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배의 축복을 위하여2
창세기 26장 12-18
12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13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14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15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그 아비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
16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가라
17 이삭이 그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우거하며
18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 아비의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
포인트 워드: 경제부흥
활용: 하나님이 우리에게 잘되는 비결을 말씀하셨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100배의 복을 받을 수 있을까?
다같이 따라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영혼의 양식이며 영적 전쟁에서 무기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이삭은 100배의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7가지 복을 받았습니다. “100배의 축복, 창대의 축복, 왕성의 축복, 거부의 축복, 양과 소가 떼를 이루는 축복, 종이 심히 많은 축복, 원수를 이기는 축복”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이런 복을 받아야 합니다. 물론 박해받는 지역은 다릅니다. 북한이나, 중동, 인도 같은 지역은 예외겠지만, 한국의 성도들은 100배의 복을 받아서 나누고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신교회 교우들은 100배의 복에 도전해 보길 바랍니다.
우리는 일생을 살면서 많은 선택을 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가치관을 선택할 수 있고, 배우자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또한 직업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선택을 잘 하면, 별 어려움이 없이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3가지 중 하나라도 잘못 선택했다면 그 결과는 참담합니다. 부자와 가난한 것도 선택의 몫이다.
탈무드에서 말합니다. “돈은 자비롭지 못한 주인이지만, 돈만큼 훌륭한 하인도 없다.” “성공과 부요는 자신의 선택의 결과이다.” “돈의 노예가 되지 말고 돈을 노예처럼 부려라.” 어떤 사람들은 “가난해도 나는 좋아. 못살아도 나는 좋아.”라고 말한다. 본인 스스로 가난을 선택한다. 그러나 탈무드에서 가난한 것은 집안에 있는 50가지의 재앙보다 가장 나쁜 것으로 받아들인다.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빌게이츠는 말한다. “태어날 때 가난한 것은 당신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죽을 때에도 가난한 것은 당신 잘못이다”(If you born poor‚ it’s not your mistake. but if you die poor‚ it’s your mistake.)
어느 (김광선) 목사님은 말합니다. “가난은 우리와 사탄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무지의 합작품이다.” 가난은 절대로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오늘 이삭이 농사를 지어 100배나 수확을 거두는 영적인 비밀을 나누고자 합니다. 어떻게 이삭이 마침내 거부가 될 수 있었을까?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100배의 복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에게나 100배의 복을 주시지 않는다. 하나님이 누구에게 100배의 복을 주실까요?
첫째, 하나님은 축복의 씨앗을 심는자에게 주십니다.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창26:12)
창26장에서 이삭은 흉년의 시기에 씨를 뿌렸습니다. 흉년의 시기에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식량을 비축합니다. 모든 것을 아낍니다. 하루하루가 고통의 순간인데 농사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을 떠나 그랄 지방으로 내려갈 수 밖에 없는 시기인데, 씨앗을 심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100배의 수확을 얻게 되었습니다. 100의 수확은 뿌렸기에 거둘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습니다. 심을 때가 있고, 심을 것을 뽑을 때가 있다. 뽑는다는 말은 추수하는 것을 말한다. 씨를 뿌리면 반드시 추수할 날이 옵니다. 그러나 파종할 시기에 씨를 뿌리지 않으면 추수할 시기에 거둘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시편 126편 5-6절에서 말씀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126:5-6) 눈물을 흘리면서 씨를 뿌리지만, 추수할 때는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파종할 때는 울면서 뿌리지만, 추수할 때는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현재가 울고 있는 시기요, 눈물을 흘리는 시기라고 해서 뿌리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지금 겨울이라고 집안에 있으면 텔레비전만 보고 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추수할 때에 거둘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렙다 과부는 어떤가요? 가루 한 줌과 약간의 기름을 가지고 마지막 음식을 해 먹고 죽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 선지자가 떡을 요구합니다. 항아리의 바닥을 긁어 모은 밀가루로 빵을 만들어 주의 종을 대접했습니다. 그 결과는 흉년이 다하도록 통의 가루와 병에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복을 받았습니다(왕상17:12-16) 흉년의 시기라도 하나님께 심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심은데서 역사하시지 심지 않은데서 거두는 법이 없습니다. 심어야 거둡니다.
과부의 두 렙돈은 어떤가요? 과부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습니다. 부자는 금화를 넣었습니다. 액수면에서는 비교할 수 없는 돈입니다. 두 렙돈은 한 고드란트라고 합니다. 한 고드란트는 한 데나리온의 16분의 1일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 하루 품삯입니다. 요즘 10만원으로 하면, 우리나라 돈으로 6천원 정도입니다. 하루 일당을 7만원으로 하면 4천 3백원 정도입니다. 오천원을 드리고 부자보다 많은 것을 넣은 자라고 칭찬을 받았습니다.
심고 거두는 법칙은 만고불변의 법칙입니다. 절대로 변하지 않는 자연법칙이며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심지도 않고 거두고자 합니다. 뿌리지도 않고 수확을 하려고 한다. 여러분은 그렇지 않은가요? 기도하지 않고, 기적을 바라지 않나요? 심지도 않고 수확을 기다리지는 않은지요?
오병이어의 기적은 어디서 일어났나요? 한 어린이가 어머니가 싸준 도시락을 예수님께 바쳤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주기 시작했습니다. 한 어린이의 도시락이 하나님께 드려졌을 때, 기적을 일어났습니다.
우리 창고에 씨앗이 많아도 쓸모가 없습니다. 땅에 심었을 때, 싹이 나고 번성하여 창대의 복을 받습니다. 창고에 있는 씨앗은 심기기 전에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은행에 돈이 아무리 많아도 하나님께 드려지지 않으면 심은 것이 아닙니다. 축복은 반드시 심는 자의 것입니다. 100배의 수확은 씨를 심는 자의 것입니다.
예화) 기독공부에 나온 간증
어느 목사님이 40년 전에 부산에서 목회했다고 합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농촌에서 목회했는데, 집사님 부부를 잊을 수 없다고 합니다. 이들은 사업에 실패한 자들입니다. 농촌교회에 와서 충성하면서 부산 시내에 가서 소를 잡는 일을 했습니다. 이들 부부가 새벽기도를 드리고 드린 기도의 제목이 2가지 였다고 합니다. “첫째, 십일조 100만원씩 하게 해 주세요. 둘째, 교회를 세울 수 있게 해 주세요.” 소를 잡아 판매하는 일을 하면서 절대 주일이나 십일조를 빼뜨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몇 년이 못되어 이들 부부를 축복해 주셨습니다. 기도의 제목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건물을 사게 되었고, 한 층을 교회로 봉헌하게 되었답니다.
사업이 망한 가운데 다시 시작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요, 암담한 현실 앞에서 헌금 생활와 기도 생활을 바르게 하신 분도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반드시 축복해 주십니다.
잠언 11:24-25절입니다. “흩어 구제 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잠11:24-25) 구제하는 자가 부하게 된답니다. 남을 윤택하게 하면 윤택하게 하신답니다. 할렐루야! 이 비밀을 아셔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은 헛되이 심지 않는 자에게 주십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씨뿌리는 비유에서 길가에 뿌린 씨는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습니다. 밭에 심겨져 있지 않았습니다. 가시 밭에 뿌린 씨앗은 가시 때문에 자랄 수가 없었습니다. 길가와 같은 밭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좋은 종자를 가지고 길가에 뿌려도 싹이 나지 않고 열매를 전혀 거둘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좋은 땅에 심었을 때, 싹이 나고 열매를 맺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씨를 심으면서 하나님께 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심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책임져 줄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는 것은 전혀 하나님과 무관하기 때문입니다. 헌금도 감동이 있잖아요? 하나님의 감동이 있으면 하면 됩니다. 그런데 감동도 없는데 억지로 하면 절대로 안 됩니다. 헌금하고 복을 받지 못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마6:1)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헌금은 사람에게는 칭찬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축복은 받을 수 없습니다. 한국 교회에서 어떤 분들은 교회를 짓습니다. 그리고 목사님들을 자기 하인 부리듯이 합니다.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종이지 장로님의 종이 아니잖아요? 교회를 설립한 장로님의 말을 듣지 않으면 교회에서 내 보냅니다. 그 장로님이 사람들에게 칭찬은 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절대로 하나님께 칭찬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하늘의 상급이 없어요.
축복의 씨앗은 좋은 땅에 뿌려야 합니다. 농부들이 씨앗을 뿌릴 때, 조심스러운 것처럼 우리도 어디에 씨앗을 뿌릴 까 매우 신중해야 합니다. 비옥한 땅에 뿌리지 않으면 그 씨앗은 아예 자라지 않거나 자란다고 해도 별로 수확을 내지 못합니다.
교회와 선교가 무조건 좋은 땅은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존재하는” 교회나 선교단체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먹고 살기 위해 선교하는” 단체도 있습니다. 전자는 선교를 위해 돈을 모으지만, 후자는 돈을 모으기 위해 선교합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진리를 가르치고 설교하는 곳은 좋은 땅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메마른 땅이라면 좋은 땅은 아닙니다.
제가 예전에 들은 간증입니다. 이정희 강사님이 작은 교회에 헌금했는데, 하나님이 물질을 막으셨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교회를 도왔는데 본인이 대신 물질적인 어려움에 처한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응답은 이것입니다. “내가 그 교회를 물질적으로 연단하는데, 네가 도왔기에 어려움을 당한 것이다.” 저는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가난한 목회자를 돕는 것이 무엇인 문제인가? 그런데 그 목회자가 연단이 필요할 때는 좋은 땅이 아닙니다. 우리가 동정심에 의해 아무데나 심으려 하지 마세요. 좋은 땅을 찾기 위해 성령님께 기도하세요. 우리가 성장하면 수많은 단체에서 도움을 요구할 것입니다. 무조건 지원이 아니라,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좋은 땅에 심어야 30배, 60배, 100배를 거둘 수 있습니다.
딸 아이가 드린 헌금을 2교회에 보냈습니다. 한 분은 23년 동안 20여명과 목회하는 분이고, 한 분은 16년 동안 10여명과 목회하는 분입니다. 이들 모두 성령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누구의 도움이 없이 힘들고 어렵게 이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이들은 심령이 착합니다. 좋은 땅입니다. 비록 사역의 결실은 화려하지 않지만, 주의 종들의 심령이 좋은 땅이기에 딸 아이의 선교비를 드린 것입니다.
헌금은 사람에게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열매를 거두기 위해 드리는 것입니다. 아멘.
셋째, 하나님은 십자가의 삶을 사는 자에게 주십니다.
이삭은 그 자체가 좋은 밭이고 복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이삭은 아브라함에 번제물로 드리려고 할 때, 아버지에게 전혀 반항하지 않았다. 주경학자들은 이삭이 17세 정도라고 한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117세이다. 혈기 왕성한 아들이 힘으로 아버지를 이길 수 없었을까? 충분히 이기고도 남는다. 그런데 이삭은 순종하는 모습만 보일 뿐이다. 아버지가 번제에 쓸 땔감을 지라고 할 때도 순순히 지었다. 아버지가 묶을 때에도 가만히 있었다. 아버지가 칼을 빼서 죽이려고 해도 반항하지 않았다. 어떻게 이럴 수 있었을까? 아버지의 하나님을 믿은 것이다. 아버지를 믿은 것이다.
이삭은 자아가 깨어진 사람이다. 이삭은 예수님을 예표하는 분이다. 하나님 말씀에 100순종하는 예수님. 그 예수님이 바로 이삭이다.
현대의 신앙인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신앙인들의 심령이 좋은 땅이 아니다. 돌밭이나 가시떨기 밭이다. 돌밭은 견고한 심령이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서 견고한 것이 아니라, 자기 중심적이다. 자기 생각, 자기 고집으로 뭉쳐 있다. 예수님 생각, 성령의 생각으로 뭉쳐있으면 좋다. 그러나 너무 견고하여 말씀이 들어가지 않는 자들이 있다.
하나님은 돌덩어리 같은 심령을 사용할 수 없다. 깨뜨려야 한다. 바싹 부셔버려야 한다. 나를 없애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
“렘23:29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신앙인들이 좋은 땅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한다. 자기가 하나님이다. 자기가 판단자이다. 자기만 옳다고 생각한다. 나의 생각, 나의 이론, 나의 신학 마져도 깨뜨려야 한다. 생각해 봐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는 것이 이성적인가? 100세에 얻은 아들을 어떻게 제물로 바치는가? 이방 종교들처럼 인신봉양을 하는가? 하나님은 절대 그런 분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요구했을 때, 아브라함은 어떻게 하는가? 이삭은 어떻게 하는가? 하나님 음성에 순종한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 자식을 죽이라고 하지는 않지만, 내 생각이나 내 경험을 초월하여서 역사하신다. 내 생각 속에 하나님을 제한하지 말자. 내 지식이 전부라고 말하지 말자. 오직 하나님만이 선하시고 성경 말씀만이 선하다.
이삭은 자아가 깨어진 사람이었다. 모리아 산에서 그는 죽은 자였다. 그래서 이삭은 좋은 땅이다. 그래서 그가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하시고, 그가 가는 곳마다 승리하게 하셨고, 그가 가는 곳마다 살아계신 증거를 보여 주었다.
십자가의 길, 순교자의 삶
“내 마음에 주를 향한 사랑이/ 나의 말에 주가 주신 진리로/ 나의 눈에 주의 눈물 채워 주소서.
내 입술에 찬양의 향기가/ 두 손에는 주를 닮은 섬김이/ 나의 삶에 주의 흔적 남게 하소서.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히 함께 하리/ 십자가의 길을 걷는 자에게/ 순교자의 삶을 사는 이에게.
조롱하는 소리와 세상 유혹 속에도/ 주의 순결한 신부가 되리라/ 내 생명 주님께 드리리/
내 생명 주님께 드리리.
예수님의 십자가가 왜 위대한가?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 이후를 아셨기 때문이다. 십자가 이후의 부활과 영적 승리를 아셨다. 십자가가 부끄럽고 추한 것이고, 고통스런 것이지만,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아셨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12장 2절이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9-11)
우리가 100배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받을 자격이 주어져야 한다. 우리의 심령이 좋은 땅이 되어야 하나님께서는 축복을 주신다. 많은 목사님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다. “목회를 해 보면, 복을 받을 사람과 복을 받지 못할 사람이 보인다.”는 것이다. 복 받을 사람은 믿음 생활이 다르다. 그러나 복을 받지 못할 사람은 복받지 못할 행동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자. 이번 기회에 나를 바꾸어 내자, 내 자신을 십자가 앞에 쳐서 복종하자. 나로 살지 말고 성령으로 살자.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마음껏 역사하도록 나를 깨뜨리자.
이제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우리가 아는 이삭은 확실히 축복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우리가 이해할 수 할 수 없습니다. 모리아 산에서 순종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 힘써 팠던 우물들을 빼앗기고도 싸우지 않는 것, 부인을 빼앗기고도 싸우지 않는 것. 참 바보 같은 모습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셔서 100배의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보 이삭에게 창대의 복, 왕성의 복을 주셨습니다. 마침내 거부의 복을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잘난 사람, 똑똑한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사람을 말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예 하는 사람을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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