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을 극복하라
느헤미야 4:1-6
1 산발랏이 우리가 성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유다 사람을 비웃으며
2 자기 형제들과 사마리아 군대 앞에서 일러 말하되 이 미약한 유대 사람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스스로 견고하게 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일을 마치려는가, 불탄
돌을 흙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는려는가
3 암몬 사람 도비야는 곁에 섰다가 가로되 저들의 건축하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
4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 원컨대 저희의 욕하는 것으로 자기의 머리에 돌리사 노략 거리가 되어 이방에 사로잡히게 하시고
5 주의 앞에서 그 악을 덮어두지 마옵시며 그 죄를 도말하지 마옵소서 저희가 건축하는 자
앞에서 주의 노를 격동하였음이니다 하고
6 이에 우리가 성을 건축하여 전부가 연락되고 고가 절반에 미쳤으니 이는 백성이 마음들여
역사하였음이니라
포인트워드: 시련극복
활용: 우리 삶에 닥치는 시련과 연단을 극복하자.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경험하는 것은 언제나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호사다마’라는 말도 있습니다. 좋은 일에는 시련이 따른다는 말입니다. 고진감래라는 말도 있습니다. ‘고생을 다하면 좋은 날이 옵니다.’
어느 물리학자가 말합니다. “모든 우주의 법칙은 저항의 법칙이다. 비행기의 원리는 공기의 저항으로 인해 물체가 뜬다는 것이다. 공기의 저항이 없으면 물체가 뜨지 않는다. 높이 날수록 공기의 저항은 심하고 공기의 저항이 심할수록 비행기는 부력이 생겨 높이 난다. 배의 원리도 저항의 원리이다. 배가 물위를 지나갈 때 물이 저항한다. 그러나 그 저항보다 큰 추진력이 있으면 배가 간다. 물의 저항이 많을수록 배는 빠르게 간다”.
인생의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모든 삶은 저항과 함께 발전합니다. 저항없이는 발전도 없고 저항없이는 변화도 없습니다. 토인비는 “역사는 도전과 응전이다. 도전이 없는 곳에는 멸망이 있다”고 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다. 모세가 출애굽할 때, 바로는 방해를 했다. 한 번의 재앙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10번의 재앙을 경험하고서야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 보낼 수 있었다. 사실 한 번의 재앙도 견디기 힘든 것이다. 그러나 바로는 10번의 재앙을 경험하면서 까지도 모세를 추격했으니 그 저항의 힘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습니다. 한 영혼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10번의 재장도 경험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슬퍼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왕의 허락으로 예루살렘 총독으로 부임합니다. 성벽을 재건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무너진 성벽 재건을 위해 노력을 하는데, 방해꾼이 등장합니다. 산발랏과 도비야입니다.
산발랏은 그 당시 사마리아 총독입니다. 도비야는 암몬 사람입니다. 이들이 방해꾼의 중심인물입니다. 7절에 보면, 그 세력이 확장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이 중수되어 그 퇴락한 곳이 수보되어 간다함을 듣고 심히 분하여 다 함께 꾀하기를 예루살렘으로 가서 쳐서 요란하게 하자 하기로”(느4:7-8)
반대자들을 지리적으로 볼까요? 산발랏은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사마리아는 예루살렘의 북쪽입니다. 도비야는 암몬 사람입니다. 암몬은 예루살렘 동쪽입니다. 아스돗은 지중해 연안의 도시입니다. 예루살렘 서쪽입니다. 아라비아는 예루살렘 남쪽입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의 사람들이 모두 성벽 재건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런 상황에 처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잘나가던 사람이 갑자기 경쟁자가 생겨 사방에서 공격해 옵니다. 한참 직장 생활 잘하는데, 몇 사람이 유언비어를 터트리며 곤란에 빠지게 한다면 어떻게 할까요? 사명을 잘 감당하는데, 갑자기 이런 저런 사람들이 말을 만들고 모함하고 괴롭힌다면 어떻게 할까요?
신앙은 반응입니다. 우리가 비난을 받는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까요? 우리가 똑같이 비난하고 당을 짓는다는 그들과 똑같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그들을 비난하기 보다, 왜 이런 비난을 받게 하실까?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만약 정당하지 않은 비난이라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정당한 비난이라면, 나를 바꾸어내야 합니다. 오히려 회개하며 나아간다면, 좋을 것입니다.
첫째, 방해를 받는 이유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산발랏이 우리가 성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유다 사람을 비웃으며”(느4:1)
방해꾼인 산발랏이 느헤미야를 방해하는 이유는 딱 한가지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을 건축한다.” 느헤미야가 싫은 것이 아닙니다. 인격의 문제도 아닙니다. 예루살렘 성벽 재건 자체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왜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 문제가 될까?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이며 거룩한 성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산발랏의 방해 이유는 역사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2개의 큰 도시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남쪽의 예루살렘과 북쪽의 사마리아였습니다. 예루살렘은 남유다의 수도였고, 사마리아는 북 이스라엘의 수도였습니다. 문제는 이 도시가 끊임없이 역사의 정통성을 놓고 다투어 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의 서울과 평양과 같습니다. 우리는 서울이 조선왕국 500년의 도읍지라고 말하지만, 북한은 평양이 고조선, 고구려, 고려의 중심지라고 말합니다. 누가 더 정통성이 있고 누가 더 역사성이 있습니까?
예루살렘이 다윗 이래로 이스라엘의 도읍지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예루살렘은 아브라함 시대에 살렘왕 멜기세덱이 나올 정도로 오래된 도시였습니다. 지금으로부터 6000년 전에 있던 도시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도 만만치 않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자기들이 사는 그리심을 아예 지구의 중심으로 생각합니다. 노아 홍수가 머문 곳도 그리심 산이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곳도 그리심산이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 산 곳도 세겜이요, 야곱이 70명의 식구들을 데리고 애굽으로 간 곳도 세겜입니다. 곧 사마리아입니다. 그들은 유대인보다 훨씬 더 원형적인 율법을 아론으로부터 직접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사마리아 오경입니다.
역사적인 이유로 사마리아 총독인 산발랏은 예루살렘 총독으로 부임한 느헤미야를 환영할 수가 없었습니다. 두 도시의 운명은 역사적으로 항상 가렸습니다. 예루살렘이 잘 되면, 사마리아가 약해지고, 사마리아가 잘 되면, 예루살렘이 약해졌습니다. 두 도시는 영원한 경쟁자였습니다.
경쟁심이 문제입니다. 언제나 관계를 깨뜨리는 것이 경쟁심입니다. 사람을 저속하게 만드는 것도 시기심입니다. 경쟁심으로 인해 사람을 분발하게 하기도 하지만, 경쟁심으로 인해 작은 것을 이루고 큰 것을 잃게 됩니다. 소탐대실입니다.
우리 시대는 모두가 경쟁의 시대입니다. 국가 경쟁력, 교육 경쟁력, 시장 경쟁력, 심지어 교회들도 서로 경쟁을 합니다. 우리 시대에 잘 나가는 사람은 경쟁을 잘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경쟁을 통해 어떤 목적을 이룰 수는 있지만, 그 과정에서 잃는 것도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취를 이룰 수는 있지만, 성공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실적은 얻을 수 있지만, 사람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돈을 벌 수는 있지만, 사람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뜻을 이룰 수는 있으나, 하나님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경쟁은 언제나 상대방이 안 되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이 잘 되고 나도 잘 된다면 좋은데, 그런 경쟁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경쟁은 상대방의 불행을 전제로 하고, 나의 행복을 목표로 합니다. 경쟁이 가져다 주는 목표는 오직 나의 승리 때문입니다. 경쟁 속에서 상대방에 대한 연민이나 배려를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상대방을 배려하고는 내가 승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경쟁의 비극은 그 속에 시기심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입니다.
경쟁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끊임없이 사람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늘 경쟁자만 쳐다보기 때문에 사람의 행동 하나 하나에 따라 감정이 변합니다. 상대방이 잘하면 내가 울고, 상대방이 실수하면 내가 웃습니다. 토끼와 거북이를 보면 압니다. 토끼는 거북이를 바라 보았습니다. 거북이는 토끼를 본 것이 아니라, 정상을 바라 보았습니다. 거북이의 목표는 깃발에 빨리 도착하는 것이었고, 토끼는 거북이를 이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거북이가 늦게 가자, 잠을 청했던 것입니다. 결국 거북이와 경쟁한 토끼는 게임에서 졌고, 깃발을 향해 자기와 싸운 거북이는 승리했습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과 원균의 차이를 아십니까? 이순신 장군은 평생 조국을 바라보았고, 백성들의 생명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러나 원균은 이순신을 보고, 경쟁하였습니다. 그 차이가 충신과 간신의 차이를 만든 것입니다.
아벨과 가인의 차이가 있습니다. 아벨은 하나님을 보았고, 가인은 아벨을 보았습니다.
그 차이가 순교자와 살인자를 결정지었습니다. 사울왕과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바라 보았고, 사울은 다윗왕을 바라보았습니다. 사울은 평생 다윗을 추격하고, 다윗은 하나님을 앙망하며 살았습니다. 그 차이가 성공한 왕과 실패한 왕을 만들었습니다.
음악사에 모차르트와 살리에르가 있습니다. 살리에르는 오스트리아 제국 황제의 총애를 받는 궁정 음악가였습니다. 작곡가로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모차르트가 등장하고 나서, 그를 질투하고 시기합니다.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모차르트를 시기하닥 본인을 죽임으로 몰아갑니다. 살리에리 증후군이란 말도 있습니다.
경쟁의 가장 큰 문제점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으니, 하나님이 그리신 큰 그림을 보지 못합니다. 지금 산발랏의 머리 속에는 예루살렘 재건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다만 느헤미야를 향한 시기심으로 가득찼습니다. 어떻게 하건, 느헤미야만 이기면 끝난다고 생각했습니다. 느헤미야를 통해 큰 뜻을 이루어갈 하나님을 생각지 않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기와 경쟁심은 나를 죽이고, 하나님을 뜻을 거역합니다.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둘째, 우리는 방해의 원인은 분노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경쟁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1절에 분노라는 말이 있습니다. ‘크게 분노하여“ 7절에도 나옵니다. ”심히 분하여“(very angry) 느헤미야를 방해하던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자리잡은 감정이 분노였습니다. 겉으로는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을 재건한다는 이유 때문에 반대했지만, 더 깊은 곳에서는 느헤미야에 대한 분노가 있었습니다. 방해의 근본적인 뿌리는 분노였습니다.
왜 산발랏은 느헤미야에 대해 분노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분노의 감정을 막아야 합니까?
혈기의 감정을 제어하는 자는 능력자입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은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은 자기의 영광이니라”(잠19:11)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찌니 그 행위를 본받아서 네 영혼을 올무에 빠칠까 두려움이니라”(잠22:24)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16:32)
분노의 감정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달라스 윌러드는 남캘리포니아 철학교수입니다. 그가 분노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분노는 우리 의지가 방해받을 때 우리 안에는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충동적인 감정이다. 그리고 분노안에는 자기 의와 자기사랑이 있다”. 달라스 윌러드 교수에 의하면, 분노는 다른 사람이 나의 의지를 꺾거나 훼방하였을 때, 그것에 대한 반사 작용으로 일어나는 감정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설명하면 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영토가 있습니다. 그 영토 안에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생각, 욕심, 자랑거리, 미래, 꿈 등. 그런데 그 영토 안에 어떤 사람이 들어 옵니다. 그 영토를 침범하고 유린합니다. 처음에는 지켜만 봅니다. 그 침범이 계속되면, 항의하고, 항의가 통하지 않으면, 자기 영토를 지켜야 하기에 화를 낸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 화는 정당화됩니다. 자기를 지키는 본능적인 수단이 화입니다.
사람들이 화를 낸다는 것은 자기 안에 지킬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자기 것을 빼앗긴다고 생각하면 화를 냅니다. 아니면, 자기 것이 남의 것보다 좋은데 지킬 자신이 없을 때도 화를 냅니다. 결국 사람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자기 자신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장 옳다는 생각 때문에, 자기에 대한 지나친 연민과 사랑이 뿌리입니다.
자기 마음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산발랏이나, 도비야는 자기 마음속에 분노의 감정을 가졌습니다. 폐허가 된 성읍이 다시 재건된다고 하니 화가 난 것입니다.
우리 안에 내 옮음이 가득하면 화를 냅니다. 그런데 영적반응을 해 보세요. “내가 틀렸고 당신이 맞습니다.” 나의 옮음을 내려 놓을 때, 우리는 분노의 함정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화를 낼 이유가 없습니다. 마귀에게 속지 않게 됩니다.
이 땅에서 선하고 옳은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입니다. 그 외의 사람은 누구나 실수하고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옳지 않습니다. 자기 옳음을 버리는 순간, 우리는 감정을 통해 공격해 오는 악한 영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산발랏과 도비야, 아라비아 사람들, 암몬 사람들 아스돗 사람들이 분노한 것은 예루살렘 성이 재건된다는 말 때문입니다. 본인들의 성이 더 발전하고 확장되어야지, 예루살렘의 재건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분노 속에는 악한 영의 계획을 봅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교회가 부흥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교회가 세워지고 확장되는 것은 영혼을 구원한다는 것이요,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기 때문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나라는 수많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확장되었습니다.
셋째, 우리는 비방과 원망을 경계해야 합니다.
분노의 감정을 벗어나지 않으면, 그 분노로부터 나쁜 것들이 나옵니다. 2절을 보세요. “자기 형제들과 사마리아 군대 앞에서 일러 가로되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의 하는 일이 무엇인가 스스로 견고케 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필역하려는가 소화된 돌을 흙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느4:2)
분노의 감정 속에서 비난과 비방, 무시하는 말들을 했습니다. 그들의 입에서 나쁜 말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3절에서 도비야는 조롱하는 말, 저주의 말을 퍼 붓습니다. “그들이 건축하는 돌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느4:3)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쓰는 모든 말은 우리 속에서 나오는 것임을 아시지요?
모든 말은 마음에 가득한데서 나오고, 모든 나쁜 말들은 처리되지 않은 분노의 감정에서 나옵니다. 잠언 18:21절입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잠18:21)
우리 안에 분노의 감정에서 나오는 것들이 우리를 더럽고 추하게 만들어 갑니다.
로마서 3:13-14,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니”. 혀가 아무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혀는 다만 마음의 통로라는 것입니다. 속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단 밖으로 나오면 사람에게 둘 중 하나의 힘으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살리든지, 죽이든지.
산발랏의 말을 보세요. “미약한 사람들” “스스로 견고케 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필역하려는가?” “소화된 돌을 흙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산발랏의 말은 부정적이요 죽이는 말들입니다. 잠언의 말대로 칼로 찌르는 말입니다. ”칼로 찌름 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잠12:18)
왜 그렇게 칼로 찌르는 말만 합니까? 자기 속에 칼이 있기 때문입니다. 속에 있는 것이 나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발 부탁입니다. 남을 저주하지 맙시다. 성경은 남을 저주하면, 그 저주가 자기에게로 돌아간다고 말씀합니다. “저가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축복하기를 기뻐 아니하더니 복이 저를 멀리 떠났으며 또 저주하기를 옷 입듯 하더니 저주가 물 같이 그 내부에 들어가며 기름 같이 그 뼈에 들어 갔나이다”(시109:17-18)
우리 신앙인들을 방해하는 것은 2가지 통로로 옵니다. 분노와 나쁜 말들입니다. 이 두 가지를 통해 오는 결과는 낙심입니다. 이것은 100% 마귀의 속삭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이런 방해 앞에 믿음으로 나가 싸워 승리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이들의 방해를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과 상종하지 않습니다. 말되 되지 않는 그들과 말싸움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승리를 원합니다.
어떤 크리스쳔 상담가의 말한대로 “열번의 상담보다 한번의 기도가 더 힘이 있습니다“. 상담은 사람의 말이고 기도는 하나님의 말이기 때문입니다. 시련속에서 그는 하나님이 끝내 이기게 할 것을 믿었습니다. 영국 속담처럼 “평온한 바다는 유능한 뱃사람을 만들지 못하는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도 때로는 넘어질 수 있으나 하나님이 최후승리하게 할 것을 믿었습니다. 시련을 당할 때 하나님이 더 가까이 계시고 더 도와주심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C.S. 루이스가 말한대로 “우리가 기쁨속에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속삭이신다. 그러나 우리가 고통속에 있을 때 하나님은 크게 외치신다”라는 말을 믿었습니다. 그에게 다가온 시련과 고난은 잠시지만 하나님의 승리는 영원하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데이비드 L. 웨더포드가 말한대로 그는 “도전에 직면했을 때 빠져나갈 길을 찾지 말고 뻗어나갈 길을 찾을 것”을 결심했습니다. 낙담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기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과 기도가 최후 승리의 능력입니다. 천로역정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기독도가 한 방으로 들어갔는 데 한 쪽에 벽난로가 있고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벽난로 옆에 서서 그 불길을 끄기 위해 많은 물을 끼얹고 있었지만 불은 꺼지지 않고 계속 타고 있었습니다. 기독도가 곁에 있는 안내자에게 이것이 무슨 뜻이냐고 묻자 “저 사람은 마귀인데 마귀는 네 삶의 불을 끄기 위해 부지런히 물을 끼얹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꺼지지 않는 이유가 있다“. 그러면서 그를 벽 뒤쪽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거기에는 한 사람이 손에 기름통을 들고 끊임없이 기독도의 난로에 기름을 붓고 있었습니다. 가까이 가서 그 이름을 보았더니 그가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시련과 반대와 방해가 많은 세상에서 여전히 우리의 기름통에 기름을 부으면서 기도하고 중보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예수님입니다. 그가 하늘 우편에서 오늘도 저와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 분이 하늘에 있는 한 우리는 두려워할 수 없습니다. 시험을 당해도, 넘어져도, 어려움이 와도 우리가 낙심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