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를 쉬지 않네!
사도행전 5장 38-42
38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39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40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42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포인트 워드: 전도
활용: 초대 교회 교인들은 박해를 받으면서도 복음 전파를 멈추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 우리는 편하게 예수님을 믿고 있다. 한국의 어느 곳에서나 쉽게 교회를 찾아 볼 수 있고, 예배드릴 수 있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 역사는 피와 눈물로 얼룩진 자취를 가지고 있다. 로마의 네로 황제는 기독교인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놓고 그들의 몸에 기름을 발랐다. 그리고 불을 붙여 그 불빛으로 연회장을 밝히도록 했다. 안디옥 교회의 2대 감독이었던 이그나티우스는 말했다. “칼날에 가까이 갈수록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다.” 콜로세움에서 맹수의 밥으로 사라졌지만 결코 그의 신앙을 꺾을 수는 없었다. 초대 교회는 많은 순교자들을 배출했다. 그들의 피 흘림이 아니고는 복음의 맥이 벌써 끊어졌을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는 초대 교회 사도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경험하는 일들을 설명하고 있다. 40절을 보면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41절에서는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고 했다. 사도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면서 박해와 핍박을 엄청나게 받았다. “채찍질한다”는 말은 “가죽을 벗긴다”는 말이다. 그 당시 채찍은 소가죽으로 만들었다. 신명기 25장 1절에서도 채찍으로 40대 이상을 연속으로 때리지 말라고 했다. 왜냐하면 대부분 10대를 넘기지 못해 살가죽이 찢어지고 터져서 피가 흐르기 때문이다. 사도바울도 복음을 전하면서 40에 하나 감한 매를 5번이나 맞았다. 복음서의 중심은 예수님이지만 사도행전의 중심은 사도들이다. 사도들은 오늘날 목회자들처럼 대접을 받고 인정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얻어 맞으면서 복음을 전했다. 왜 그랬을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복음을 계속해서 전파할 수 있는 힘을 제공했을까?
첫째, 그들은 자신이 빚진 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롬1:14)
국가가 빚을 지면 IMF의 내정 간섭을 받게 된다. 그리스나 스페인이 부도 위기에 있으니 유럽 연합의 간섭을 받게 된다. “인원을 감축하라. 연금을 적게 줘라.”등 내정간섭을 받는다. 나라가 빚을 지면 갚아야 하듯, 개인도 빚을 지면 그 빚을 갚아야 한다. 빚이 많고 갚을 능력이 없으면 신용등급이 떨어지고 신용불량자가 된다. 신용카드도 이용할 수 없고, 은행 대출도 불가능하게 된다. 사람에게는 신용이 중요하다.
구약시대에는 빚을 갚지 못하면 몸을 팔아서라도 갚아야 했다. 심지어는 자녀들을 종으로 내 주어야 했다. 사람들은 세 가지의 빚을 지고 있다. “물질의 빚, 도덕적인 빚, 영적인 빚”이다. 사도바울은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롬13:8)고 한다. 바울은 자신이 영적인 빚을 지고 있는 자라는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바울은 핍박자였다. 죄인 중의 괴수였다. 포악한 자였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부름을 입었다. 이방인의 사도로 택정함을 입었다. 복음 전파자가 된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늘 빚진 자의 자세로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모두는 빚진 자이다. 우리 스스로가 잘 안다. 우리 안에 거룩함이 없다. 정직함도 없다. 진실함도 없다. 세상 사람들이 해보고 싶은 것을 우리고 해 보고 싶다. 인생의 쾌락을 즐기고 싶다. 선한 마음이 가득한 것이 아니라 나쁜 마음도 있다. 로마서 5장 10절에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다”고 한다. 5장 8절에서는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라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는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어 주셨다. 하나님의 화목제물이 되어 주셨다.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시켜 주셨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심으로 구원을 선물로 주셨다.
초대 교회 사도들은 이 은혜를 알고 있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 주셨건만, 유대인을 오히려 예수님을 때리고 조롱했다.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은혜를 원수로 갚은 것이다. 극악무도한 백성들을 위해 예수님이 기꺼이 희생 제물이 되신 것이다. 이 은혜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이것이 빚진 자의 마음이다.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목사가 될 수 있었을까?’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장로가 될 수 있었을까?’
우리는 복음에 빚진 자들입니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복음을 들고 왔던 토마스 목사님은 어떻게 순교하셨습니까? 대동강변에서 칼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는 칼로 목 베임을 당하면서도 성경을 내밀었는데, 그 때 그의 나이 겨우 27세였습니다. 아펜젤러 선교사 역시 복음을 전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다 군산 앞바다에서 배가 충돌하는 사고로 순교하고 말았습니다. 그 때 그의 나이가 45세였습니다. 그는 유능한 의사였으며 학자였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그의 순교는 미친 행동입니다. 그에게는 분명 안전하고 편안한 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경을 들고 전도하러 가다가 물에 빠져 죽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들에게 빚진 자들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그런 간증을 한다. “내가 어떻게 목사가 되었을까?” “착해서, 믿음이 좋아서, 충성스러운 사람이라서.” 하나님의 대답은 엉뚱한 것이었다. “목사가 아니었으면 예수님을 잘 믿지 못할까봐.”이다. 목사님이 되었기에 기도할 수 있었고, 목사님이 되었기에 말씀을 읽을 수 있었고, 목사님이 되었기에 거룩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만약 목사님이 아니었다면 그릇된 삶을 살았을 것이다는 것이다. 이 응답을 받으니 목사가 된 것이 감사했다. 목사가 된 것이 은혜였다. 목사가 된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었다.
사도들은 자기들이 예수님을 믿고 성령 받은 것이 감사한 것이다. 나같은 죄인을 택해 주셔서 하늘의 비밀을 알게 하시고 천국의 일꾼으로 삼으신 것이 감사했던 것이다. 나같은 사람도 예수믿고 구원받은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예수믿고 구원받으라고 외치는 것이다. 나도 쓰임받는데 당신도 쓰임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빚진 자의 심정이 이들이 마음에는 있었다.
둘째, 그들은 복음의 능력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1:16)
사도들은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영혼입니다. 비록 육신적으로는 채찍에 맞고 능욕을 받지만, 그들의 영혼은 무척이나 행복했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전함으로 핍박을 받지만 그들의 영혼은 하나님의 위로와 은총을 입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힘이 그들에게는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왜 얻어 맞고 사자 밥이 되고, 화형을 당함에도 불구하고 기뻐하는지 말입니다.
사형수들을 많이 대하는 박효진 장로님이 말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자는 얼굴이 편안하고 밝다. 천국에 대한 소망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형수는 불안해하고 초조해 한다. 사형수들만 보더라도 분명히 천국은 있다.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복음은 능력입니다. 사람을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나라와 민족을 살리는 엄청난 힘이 있습니다. 병원이 하는 일은 병든 사람을 살리고 병든 육체를 고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병원은 한계가 있습니다. 치료하지 못하는 병이 더 많습니다. 현대 의학은 15-20%만 고칠 수 있다고 합니다. 최고의 의료시설, 최고의 의료진을 가지고도 못고치는 병이 더 많습니다. 최고의 성능을 자랑하는 약들이 계속 개발되지만 못고치는 병이 더 많습니다. 그런데 현대의학이 고칠 수 없는 질병을 하나님은 고쳐 주십니다. 의사들이 포기한 병도 하나님은 능히 치료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5장 15-16절입니다.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뉘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 그림자라도 뉘게 덮일까 바라고 예루살렘 근읍 허다한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행5:15-16)
복음은 육체의 질병만 치료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질병도 치료합니다. 마음에 상처를 입은 자들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고침받습니다. 마음의 응어리가 해결되니 내가 건강해지고, 가정이 행복해 집니다. 세상 사는 맛을 느낍니다. 그런데 복음은 우리의 영혼의 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현대 의학은 몸과 마음은 고칠 수 있지만 영혼의 문제는 전혀 치료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간의 영혼을 살리고 구원하는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의사들이 치료방법으로도 안 되는 것은 결국 영적인 문제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병원장의 이야기입니다. 이분의 가정에는 치매로 고생하다 죽은 분들이 몇 대에 걸쳐 있었습니다. 이분이 축귀 사역을 받는데 치매를 일으키는 귀신이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의사가 깜짝 놀랐습니다. 사역하는 목사님이나 어느 누구도 자기 집에 치매가 가족력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자기는 건강한 의사인데 자기 안에 치매의 영이 있다는 것입니다. 의사가 육체와 정신을 치료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영적인 부분까지 온전히 치료하는 분임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오직 복음만이 개인을 살립니다. 예수의 복음만이 가정을 살립니다. 사회를 살리고 국가와 민족을 살립니다.
러시아는 이미 9세기경에 복음 선교를 받아들인 나라였습니다. 1237년 몽고의 타타르 족이 쳐들어 왔을 때, 많은 순교자를 내기도 했습니다. 도처에 우뚝우뚝 교회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러시아가 교회를 인정할 때는 황금시기를 맞이 했었습니다. 그러나 1917년 공산당 혁명이 일어나고 1937년 헌법을 개정하면서 종교활동과 선교를 법으로 묶어 버렸습니다. 그 때부터 소련 기독교는 전도를 포기해 버렸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교회는 문을 닫았고, 러시아의 황금문명도 문을 닫았습니다. 경제는 몰락했고, 정치는 70년, 100년이나 후퇴했습니다. 한 마디로 암흑기를 살게 되었습니다.
19세기에 영국에서 네 번이나 총리를 지낸 윌리엄 글래드스턴경에게 한 젊은이가 질문합니다. “인간의 가슴 속에 박혀 있는 슬픔을 어떻게 하면 확실히 치료할 수 있습니까?” 글래드스턴이 대답합니다. “복음이요. 오직 복음 이외의 다른 방법이 없소. 예수 복음의 능력은 나를 구원했고 우리 가정을 구원했고 이 나라를 구원할 것이요.” 글래드스턴은 주일예배에 빠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주일에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나라 일을 올바로 감당할 수 있는 힘을 공급받습니다.”
복음는 능력이 있습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은 이 능력을 받은 것입니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성령의 능력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성령의 사람에게는 육체적인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상급이 있는데 잠시 고통당한다고 주저할 수 있겠습니까?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면 영적인 것이 소중한 줄 압니다. 복음의 능력을 알지 못하면 육적인 것이 너무 귀해 보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5:10-12)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잘되고, 가정이 살고, 민족이 사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밖에 없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사랑이 강권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5:14)
전도는 내가 하고 싶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힘과 지식을 의지하고 나아가면 금새 실망에 빠집니다. 해도 해도 안 되는게 전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으로 가득차면 전도할 수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의 아버지를 보세요. 자식이 집을 나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 아들을 기다립니다. 동구 밖에서 늘 자식이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한자에 어버이 친(親)가 있지 않습니까? 나무(木) 위에 올라가(立) 바라본다(見)는 말입니다. 한자도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라 복음을 담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결국 아들로 하여금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지 않습니까? 끊임없이 기다리는 아버지의 사랑처럼 우리에게도 아버지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올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이민아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의 아버지는 한국의 대표적인 지성인 이어령 교수였습니다. 그가 어떻게 70이 넘어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을 수 있었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나이 먹어 망령 났다고 조롱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예수쟁이 되었다고 비웃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향한 딸의 간절한 사랑이 그를 예수님께로 인도했습니다. 무남독녀인 딸이 14년 동안 형언할 수 없는 고난의 풀무 속에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아버지에게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세례를 받던 날 딸에게 쓴 편지의 일부분입니다. “너희 편지를 겨우 다 읽었다. 여기저기 글이 눈물로 번져 있더구나. 네가 웬일로 그렇게 많이 울었느냐? 너희 기도가 지성에서 영성으로의 높은 문지방을 넘게 했구나!”
아버지의 영혼을 향한 딸의 사랑이 절대 믿을 것 같지 않았던 아버지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이는 성령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이민아 목사님이 한 일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기도하고 우는 것이었습니다. 빌립보서 1장 15절에서는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니”라고 합니다. 이 말은 투기와 분쟁을 위해, 다시 말하면 옳지 않은 목적을 가지고도 전도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전도에서 중요한 것은 영혼을 위한 사랑이어야 합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쓰레기를 분리수거하는 아주머니가 나왔습니다. 아파트에서 쓰레기를 분리수거합니다. 자동차 안에서 분리수거된 쓰레기가 가득합니다. 대학 축제때에는 쓰레기통을 뒤적이면서 분리수거를 합니다. 이 분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다음세대에게 좋은 환경을 물려주기 위함입니다. 지구가 쓰레기로 몸살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고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인터뷰 도중에 쓰레기를 생각하며 울고 있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습니다. 지구를 사랑하는 마음이 대단한 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한 영혼을 어떻게 사랑하십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부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말합니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가슴으로는 안 된다.” 맞습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사랑을 체험할 때, 아버지의 마음이 우리 안에 부어집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무척이나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이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눈은 한 번도 우리에게서 떠나본 적이 없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2:9)
사랑하는 여러분,
초대 교회 사도들의 모습을 살펴보세요.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행5:42) 오늘 저와 여러분이 본받아야 할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까요? 오늘 한 영혼을 위해 수고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충신교회 박종순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어느 여자 교인이 등록을 했습니다. 얼굴은 창백했고, 눈은 안정감이 없었고, 말은 우둔했습니다. 큰 사업을 하는 남편이 30대 후반의 여자와 딴 살림을 차렸고, 아들 딸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50대 중반의 나이로 갱년기에 접어 들었습니다.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당신이 사는 길은 예수 밖에 없습니다. 남편에 대한 증오심이나 원한을 신앙으로 다스리십시오. 그리고 교회 중심으로 사세요.” 그로부터 6개 월 후, 목사님이 대전에 회의차 내려가다 갑자기 그 교인이 떠 올랐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대전에 도착해 회의를 마치고 교회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날 저녁 한 교인이 13층 아파트에서 투신 자살했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소스라쳐 놀랐습니다. 오후에 생각났던 그 교인이었습니다. 그 당시 핸드폰이 있었다면 안부전화하면서라도 용기를 줄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그 때는 그것이 불가능했었습니다. 박종순 목사님은 말합니다. “전도는 때가 있습니다. 기회는 항상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 문이 닫힐지 모릅니다. 지금 전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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