절될 위기 속에 다시 시작하는 은혜를 아시지요? 고라 자손은 이 은혜를 받고 진심으로 감사하고 진심으로 봉사하고 진심으로 섬길 수 있었습니다.
셋째, 성실히 사랑해야 합니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시84:4)
4절을 보세요.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항상’이라는 말을 합니다. 고라 자손이 찬송을 하는데 ‘항상’했다는 말입니다. ‘항상’이라는 말은 성실함을 말합니다. 우리가 항상 찬송하기가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우리가 항상 성령으로 충만합니까?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슬프고 힘들고 어려운 때가 있습니다. 그 때에는 찬송은커녕 기도도 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너무나 섭섭할 때가 있습니다. 남들은 잘 되는데 오히려 주님을 잘 섬기는 우리가 안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항상’이라는 말은 어떤 상황에서나 찬양했다는 말입니다. 슬플 때에도, 몸이 아플 때에도 여건이 좋지 않을 때에도 포함합니다. 찬양드리고 싶지 않을 때에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에도 찬양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항상’이란 말의 의미입니다.
이번 주에 CBS에서 간증을 들었습니다. 미국에서 찬양사역을 하는 어느 사모님(윤경희 사모)의 간증입니다. 목사님과 사모님이 개척하여 교회가 부흥하면 다른 곳으로 옮깁니다. 하나님이 큰 도시로 가라면 그냥 갑니다. 안정된 삶을 살려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려고 합니다. 순종하여 가지만 평탄하지만은 않습니다. 재정적인 어려움이 따라옵니다. 빌딩 청소부도 하고, 도넛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도 합니다. 교회가 부흥되면 하나님은 꼭 옮기라고 하셨답니다. 사모님은 25세부터 열심히 주님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궁암 2기라는 말을 듣습니다. 하나님께 원망이 나오기만 시작했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았는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느냐는 것입니다. 암 선고를 받고 눈물만 나오더랍니다. “하나님 저 죽고 싶지 않아요. 남편도 있고 아이들이 있습니다.” 젊은 나이에 암이라니 얼마나 놀랐을 까요? 병원에서는 빨리 수술하자고 합니다. 그런데 그 때 미국에서 찬양 대회에 참석하라고 합니다. 목사님과 함께 기도합니다. 본인은 빨리 수술 받고 싶은데 하나님은 찬양하라고 합니다. 고민을 하다 찬양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급히 미국으로 돌아갑니다. 찬양 대회에서 참가하여 우수상으로 입상합니다. 1개월이 지나고 서울에 와서 수술을 받으려 합니다. 수술 전에 다시 검사하는데 의사가 말합니다. “미국에서 수술을 받고 오셨나요?” 암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입니다. 이 소리를 듣고 목사님과 사모님이 함께 웃습니다. 정말 즐거워합니다. 그러면서 의사에게 말했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을 주셨습니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항상 주를 사랑하는 사람. 항상 기도하는 사람, 항상 맡겨진 일을 하는 사람이 복된 자들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많은 복을 받은 사람은 다윗 왕입니다. 하나님은 다윗 왕이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행13:22)에 하셨습니다. 그의 신앙은 하나님의 집을 간절히 사모하는 신앙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시27:4). 다윗은 하나님의 집에 거하며 사는 것을 자기의 평생의 소원이고 평생의 기도제목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다윗보고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고 했을 때 다윗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시122:1). 다윗은 또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시65:4).
다윗 왕이 성전을 사모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화려하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다윗 당시 성전은 초라했습니다. 천막으로 지은 곳에 있었습니다(대상17:1) 그의 궁궐은 백향목으로 지었지만 하나님의 성전을 너무나 초라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궁궐보다 하나님의 전을 더욱더 사모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이 하나님이 계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곳이 하나님이 역사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왕은 초라한 천막을 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궁전에 거하길 사모했습니다. 하나님이 이걸 보셨습니다. 초라한 천막이지만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보셨습니다. 지금 하나님은 여러분의 어떤 모습을 보실까요? 성신교회를 사랑하는 그 모습이 아닐까요?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축복의 주인공이 되십시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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