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믿음을 회복하라
히브리서 11장 1-3절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니나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포인트 워드: 믿음
활용: 믿음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믿음이 기초한 신앙을 해야 한다. 믿음이 큰 사람이 되자.
성경을 가슴에 안고 따라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영혼의 양식이며, 영적전쟁에 무기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믿음은 3가지라고 했습니다. 구원받는 믿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죄사함 받았다고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믿음입니다. 두 번째는 삶으로 고백하는 믿음입니다. 삶으로 이루어가는 믿음입니다.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은 치료하십니다. 하나님은 도와 주십니다. 하나님은 기적을 베푸십니다.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은 돈을 주십니다. 고백하는 믿음입니다. 사건 속에서 믿음을 보여야 합니다. 대부분 기도는 열심히 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합니다. 그러나 사건 속에서 기도하다 포기합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기도해도 소용없네. 기도하면 뭐해? 응답도 없는데. 하나님은 돈을 안 주셔.” 이런 사람은 구원받는 믿음은 있으나, 삶으로 고백하는 믿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할 수 없고, 삶의 구원도 체험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이 기적을 행하는 믿음입니다.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개입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적을 행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은 돈이 밑천이라고 합니다. 성도들은 믿음이 밑천이라고 합니다. 믿음이 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사람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무엇입니까?
첫째,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랍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히11:1)
우리가 잘 아는 말입니다. 그런데 설명하라면 난해합니다. 실상이란 말이 무엇입니까? 헬라어로 ‘휘포스타시스’입니다. 이 말은 “아래에 위치함”이란 뜻으로 “기초 또는 본질”을 의미합니다. 표준 새번역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바탕이요.” 그렇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기초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기초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믿음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로마서 14장 23절에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우리는 믿음을 바탕으로 하여 소망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믿음은 곧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이 내 아버지이시다. 하나님은 내 길을 인도하신다.”는 말씀에 기초한 믿음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데올로기에 삶의 근거를 둡니다. 민주주의, 공산주의, 자본주의에 근거해 살아갑니다. 오늘날 여당과 야당은 보스의 정신에 따라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계파간에 다툼이 있습니다. 나라를 살리고 민족을 살리는 데는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욕망에 기초를 두고 삽니다. 개인적인 야망을 이루기 위해 살아갑니다. 철저하게 자기 자신만을 위해 행동합니다. 정치적인 야망, 물질적인 야망, 심지어 목회적인 야망도 있습니다. 내가 더 높은 지위에 오르고자 합니다. 거짓을 말해도 전혀 죄의식이 없습니다. 목적이 있으면 어떤 수단도 정당화합니다. 이것이 나쁜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에 근거하고 행동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기초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잘 돼도 감사. 안되면 더 감사”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찬양받기에 합당한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이 개인적인 야망에 근거했다면 안 되는 상황에서는 감사가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섭섭한 마음만 듭니다. 이 때 우리는 나를 살펴 보아야 합니다. ‘내 신앙이 바르지 못하구나!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구나!’ 하나님을 믿는다면 환경에 의해 쉽게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조상으로 아브라함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갈대아 우를 떠날 아무런 이유도 없었습니다. 갈대아 우르는 비옥한 지역입니다. 살기 좋은 곳입니다. 고대 문명지입니다.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곳을 떠나라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떠납니다. 누가 물었다고 합시다. “아브라함, 당신 어디로 갑니까?” “난 모릅니다. 그러나 그분이 떠나라고 합니다.” 대책이 안 서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야망을 이루기 위해 출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출발하였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신앙입니다. 로마서 4장 18절은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 자기가 100세인 것도 압니다. 사라가 90세 인 것도 아닙니다. 의학적으로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에 견고한 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기초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서 무엇인가를 바랍니다. 그 기초가 철저하게 믿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런데 제자들도 믿지 못하는 자들이 있지 않습니까? 도마가 말합니다.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사람들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경험한 것만 믿으려 합니다. 자기가 아는 것만 믿으려 합니다. 자기 생각에 합당한 것만 믿으려 합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이 하십니다. “네가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
예화) 조지 워싱턴 카버
미국에는 땅콩박사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조지 워싱턴 카버 박사를 말합니다. 이분은 노예가 해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노예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몸이 많이 약했습니다. 그는 어렵게 공부를 했습니다. 공부를 마치고 남부로 내려가 학생들을 가르칩니다. 목화를 자꾸 심으면 땅이 척박해지기에 땅콩이 가장 적합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람들에게 땅콩을 심으라고 권면합니다. 사람들이 듣지 않습니다. 목화재배가 오랫동안 되어 익숙했습니다. 흑인주제에 뭘 안다고 우리를 계몽하느냐며 무시했습니다. 결국엔 사람들이 땅콩을 심기 시작했습니다. .
그러나 걱정거리가 생겼습니다. 땅콩 농사가 풍년이 되면서 땅콩을 팔 길이 없는 것입니다. 원망의 소리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카버 박사! 당신 말 듣다가 이렇게 됐소.”, “거봐, 그러니 내가 검둥이 얘긴 듣지 말라고 했지.” 등등, 정말 순수한 뜻으로 시작했던 카버 박사는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산으로 들어갔습니다. 동터오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도대체 우주는 왜 만들었습니까?” 그러자 “너는 너무 수준 높은 질문을 한다. 네 수준에 맞는 질문을 해봐라.” 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또 다시 질문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사람을 무엇에 쓰시려고 이 땅에 두셨습니까?” 그러자 하나님이 “너는 여전히 네가 감당치 못할 큰 질문을 하고 있구나.”라고 하셨습니다. 너무나 엄숙해져서 진지하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렇다면 주님, 왜 땅콩은 만들어서 사람을 이렇게 고생시킵니까?”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래, 그것이 네 수준에 맞는 질문이다. 땅콩을 가지고 실험실로 들어가라.” 그 음성을 듣고 실험실로 들어갔습니다. 식음을 전폐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께서 자연 속에 숨겨두신 가능성을 향해 끊임없이 미래를 열어갔습니다.
암흑이지요. 캄캄하지요. 그가 만약에 땅콩이 가득한데, 벌레가 가득한데, 하면서 현실만 바라보고 경험에만 의지해서 ‘안 되는구나’ 생각하고 주저앉았다면 그걸로 끝이 아니었겠습니까? 그 가운데서 말씀하신 주님의 그 약속을 믿으며 어둠을 뚫고 그 가능성을 하나씩 찾아갔습니다. 그는 연구실에서 땅콩과 관련된 사실을 300 가지나 발견했습니다. 땅콩버터 아시죠? 땅콩버터도 이분의 작품입니다. 땅콩으로 잉크도 만들었습니다. 땅콩을 이용해서 여러 가지를 발명하니까 남부에 있는 농민들이 부유해졌습니다. 그는 발명품에 대한 로열티도 받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과 무료로 나누었습니다. 미국 남부 농민을 절대빈곤에서 그가 탈출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꿈이 있는 사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캄캄한 미래를 열어가는 사람,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를 열어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조지 워싱턴 카버는 현실을 보고 달려간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동을 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 욕망을 믿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내가 서 있는 삶의 기초가 욕망이면 언젠가는 무너지고 부서집니다. 경험한 것, 알고 있는 것은 현실 이상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세상은 경험을 가지고 현실의 잣대를 삼는 사람에게 그 미래를 맡겨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바라보며 나아가는 자들에 의해 세상은 움직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믿음으로 시작해서 믿음으로 마쳐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히11:6)
둘째,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다.
우리 주변에는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적외선과 자외선도 볼 수 없습니다. 공기도 볼 수 없고 바람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눈에 볼 수 없다고 없는 것은 아닙니다. 과학은 그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믿음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게 해 줍니다.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말은 보이지 않지만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는 것은 오직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이 있습니다. 천사들이 있고 귀신이 있습니다. 볼 수 있는 눈이 있으면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천사들을 섬기는 종들로 보냈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천사들이 가득합니다. 이걸 믿으면 됩니다.
어떤 분은 팔이 아픈 분이 있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그분에게 가서 말합니다. “제가 기도해 줘도 될까요? 실은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권사님의 팔이 아픈 것을 보여 주셨어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목사님의 말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웁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아픈 곳을 다 알고 계셨구나! 우리는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습니다. 지금 우리와 함께 함도 믿습니다. 믿음을 키우셔야 합니다. 믿음은 경험만큼 커집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입니까?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롬4:17)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하나님” 우리 눈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걸 받아들이는데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믿음의 눈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믿음의 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의 일곱 족속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철병거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들의 견고한 성읍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 철옹성 같은 여리고가 모래성처럼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믿음을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하나님을 실망시켰습니다. 눈앞의 현실만을 보며 원망합니다.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예수님이 5천명을 먹이실 때 빌립이 말합니다. “예수님 이렇게 많은 숫자를 우리가 어떻게 먹일 수 있습니까? 200데나리온의 떡이 있어도 부족합니다.” 200일의 돈이라면 1000 만원정도일 것입니다. 갑자기 1000만원이 어디에 있고 이런 빈들에서 어떻게 음식을 구합니까? 불가능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다릅니다. 물고기 2마리 보리떡 다섯 개를 주님 앞에 내려 놓습니다. 주님은 오병이어를 통해 많은 무리가 먹고 남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러나 빌립의 눈에는 전혀 보일 리가 없습니다. 믿음이 없는 자의 눈에는 예수님이 허풍쟁이처럼 보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 믿음이 있으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보이지 않는 무엇이 믿음으로 인해 우리 안에 살아서 숨 쉬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늘 확신에 차있고 도전을 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을 비전의 사람이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꿈이 현실로 드러나기를 기도하며 준비합니다. 사람들은 눈으로 보고 머리로 계산하고자 합니다. 과학적으로 검증된 것을 따르고자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다릅니다. 눈 앞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이 주신 꿈을 꾸며 살아갑니다.
예화) 이희돈 장로
최근에 은혜로운 간증을 들었습니다. 이희돈 장로님의 간증입니다. 이분은 세계 무역센터 총재를 지낸 분입니다. 한국인 중에 세계 은행 총재가 있었고, UN 사무총장도 있었습니다. 이희돈 장로님은 올해 61세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분입니다. 그런데 간증거리가 풍성하더라구요. 이분이 해외에서 미국 비자를 받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남들은 추천서, 은행 거래서를 준비합니다. 마지막이 인터뷰입니다. 그런데 장로님은 서류가 없습니다. 단지 “내가 미국에 가야하는 10가지 이유” 한 장의 종이만 냅니다. 미국에 사랑하는 여인이 있기에 가려고 했답니다. 영사관에 갔는데 서류를 이야기합니다. 없습니다. 그래도 받아 두라고 합니다. 며칠 뒤에 갔는데, 여권에 1년짜리 비자가 찍혀 있었답니다. 하나님께서 영사의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이희돈 장로님이 비자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8시에서 10시까지는 교회에서,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는 올리브 나무를 끌어 안고 기도했답니다. 그에게는 200불 정도의 돈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십의 9조, 십의 5조를 드리면서 살았습니다. 여권을 받으면서 비행기 티켓을 요구합니다. 영사가 놀랍니다. 영사가 어느 항공사를 소개합니다. 그 항공사도 티켓을 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장로님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 항공사에서 어느 항공사를 소개하는데, 원양어선 어부들이 타는 비행기가 있답니다. 그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 도착했습니다.
미국에서 친구가 나와서 200불인가 줍니다. 그것으로 숙소를 잡고, 자기 속옷을 팔았습니다. 돈 한푼 없이 미국에 도착했는데, 하나님은 세계 무역 센터 부총재, 총재의 자리에까지 올려 주셨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장로님이 주로 하는 말입니다. “시도해 봤냐?” 기도하고 시도하라는 것입니다. 도움을 요구하는 것이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는 진정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비전이 없는 사람은 못 보는 겁니다. 죽어라고 현실만 보며 앞만 보고 가는 사람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눈을 들어 보세요.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보세요.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세요.
셋째, 믿음은 영적인 힘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이 된 것이 아니니라”(히11:3)
보이지 않는 것이 있고, 보이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영적 세계가 먼저 있고, 육의 세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은 먼저 영적인 것이 먼저이고, 눈에 보이는 것은 그 다음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생각이요, 믿음이요 꿈이요 말입니다. 생각을 하면, 현실로 나타납니다. 꿈을 꾸면, 현실로 나타납니다. 말을 하면, 현실로 나타납니다.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현실로 나타납니다. 그러기에 생각, 믿음 꿈 말이 너무 중요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에 의해 보이는 현실이 중요합니다.
1903년 미국의 라이트 형제는 하늘을 날아다니겠다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어떤 기계를 타고 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친구들과 동네사람들은 이 형제들이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믿음은 한낱 망상이고 만화적인 생각이라고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계는 하늘을 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라이트 형제는 기계도 하늘을 날 수 있다는 꿈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꿈을, 그 믿음을 눈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하늘을 날게 된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믿음은 선배들의 삶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전혀 믿을 수 없는 상황, 바랄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랠프 월도 에머슨은 말합니다. “사람이 하루 종일 품고 있는 생각은 바로 그 자신이 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한 사람의 인생이란 그의 생각을 따라 만들어져 간다.” 노만 빈센트 필 박사는 말합니다. “그대의 생각을 변화시켜라. 그러면 그대는 그대 자신의 세계를 변화시킬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은 안 계신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이 절망적이라고 해서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우리의 도움이 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8). 믿음의 선배들이 이를 증명합니다. 아벨도, 에녹도, 아브라함도 모세도 이를 증명합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을 때 그들은 모두 “아멘”으로 반응했습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았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들이 모두 어리석은 사람들로 보였습니다. 뜬 구름 잡는 사람, 헛된 소리하는 사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허풍쟁이요 사람을 미혹케 하는 사람이라고 조롱받았습니다. 사도바울은 “염병할 놈”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전염병같이 나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증명합니다. 이들이 모두 옳았다고 말합니다.
비전을 이루어 가는 데에는 고통이 따릅니다. 기생 라합, 그녀는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없었습니다. 천한 사람입니다. 기구한 운명의 주인공입니다. 그가 믿음을 가졌을 때 기생의 삶에서 벗어났습니다. 자신의 가족을 구원하였고,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요셉은 17세에 형들에게 팔렸습니다. 노예였습니다. 이방인이었습니다. 희망이 없었습니다. 소망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꿈을 가슴에 새겼습니다. 말씀대로 한걸음 한걸음 전진합니다. 배신도 경험합니다. 인생의 쓰라진 잔을 마시지만 믿음을 포지하지 않습니다. 결국 애굽의 총리로 쓰임 받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게 됩니다. 자신을 노예로 삼았던 나라에 도움을 줍니다.
나폴레옹에게 있었던 일화를 나눔으로 메시지를 마감하려 합니다. 어떤 병사가 장군에게 이야기합니다. “장군님, 장군님!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그러자 나폴레옹이 말했습니다. “무슨 소리! 상황은 내가 만든다! 상황은 내가 만든다!” 여러분, 이 믿음이 나폴레옹 장군의 승리의 비결이 있습니다. 상황을 탓하지 마십시오. 상황은 우리 비전에 의해 극복됩니다. 이 비전은 믿음에서 나옵니다. 믿음은 우리 힘이 아니라, 도우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능력입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물질이 아닙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건강이 아닙니다. 우리는 믿음의 비전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삶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다시 회복하십시오. 여러분의 삶의 기초를 말씀 위에 세우십시오. 그리고 경험만 의지하지 말고, 우리 삶을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 역사 앞에 다시 세우시고, 이것에 초점을 맞추십시오. 거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바라는 것들이 이루어집니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이게 됩니다.
믿음은 영적인 힘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눈으로 보게 하는 힘입니다. 이 기적의 힘을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활용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십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씀입니다. 시편103편 20-21절입니다.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이루며 그 말씀의 소리를 듣는 너희 천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를 봉사하여 그 뜻을 행하는 너희 모든 천군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시103:20-21)
“나는 믿노라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나는 믿노라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나는 믿노라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나는 믿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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