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신 강단

감찰하시는 하나님

박도식 2021. 3. 22. 17:38

감찰하시는 하나님

창세기 16: 7-14

7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 곁 곧 술 길 샘물 곁에서 그를 만나

8 가로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가로되 나는 나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9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10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잉태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12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같이 되리니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찌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 하니라

13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14 이르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이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성경에서의 문제점

사람의 키와 외모는 태어날 때 주어진 것입니다. 가난한 집에 태어난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누구나 다 잘생긴 외모에 탁월한 몸매를 과시하고 부유한 집에서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내 맘대로 그렇게 되지는 않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서러운 때는 어떤 때인가요? 사람들이 외모와 학벌을 가지고 평가할 때이지 않던가요? 집안을 가지고 비교할 때처럼 사람을 서글프게 하는 것은 없을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는 그리 행복하지 않은 한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태어날 때부터 노예의 신분으로 성장한 여인입니다.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태어나 보니 노예인 것이지요. 얼굴은 꽤 예쁜 사람이었습니다. 애굽의 왕궁에 까지 뽑혀 들어갔습니다. 꽃다운 인생이 시작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바로 왕은 하갈을 아브라함의 노예로 주었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낯선 주인과 함께 살아야 했습니다. 특히 주인은 사라는 여인의 역할을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노비들은 결혼하기만 하면 이듬해에 아들을 잘도 낫는데, 여주인은 애기를 낳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애기를 낳지 못하는 여주인은 편한 성격을 지닌 사람이 아닙니다. 사래가 이상한 행동을 보일 때 하갈은 머리로는 이해가 갔습니다. ‘얼마나 외로울까? 여자로 태어나서 아이를 낳을 수 없다니 불쌍한 사람이구나.’ 그러나 히스테리 증상을 보일 때는 마음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의 수발을 들어주는 것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갈은 자기가 아브라함의 아이를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내 인생에도 꽃이 피는 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더 이상 하갈의 몸종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둘째 부인으로 서게 되었습니다. 왠지 모를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여주인 사래를 얏보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래가 하는 말에 말 대꾸를 하였습니다. 천하디 천한 몸종으로 아브라함의 둘째 부인이 느끼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사래가 명령을 내릴 때마다 하갈의 마음 속에는 반항심이 생겼습니다. ‘여자 구실을 못하는 늙은이 주제에 감히 누구에게 명령을 해. 예전에는 당신의 몸종이지만 지금은 아니야. 나는 주인 아브라함의 아기를 가진 고귀한 몸이라고. 이제 당신은 내게 굴복하고 말거야. 내 아이가 태어나면 아브라함은 내꺼야사랑받지 못했던 하갈은 임신한 아이로 인해 아브라함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싶었습니다. 아니 평생 인간 대접받지 못했던 종이 이제 인간대접을 받고 싶었습니다. 남의 심부름만 하던 사람이 남을 내 아래에서 부려보고 싶었습니다. 하갈은 아이를 미끼로 사래와 겨루어 승리를 하고자 하였습니다. 내친 김에 안주인에 오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하갈은 절망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자기 편을 들어들 줄 알았던 아브라함이 사래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때 하늘이 노랗게 변하고 하갈의 고통은 시작되었습니다. 사래의 복수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녀의 히스테리 성격과 더불어 복수심은 하갈로 하여금 슬픈 고독의 눈물을 흘리게 했습니다. 사랑받지 못하고 버림받는 여인의 처량함이 밀려왔습니다. 더 이상 살기 위해 목숨을 연명하는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임신한 몸으로 도망을 치는 하갈의 심정이 어떻했을까요? 굉장히 억울했을 것입니다. 불공평한 세상이라며 한탄했을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자기 편이 되어 주지 않았습니다. 철저히 외로왔습니다. 하갈의 모습은 어떤 모양일까요? 두 눈에는 서러운 눈물을 흘리면서 무참히 짓밟힌 장미꽃처럼 초라한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하갈은 술 길이라고 하는 슈르광야로 들어갔습니다. 끝없이 펼쳐진 메마른 사막이 있는 곳입니다. 절대 혼자서는 여행할 수 없는 곳에 임신한 몸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는 무슨 말입니까? 사막에서 한 많은 목숨을 끝내겠다는 말입니다. 사랑받지 못한 인생, 어쩌다 노예가 되어 멸시만 당하다 죽음을 당하는가. 하갈이 도망을 치면서 슈르 광야로 도망친 것은 중요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슈르 광야만 지나면 애굽이었기 때문입니다. ‘죽더라도 내 고향, 애굽에서 죽어야지. 내 부모를 한 번만이라도 보다가 죽어야지하는 하갈의 애절한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죽더라도 고향에서 죽고자하는 한 여인의 절박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회에서의 문제

처녀와 총각이 연애를 했습니다. 처녀의 아버지는 농협조합장과 면장을 지낸 지방유지로 생활이 부유했다. 총각은 키가 작았습니다. 재산이라고는 겨우 집이 한 채 있는 찢어지게 가난한 고졸 출신의 농촌청년이었다. 있는 것은 예수 잘 믿는 것 하나뿐이었다. 처녀가 아버지께 그 청년을 소개하며 결혼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청년을 면전에서 쫓아냈다. 오빠는 쥐약을 갖고 들어와 저런 청년과 결혼하려면 차라리 이 쥐약을 먹고 죽으라고 했다. 신학교를 거쳐 주의 종 되는 것이 꿈이라는 청년의 말에 처녀 가족은 더욱 난감했다. 부모님을 설득할 방법이 도저히 없었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기도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셔서 부모님과 오빠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오빠는 지금 목포에서 빛과 소금 교회를 하고 있고, 청년은 여수에게 제일 큰 교회를 하고 있습니다. 키는 작아도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요즘도 매주 수요일이면 정신대 할머니들이 일본 대사관 앞에서 보상을 요구하면서 시위를 합니다. 꽃다운 나이에 일본인에 의해 짓밟힌 그들의 인생을 보상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파렴치한 일본인들은 사과를 하지 않습니다. 인혁당 사건으로 어떤 이들은 자식을 하루 아침에 잃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가진 한을 누가 풀어 줄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서의 복음

수르 광야를 향해 나아가는 하갈의 모습은 애처로운 여인의 모습 그 자체이었습니다. 모래 바람이 조금만 더 분다면, 뜨거운 태양이 더 내려 쬔다면, 하갈은 죽었을 것입니다. 타오르는 목마름은 한 여인의 생을 마지막으로 이끌었을 것입니다. 아무도 임신한 여인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외롭게 홀로 광야 길을 걸어가는 한 여인을 주목하신 분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이셨습니다. 하갈에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여주인 사래의 하나님이셨습니다. 하갈의 하나님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하갈에게 다가오셨습니다. 버림받은 여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천대받는 여인에게, 한 많은 여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하갈은 완전히 버림받은 여인으로 생각했는데, 하나님은 하갈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이런 생각 하시는 분 계십니까?

나는 혼자뿐이다. 나는 이 세상에서 별 볼일도 없다! 나는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다. 내 부모도 나를 사랑하지 않고, 내 형제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 나는 외로운 사람이야. 내게 남은 것 한 많은 인생의 마침표를 찍는 것 뿐이야.’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이방여인 하갈을 기다리셨다면, 반드시 여러분을 기다리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갈을 찾아오셨다면 여러분에게도 찾아오실 것입니다. 힘없고 지치고,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는 외로운 이들에게 관심보이시면서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갈에게 물었습니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인생의 목적, 방향을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하갈의 위치와 현주소를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하갈은 하나님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8절 하반절입니다.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도피하는 인생이라고 합니다. 어디로 가는 지 정확히 알지 못했습니다. 목적이 있는 것도 방향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박해를 피해 도망갈 뿐입니다. 하갈은 왜 살아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 되는지 삶의 의미를 모른 채 하루 하루 도피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인생은 무의미 하고 허무한 인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방황하는 인생 하갈에게 명령하셨습니다.

 

9절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하갈이 가장 듣기 싫은 소리를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네 주인 사래에게로 다시 돌아가라. 그래서 그 분을 이전보다 더 잘 섬겨라.” 주인 집에 다시 들어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 아닙니다. 그러나 하갈은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자기의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자기의 길을 제시하시는 분이 하나님인줄 압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사래의 하나님만이 아닌 나의 하나님이 되심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하갈이 잘잘못을 말씀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종이 감히 여주인을 멸시해원인은 바로 거기에 있다고 하면서 질책하지 않았습니다. 임신한 몸으로 방황하는 여인을 불쌍히 여기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합니다. 하갈을 잘못을 책임추궁하지 않는 하나님, 멋진 하나님이십니다. 하갈을 위해 샘을 준비하신 하나님, 멋진 하나님이십니다. 하갈에게 약속을 하시는 하나님, 더더욱 멋진 분이십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셀 수 없게 하리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나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 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16:10-11)

 

하나님이 하갈에게 아들을 낳을 것과 그 아들에 대한 축복의 예언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손이 번성하여 셀 수 없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갈의 마음은 주인집에 돌아가는 것이 더 이상 부담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너무나 기뻤습니다.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한 노예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하갈의 사정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하갈에게 관심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은 나의 것, 나는 외로운 인생, 가엾은 인생하갈의 노래였지만 이제는 아니였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신다. 하나님이 내게 관심을 가지고 계셨다. 나는 하나님의 축복받은 딸이다. 이것이 하갈이 내뱉는 신앙고백이었습니다.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13)

 

하나님이 내 사정을 이렇게 잘 아시다니... 그래서 하나님을 뭐라고 불렀는가 하면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 이렇게 불렀답니다. 히브리 말로는 아타 엘로이입니다. 의미를 살려 번역하면 하나님! 당신은 저를 너무도 잘 아시는군요!” 이런 고백의 말입니다. 이 말의 의미가 뭐겠습니까? “당신은 어쩌면 이렇게 내 속사정을 환히 꿰뚫어 보시나이까? 나 같은 이방 계집, 주인의 미움을 받고 쫓겨난 년! 그리고 도망치는 노예까지도 하나님은 줄곧 살펴보시고 나를 알고 계셨군요! 높은 사람, 거룩한 양반들, 힘있는 사람들만 보고 계신 줄 알았더니 나 같은 갈곳 없는 외로운 나그네, 희망 없는 한 여인까지도 이렇게 자세하게 바라보고 계셨단 말입니까?” 이러한 감격의 고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난 그 우물을 이름하여 "브엘라해로이"라고 이름을 짓습니다. “나를 돌보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우물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갚아주시는 분이십니다. 고통당하는 자의 아픔을 갚아 주십니다. 상한 영혼의 탄식에 축복으로 갚아주십니다.

 

하나님은 피난처가 되십니다. 갈 곳을 잃고 방황하는 자에게 쉴만한 우물과 푸른 초원을 준비해 놓으십니다. 피할 길을 예비해 놓으시고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축복을 주십니다. 가장 가엾고 불쌍한 여인을 추하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더럽고 냄새난다고 멀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찾아오시면서 약속의 말씀으로 축복해 주셨습니다. 하갈같은 여인도 축복해주셨는데 하물며 자녀인 여러분을 향해 더 많은 축복을 준비해 주지 않겠습니까?

사회에서의 복음-문준경 전도사

부자집 딸로 태어난 자매가 있었습니다. 섬에서 태어나 다른 섬의 부자집으로 시집을 갔습니다. 17살의 어린 나이에 신랑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결혼을 하였습니다. 남편으로부터 첫날밤부터 버림을 받아 17세에 남편있는 생과부로 살았습니다. 외지를 떠도는 남편은 아내를 돌보지 않고 첩을 두고 자녀를 낳았습니다. 그래도 이 여인은 20년이 되도록 시부모를 지극 정성으로 섬겼습니다. 섬에서의 생활은 고된 일이다. 그러나 그녀는 효부이었다. 착한 며느리입니다. 그러나 남편 사랑은 받지 못했습니다. 삯바느질을 하면서 돈을 모아 송아지를 샀습니다. 송아지를 키워 돈을 벌었는데 남편이 모두 빼앗아 갔습니다. 여인의 가슴에 한이 맺혔습니다. 천지신명께 여러 번 기도했다고 합니다. 20년 호된 시집살이를 마감하고 목포에 나올 때는 손재봉틀 하나를 가지고 단칸 방에서 시작했습니다.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가엾은 인생이었습니다. 그녀는 37세에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버림받은 여인을 찾아오셨다. 마음에 위로를 주셨고 삶의 의미를 깨닫게 했다. 복음 전파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고향에 돌아가 부모님께 전도합니다. 20년 만에 집을 찾은 불쌍한 생과부 딸을 맞이하는 부모님의 가슴은 아팠다. 더욱이 복음을 전하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네가 시집가서 고생하더니 서양귀신 들려 실성했구나. 썩 물러가라하고 똥을 퍼다 딸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남편에게 버림받고 부모님께 버림받은 처량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을 신랑삼아 힘차게 전도하였습니다. 향유 옥합을 가지고 온 여인처럼 눈물로 주님의 발을 씻기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열한 개 섬을 24시간 이 섬에서 저 섬으로,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이 집에서 저 집으로 나룻배를 타고 건너다녔다. 많은 영혼이 주님께 돌아왔다. 공산당에게 순교당할 때 죄명은 새끼 많이 깐 씨암탉이었다. 순교할 때에도 자신의 딸처럼 여기는 전도사님를 살려줄 것을 부탁하다 주님의 품에 안기셨다. 이분이 문준경 전도사이시다. 누군가 말했다. “죽임당한 여인은 가엾다. 버림받은 여인은 더 측은하다. 그러나 가장 불행한 여인은 잊혀진 여인이다.” 지금 그녀가 뿌린 복음의 씨앗은 이루 셀 수가 없다. 전남 신안군 증도의 복음화율이 90%이다. 그녀가 키운 사람 중에 김준곤 목사님, 정태기 목사님, 이만신 목사님 등 여러분이 계시다.

 

결론: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샘물을 준비해 놓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가야할 길을 제시해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감찰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보살펴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람들은 여러분을 몰라주어도 하나님 아버지는 아십니다.

하갈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은 오늘 여러분을 감찰하시고 피난처가 되어 주십니다.

삶이 힘들다고 기죽지 마세요. 사람들이 무시한다고 용기 잃지 마세요. 주님이 함께 계세요.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대하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