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이 좋아요
요한계시록 21:1-4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포인트 워드: 천국
활용: 우리의 궁극적인 신앙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버지가 예비해 놓으신 그 곳에 들어가야 한다. 그곳이 우리가 가야할 마지막 목적지이다.
죽는 순간이 불행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볼테르는 죽을 때까지 기독교인을 철저하게 경멸하는 무신론자였습니다. 그가 죽을 때 한 말입니다. “나는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하였다.” 그의 죽음을 지켜 보던 간호사는 말합니다. “유럽의 부를 다 준다 해도 결코 임종하는 무신론자의 침대 곁에는 가고 싶지 않습니다. 너무나 무시무시한 경험이었습니다.”
어느 교회 집사님이 죽을 때, 철제 침대가 1m 뒤로 물러나 있었다. 귀신들이 자기를 데리러 온 것을 본 것이다. 이 분은 기도시간이면 눈을 뜨고 주변을 살피는 분이었다. 진심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 마지 못해 교회 왔던 분이다.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 아니었다. 죽는 순간이 두렵고 무서움에 떨다가 죽었다.
사람은 죽을 때가 진실해 진다. 이 세상의 모든 것과 작별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백만장자였던 제이 골드는 죽을 때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은 나일 것이다.” 비컨 스필드는 명예와 지위를 다 누린 사람이었지만 그가 죽을 때 말했다. “젊을 때는 실수 투성이였고 중년에는 투쟁뿐이었고, 이제 늙으니 후회뿐이다.”
이 사람들의 가장 공통된 특징은 인생을 비참하게 마친 자들이다. 천국에 들어가는 소망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 믿기를 거부하고 죽은 사람은 불행한 사람들이다. 이와 반대로 죽는 순간에도 행복을 선물하는 사람이 있다. 주기철 목사님은 잔혹한 일본경찰의 고문으로 죽어가면서도 노래했다.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슬픈 일을 많이 보고 늘 고생하여도 하늘 영광 밝음이 어둔 그늘 헤치니 영광 나라 계신 임금 우리 구주 예수라” 성경학자 메튜 헨리는 평생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며 성경을 연구하며 천국을 바라보며 살았다. 그가 임종이 다가왔을 때, 그의 친구 일라그씨에게 말했다. “하나님을 섬기며 교제했던 삶이야 말로 이 땅에서 살았던 사람에게 가장 편안하고 기쁜 삶이었다네.”
전라북도 황등에 황등교회가 있다. 내 고향 교회이다. 봉기성 장로님이 계셨는데 친구 아버지시다. 이 분이 죽기 전에 중보기도를 부탁했다. “하늘 문이 안 열렸다.” 임종 직전에 유명한 말을 하고 돌아가셨다. “하늘 문이 열렸다.” 천사들이 내려오는 모습을 보고 운명하셨다. 어떤 분은 두 손을 들고 “할렐루야!”를 부르고 운명하신 분도 있다.
천국을 믿는 믿음이 아니면 어떻게 행복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은 우리의 본향 집, 우리가 돌아갈 영혼의 고향 천국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천국은 확실히 있다.
많은 사람들이 천국과 지옥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여호와 증인 같은 경우는 영혼 소멸설을 믿는다.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언젠가는 소멸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천국과 지옥을 믿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지옥을 만들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다고 말씀한다.
누가복음 16장에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가 나온다. 부자는 자색옷을 입고,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잔치를 즐겼다. 부자 집 앞에 거지 나사로는 부자의 상에서 나오는 음식으로 배부르게 생활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들이 죽자 부자는 지옥에 나사로는 천국에 들어 갔다.
눅 12장에는 어리석은 부자가 나온다. 그는 풍성한 수확을 보고서, 이렇게 생각한다.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지으리라.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이제는 평안히 쉬고 먹고 즐기리라.” 그런데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눅12:20)
예수님은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땅에 보물을 쌓아 두지 말라. 천국에 보물을 쌓아 두라. 지옥은 마귀와 그 추종자들을 위해 준비해 놓은 곳이다. 그런데 그 곳에 불순종한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이 간다. 예수님은 아무도 멸망치 않고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천국과 지옥은 100% 존재한다. 지금 이스라엘에 성지 순례를 가보라. 예수님의 역사적인 분임을 증명하고 있다. 고대 유적지를 발굴하면서, 성경 속의 기록이 사실임을 증명한다. 베들레헴이나, 예루살렘이나, 나사렛, 사마리아 지역도 가보라. 성경 속 인물들과 그들의 집과 삶이 사실이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목사님들 가운데 천국과 지옥을 믿지 않는 분들이 있다. 예수님은 지옥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예수님을 믿는 것을 이 땅에서 종교적으로 위안과 평안을 얻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 불교나 유교처럼, 예수님도 사람들이 만들어낸 종교라고 생각한다. 엄청난 착각이다. 지금도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성도들을 위해 천국을 준비해 놓으셨다.
요한복음 14:2-3절이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2-3)
천국과 지옥은 꼭 있어야 한다. 공의의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을 위해 축복의 공간을 준비해 놓으셨다. 불의를 행하고, 죄를 짓는 자들을 위해 지옥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 땅의 삶이 전부라면, 억울하게 죽은 이들이 있고, 특히 복음을 전하다 죽은 자들은 억울하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님 때문에 고난을 당한 자들에게 하늘의 상이 크다고 말씀하셨다.
둘째, 천국에는 스트레스가 없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21:4)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로 이 땅의 삶은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나는 삶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세상 근심을 지고가는 사람들에게 자유와 기쁨을 주기 위함이다. 세상 사람들은 무거운 짐을 지고 간다. 죄의 짐, 자녀의 짐, 물질적인 고통의 짐, 인간 관계의 짐. 일생 동안에 죄로부터 자유한 자가 있는가? 일생동안 건강을 장담할 사람이 있는가? 아프지 않는다고 장담할 사람이 있는가? 없다. 건강을 자신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암에 걸려 죽거나 고통을 당한다.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삼성의 이병철 회장도 이건희 회장도 현대 그룹의 정주영 회장도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것을 놓고 떠나갈 수 밖에 없다.
① 우선 천국은 눈물이 없는 곳이다. 하나님은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겨 주신다고 하신다. 우리는 질병 때문에 울고, 물질 때문에 운다. 어떤 사람은 가정 문제 때문에 운다. 젊은이들은 취업 때문에 울거나 결혼 때문에 운다. 이 땅은 눈물이 끊임없이 흐르는 곳이다.
제자들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사도 요한은 밧모 섬에 유배된 가운데 요한계시록을 쓰고 있다. 슬픔의 현장, 고통의 현장에서 하늘의 영광을 쓰고 있다. 당시 예수님을 믿는 수 많은 사람들의 고난을 요한은 알았다. 불태워 죽이거나, 기름 가마에 던져 죽였다. 사자 굴에 집어 넣거나 감옥에 집어 넣었다. 로마 황제는 난폭한 자들이었고, 신앙인들은 호랑이 앞에 토끼 같이 연약한 존재들이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죽음과 싸우면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눈물을 흘려야 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었고, 세례 요한은 목베임을 당했다. 베드로는 거꾸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임을 당했다. 로마의 카타콤이나 터키의 갑바도기아는 이들의 순교 정신을 여실히 보여 준다. 북한의 동포들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 때문에 정치범 수용소에 갇혀서 고생을 한다
어느 탈북자의 간증이다. 정치범들이 있는 곳인데 이들은 하나같이 벌거벗고 있었다고 한다. 외계인 모양이라고 한다. 벌거벗은 몸에 고무 판을 달고 일을 했다. 그들의 모양이 외계인 같다는 것은 그들이 고된 노동으로 척추가 녹아져 있었다. 이들은 땅만 바라보며 굽은 허리를 가진 채 살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 기독교인들 10여 명의 온 몸에 쇳물을 부어 태워 죽이기도 했다고 한다.
2000년 전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북한 땅에서 일어나는 기독교인들의 박해는 상상 이하이다. 초대교회나 지금 박해받는 기독교인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살아가고 있다. 순교의 눈물을 흘린 자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영광의 면류관을 얻게 될 것이다.
우리는 여러 가지 눈물을 흘린다. 물질이 없어서 애통하면 운다. 병원비가 없어 치료를 중단해야 하는 사람은 손톱으로 벽을 긁은 사람도 있었다. 병든 몸 때문에 우는 자들도 있었다. 속 썩이는 자식 때문에 눈물 흘리는 부모도 있다. 직장을 잃었기에 건강을 잃었기에 어쩔 수 없다고 절규하면서 애통해 하는 자들도 있다. 모든 슬픔과 고통으로 인해 흘리는 눈물이 이 땅에는 많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겨 주시리라.”
신앙인의 삶도 눈물이 없이는 갈 수가 없다. 편하게 대접받으며 가는 길은 십자가의 길이 아니다. 좁은 길은 길이 협착하기에 찾는 이가 적다. 그러나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은 넓은 길이며 찾는 자들이 많다. 세상과 짝하며 예수님을 믿는다. 그러나 그 결과는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다.
복음 성가 ‘영문밖의 길’이다. 새찬송가 158장이다.
“눈물없이 못가는 길 피 없이 못 가는 길
영문밖의 좁은 길이 골고다의 길이라네
영생의 복 얻으려면 이 길만은 걸어야 해
배고파도 올라가고 죽더라도 올라가세.”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위해 흘리는 눈물이 진짜 눈물입니다. 예수님은 그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히브리서 2:18,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② 천국은 사망이 없다.
누구나 한 번은 죽는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일이다(히9:27). 천국에는 다시 사망이 없다.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매 년 29만 명이 죽습니다. 하루에 800명입니다. 2018년 289,820명
2019년 295,110명 2020년 307,884명이다. 1998년도 자료를 보니, 뇌혈관 사망자는 34,355명, 심장 질환 17,950명, 교통사고 11,957명이었다. 자살한 사람도 9,569명이다.
한국은 경제가 세계 10위입니다. 우리나라 경제 규모가 아프리카 대륙 전체보다 더 많습니다. 국가의 무력은 세계 6위입니다. 물질적인 풍요와 경제적인 성장은 발전했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공허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없는 인생은 공허합니다. 성령님을 만나지 못한 인생도 공허합니다.
기독교인들이 자살합니다. 가장 불쌍합니다. 천국에 가야지 왜, 예수 믿는 자들이 지옥에 가나요? 말씀을 잘못 배워서 그렇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말합니다.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
천국에는 사망이 없습니다. 죽는 것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이 없습니다. 영원이 소멸되지 않습니다. 한번 천국에 가면, 영원히 주님 나라에서 왕노릇 하며 살게 됩니다. 어떻게 해든 우리는 천국에 가야 합니다. 성경은 좁은 길로 들어가라고 말씀합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자가 천국에 간다고 말씀합니다. 말씀을 바르게 배워야 합니다.
요한복음 4장 14절입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 천국에는 생명수가 있고, 생명나무가 가득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그 곳에 가야 합니다.
③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습니다.
사람을 괴롭히는 것이 애통입니다. 온갖 고통과 걱정, 염려와 불안, 두려움 절망입니다. 우리가 나의 한계 상황을 경험하면, 절망합니다. 애통합니다. 곡하게 됩니다. 도저히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맞이하면, 걱정하는 것이 우리 모습입니다.
우리 인생은 우리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건물 인테리어 할 때가 떠오릅니다. 그때는 창문을 다 떼어 놓았습니다. 페어 창문으로 지금보다 더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 창문들이 내게 넘어지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다행히도 옆 사무실 사람이 와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때, 나는 깔려 죽던지, 아니면, 유리창을 버리고 와장창 깨지게 하던지 선택해야 했습니다.
천국에는 인간의 한계를 능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곳은 고통과 걱정이 전혀 없습니다. 불안과 염려가 완전히 사라지고 두려움도 절망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안에서 가능한 것만 있습니다. 천국의 간증자들은 이런 말을 합니다. 천국에서 이동할 때는 순간 이동이 가능하답니다. 생각만 해도, 보고 싶은 성도가 내 앞에 오던지, 그곳으로 옮겨진다는 것입니다.
셋째, 천국은 우리의 본향입니다.
우리의 본향은 천국입니다. 우리의 몸은 이 땅에 살지만, 우리의 영혼은 천국에서 왔습니다. 부모님은 육신의 부모이지만, 우리 영혼은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우리는 태초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예정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우연하게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속에 있었습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1:4-5)
예전에 우리는 제비 집을 많이 보았습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면, 제비들이 돌아와서 같은 둥지 안에 알을 까고 기릅니다. 여름이 되고 가을이 되면, 새끼들을 데리고 멀리 동남아시아나 호주 남태평양 따뜻한 나라고 갑니다. 거기서 겨울을 보내고, 이듬해 봄이 되면, 정확하게 자기가 태어나고 살던 처마 밑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연어는 어떤가요? 보름 정도 자신이 태어난 물가에서 움직이다 그후에는 북태평양의 수천 만리 길을 헤엄쳐 다닙니다. 자신이 태어난 그 물가의 물맛을 기억하고, 알을 산란하기 위해 다시 그곳으로 물살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곳에서 산란을 하고 죽습니다. 연어는 늘 마음 속에 고향을 그리워하고 살기에 언젠가는 자기 고향으로 찾아갑니다.
제비와 연어는 자기가 태어난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귀소본능이 있습니다. 한문으로 수구초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우가 죽을 때는 고향쪽을 머리를 둔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돌아갈 고향은 새 하늘과 새 땅에 펼쳐져 있는 아름다운 곳입니다. 그곳에는 수정같은 맑은 생명수가 흐릅니다. 달마다 열두 과실이 열리는 실과나무가 있습니다. 그 나무 잎사귀는 만국을 소성케 하는 치료제가 됩니다. 무엇보다 그곳에는 빛나는 면류관과 세마포를 가지고 우리를 맞아 주시는 예수님이 계신 곳입니다. 그 곳이 바로 우리가 돌아갈 고향입니다.
“괴로운 인생길 가는 몸이
평안히 쉬일 곳 아주 없네
걱정과 고생이 어디는 없으리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
날 구원하신 주 모시옵고
영원한 영광을 누리리라
그리던 성도들 한 자리 만나리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
사랑하는 여러분,
천국은 좋은 곳입니다. 천국은 실제 합니다. 눈물이 없는 곳, 사망이 없는 곳,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는 곳입니다. 우리의 본향입니다.
이제 부탁합니다. 성경은 교회에 나오는 모든 사람이 천국 간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천국을 사모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그 날은 반드시 옵니다.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들도 모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 날을 아십니다.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마25:13)
일기예보에서 태풍을 예측합니다. 집중 호우를 예측합니다. 그런데도 개울가에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다 119의 도움을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비가 오는데 등산을 해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꼭 하지 말라고 하는데,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태풍이 온다면, 준비해야 지요? 비가 온다면 바람이 분다면, 날아갈 수 있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 그런데 꼭 기상청의 예보를 무시하다 목숨을 잃거나 다치는 분들이 있습니다. 태풍 주의보, 호의주의보, 한파 주의보, 미리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 다시 오십니다.
주님 오실 날을 준비하는 성도는 게으름과 소홀함을 없애야 합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어 천국에 넉넉히 들어갈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