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삶의 의욕을 회복하라
네 삶의 의욕을 회복하라
열왕기상 19:1-12
1 아합이 엘리야의 무릇 행한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인 것을 이세벨에게 고하니
2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 맘 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3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4 스스로 광야에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 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5 로뎀 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6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었더니
7 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포인트 워드: 의욕
활용: 우리는 종종 삶의 의욕을 잃어버릴 때가 있었다. 성령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다가와서 의욕을 불태우게 하셨다. 지치고 힘든 시기에 말씀에 귀를 기울이자.
다같이 따라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영혼의 양식이며 영적 전쟁에서 무기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네 예배를 회복하라. 네 기도를 회복하라. 네 말씀을 회복해라. 네 감정을 회복해라. 네 영적 전투력을 회복해라. 네 성령의 삶을 회복해라.“ 오늘은 ”네 삶의 의욕을 회복해라“입니다.
요즘 마음이 병든 사람들이 많습니다. 마음의 병이 곧 육체의 병이 됩니다. 또한 육체의 병이 마음의 병이 되기도 합니다. 삶이 힘들고 어렵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늘 기쁘고 행복하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한 경우들이 많습니다.
몇 년 전에 경남 양산에서는 홀로 된 30대 엄마가 4살, 7살 딸을 아파트 7층에서 차례차례 밖으로 던졌다. 그리고 자기도 자살했습니다. 살 길이 막막했던 것입니다. 7살 딸은 내 던져지기 전에 울며 불며 7층에 사는 아줌마에게 살려 달라고 부탁했으나, 허사였습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수원의 오피스텔에서는 40대 주부가 3년 전에 태어난 아기를 1개월만에 죽였습니다. 그 시신을 3년 동안 가지고 있었습니다. 남편없이 아이를 키우는 것이 겁이 났다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의 삶도 예외는 아닙니다. 어느 순간은 성령충만하고, 교회 오는 것이 즐겁고 기쁘지만, 어느 순간, 성령 충만함이 사라지고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이 없고, 돈이 없고, 할 일이 없을 때, 쉽게 낙심하며 근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삶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첫째, 삶의 위기는 누구에게나 올 수 있습니다.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 쯤 행하고 한 로뎀 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왕성19:4)
엘리야는 구약을 대표하는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죽인 자를 살리고, 병든 자를 치료하는 이적과 기적의 종이었습니다. 영안이 열려서 영적인 세계를 보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기도할 때, 3년 반 동안 비가오지 않았다. 그가 기도한즉 하늘에서 비가 내렸다. 엘리야는 신유의 종이며, 능력의 종이며 불의 종이다. 하나님이 함께하는 종이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와 똑같이 평범한 한 사람이었다. 아주 나약한 한 사람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게 된다.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려 한다는 말을 듣고 겁이 나서 브엘세바로 도망친 것입니다. “로뎀 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왕상19:4) 엘리야는 무덤에 묻혀 있는 조상들보다 살아 있는 자신의 현 상황이 더 좋지 못하다는 것이다. “죽여 주시옵소서. 사는 것이 힘이 듭니다.”고 기도하는 것이다.
어제의 영웅이던 엘리야가 오늘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엘리야의 모습이 오늘의 우리의 모습일 수 있다. 한 때, 성령 충만하고 은혜충만하고 기쁨충만하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신앙인의 모습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상태까지 될 수 있다.
여러분 중에 신앙적으로 침체되고 낙심되어 있다면 용기를 얻기 바랍니다. 천하의 엘리야도 하나님 앞에 죽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던 모세는 어떻습니까? 민수기 11장 15절에서 말합니다.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당함을 내가 보지 않게 하옵소서”(민11:15) 모세는 고기를 달라고 하는 백성들의 불평과 원망 앞에 녹초가 되었습니다. 매일같이 하나님을 대항하는 백성들 때문에 너무나 힘들게 사역을 했던 것입니다.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당함을 내가 보지 않게 하옵소서”(민11:15) 백성들을 인도하는 일이 힘들고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어떻습니까? 그는 눈물의 선지자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구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습니다.(렘1:5) 그런데 예레미야의 사역도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사람의 조롱거리가 되고 비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빈 우물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얻어 맞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나의 어미가 나를 생산하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 나의 아비에게 소식을 전하여 이르기를 네가 생남하였다 하여 아비를 즐겁게 하던 자가 저주를 받았더면”(렘20:14-15) 사내아이가 태어났다고 아버지에게 좋은 소식을 전한 자가 저주받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수욕으로 보내는고”(렘20:18) 나는 왜 태어났을까?를 고민합니다. 오히려 엄마 뱃속에서 죽었으면 더 나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시 자기가 태어난 것을 불행이라고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까? 힘을 내세요. 여러분 혼자만 그런 생각을 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옛날에 누가 이런 말을 하면 잘못된 신앙이라고 서슴없이 이야기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제가 잘 몰랐습니다. 영적 침체는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것입니다. 천하의 모세도 엘리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레미야는 더 많이 흔들렸습니다. 사도바울도 예외가 아닙니다. “--살 소망이 끊어지고 자기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았다.”(고후1:8-9) 고백합니다.
젖소를 우유 선전에 촬영하려고 할 때, 어떻게 하는가요? 3개월 동안 매일 목욕 시켜줍니다. 털을 정돈한다. 그리고 촬영이 끝난 후에는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간다. 똥 오줌 싸는 구덩이로 돌아가고, 어느 누구도 거들떠 보지 않는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이와 같습니다. 한 번 주목받다가도 외면당하기 쉽상입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설교의 황태자는 당연 스펄전이다. 그는 16살 때부터 사역을 감당했다. 수많은 영혼을 예수님께 돌이켰다. 그러나 그는 우울증 환자였다고 한다. 원인도 모른다. 그는 말한다. “나의 정신이 심각하게 침몰하여서 어린 아이와 같이 수 시간을 울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 우는 지를 몰랐다.”
우울증의 원인은 다양하다. 고난과 신체적인 연약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선천적으로 마음이 약할 수도 있다. 스펄전은 스스로 우울증과 싸웠지만, 자신을 삶을 끝까지 섬기는데 힘썼다. 고아원을 운영하고 지친 영혼을 상담하고 심방했다. 아마 그는 자신의 우울증으로 인해 많은 우울증 환자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엘리야를 영적 침체의 상황에서 어떻게 하십니까? 우리가 탈진에서 벗어나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둘째,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먹을 것을 주셨습니다.
“로뎀 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왕상19:5)
엘리야가 지치고 낙담하며 절망한 것은 육체의 피곤과 탈진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바쁘게 살았습니다. 열왕기상 18장에서 우상숭배자들을 처형합니다. 3년 6개월동안 내리지 않던 비를 기도함으로 내리게 합니다. 손바닥만한 구름이 바다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고 아합에게 전갈을 보냅니다. “비에 막히지 않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소서”(왕상18:44b) 비가 오기 시작하자 마차를 타고 출발한 아합보다 먼저 이스르엘로 도착하여 아합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길이가 25km입니다. 25km라면 1시간 30분이나 2시간 정도를 달린 것입니다.
비가 오게 할 때, 엘리야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넣고 생명을 다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무려 7번까지 했습니다. 목숨을 건 기도, 사력을 다한 기도를 해 보신 분은 알 것입니다. 몸 속의 진액이 빠져나갑니다. 머리가 핑돕니다. 그리고 25km를 달렸습니다. 그리고 이세벨의 말을 듣고 150km 떨어진 브엘세바까지 도망해 왔습니다. 북쪽 이스라엘에서 남쪽 최남단 지역까지 온 것입니다. 더 이상 갈 힘이 없어서 머문 곳이 로뎀 나무입니다. 얼마나 지치고 피곤할까요?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지만 또한 육적인 존재입니다. 육체를 가진 사람은 영적으로 엄청난 일을 해도 과로하면 지칩니다. 중병에 걸릴 수 있습니다. 육체가 탈진하면 사람들은 만사가 귀찮아 집니다. 육체가 힘이 드니 영적인 상태도 영향을 받습니다. 영혼과 육체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우리의 육체가 탈진하고 마음이 힘들어지면 자신을 한 번 살펴보아야 합니다. 쉬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탈진하여 죽기를 바라는 엘리야에게 어떻게 하십니까?
5절입니다. “로뎀 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었더니”(왕상19:5-6)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었습니다. 엘리야는 얼마나 피곤했던지 먹고 다시 누웠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죽기를 구하는 엘리야에게 영적으로만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육체적으로 먹고 마시고 쉬게 했습니다.
우리가 쉽게 잃어버리는 것이 있습니다. 영적인 치유가 필요하다고 육체를 소홀히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낙심한 엘리야에게 먼저 육체의 필요를 공급해 주셨습니다. 잠간의 휴식과 산책, 잠간의 낮잠이 우리의 낙심을 치유하기도 합니다. 육체를 학대하지 마세요. 육체에 쉼을 주어야 합니다. 엘리야가 한 일은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입니다. 하나님은 먹게 하셨고, 마시게 하셨고, 쉬게 하셨습니다. 7절에 보세요.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마사지 해주고, 음식을 주어 또 먹게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힘들고 지치면 푹 쉬세요. 밖에 나가 산책도 즐겨 보세요. 아름다운 자연도 보세요. 쉼을 얻어야 합니다. 우리는 영혼도 있지만 육체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육체를 회복시켰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목적일까요? 아닙니다. 그의 영혼 회복이 목적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엘리야를 호렙산에서 만나주셨습니다.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왕상19:8)
엘리야는 기력을 되찾소 호렙산에 갑니다. 호렙산은 시내산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곳이며 십계명을 받은 곳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호렙산에서 만나길 원하셨습니다.
우리가 인생에 지치고 힘들 때, 삶의 의욕을 상실할 때, 하나님께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새롭게 힘을 얻어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내 마음을 알아 주지 않아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알아 주십니다.
조용기 목사님이 작사한 노래가 있습니다.
“1. 인생길 험하고 마음지켜 살아갈 용기 없어질 때, 너 홀로 앉아서 낙심치 말고 예수님
품으로 나오시오
2. 평생의 모든 꿈 허물어져 세상의 친구 다 떠날 때 어둠에 앉아서 울지만 말고 예수님
품으로 나오시오.
3. 어둔 밤 지나면 새 날 오고 겨울이 가면 봄이 오듯 이 세상 슬픔이 지나고 나면 광명한
새 날이 다가오네”
후렴
예수님은 나의 생명 믿음 소망 사랑되시니 십자가 보혈 자비의 손길로 상처 입은 너를 고치시리”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회복시키 위해 여호와의 산, 곧 호렙산에 섰으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나가시겠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어떤 모습으로 지나가실까요? 처음에는 크고 강한 바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거기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 후에 지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기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지진 후 불가운데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호렙산은 모세가 가시떨기 불꽃가운데서 자신을 보여주신 곳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불꽃 속에서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세미한 소리가 있었습니다. 잔잔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습니다. 하나님은 거기 계셨습니다. 불안해 하고 두려워하고 놀라고 있던 그에게 하나님은 바람도 지진도 아니고 불도 아닌 세미한 음성으로 다가오셨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불, 성령의 바람, 진동을 체험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은 아닙니다. 우리는 불같은 성령, 바람 같은 성령, 생수같은 성령을 체험할 수는 있지만, 우리가 만나야 하는 것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세미한 음성 속에서 하나님은 엘리야의 사명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호렙산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깊은 만남의 장소. 가장 좋은 곳이 교회이면 좋습니다. 아니면 기도원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성신교회가 호렙산 같은 교회가 되길 기도합니다. 삶에 지친 목회자들이 함께 와서 기도하고 힘을 얻는 곳,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곳이 되길 바랍니다.
영적 세계를 정복하려면 그 만한 노력과 영적인 수고가 필요합니다. 골방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수없는 실패 가운데에서도 좌절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의 거룩한 만남 때문입니다.
예화) 감리교 신학대학을 1등으로 졸업한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미국의 드류대학에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미국에 갈 때 성남 공항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시골에서도 왔고, 학교 후배들, 교회에서도 많은 사람이 배웅 나왔습니다. 미국에 도착하여 공부를 시작하지 않고 개척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설교하면 미국이나 한국의 석사 박사들이 몰려오고, 엘리트들이 몰려올 줄 알았습니다. 금새 부흥될 줄 안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도 3명의 할머니들만 모입니다. 생활비가 없습니다. 드류대학에서는 공부하러 오라고 했는데 영어 표현을 잘못해서 장학금이 취소되었습니다. 공부도 할 수 없고 교회도 실패했습니다. 살 수 길은 오직 하나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부인에게 전화하니 어서 오라고 합니다. 그런데 전화기를 끊기 전에 아내의 한 숨 소리가 들립니다. “공항에 나온 사람들은 무슨 낯으로 보나?” 너무 창피하더랍니다. 목사님은 몸도 아프고 마음도 아픕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흑인 아파트에서 신문지를 찢어가면서 기도합니다. 샤워물을 틀어놓고 옷을 입은 채 기도합니다. “What shall I do?” “하나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처절하게 부르짖었습니다. 초라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그가 울면서 기도할 때 하나님이 임하셨습니다. “누가 너에게 엘리트 교인을 맡기겠느냐? 지금 있는 사람을 잘 돌보아라.” 할머니 3명을 잘 돌봐라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묻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됩니까?” “너는 예수만 전하거라.” 복음만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회가 됩니다. 신학교의 공부도 시작됩니다. 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너무 바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의 시간이 부족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살려고 노력하기 보다, 자기 힘으로 살려고 합니다. 우리는 인생 살이가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18절에서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인을 남기리니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한 자들이다.” 이 말씀은 우리 주변에 숨어 있는 크리스찬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울 사람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습니다. 하나님의 물질이 숨어 있습니다.
이사야 45:3절입니다. “네게 흑암 주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 네 이름을 부르는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을 네가 일게 하리라”(사45:3)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화가 되시며, 네게 고귀한 은이 되시리니”(욥22:25)
눈에 보이지 않아도 사람들이 있다. 돈이 준비되어 있다. 환경이 우리를 기다린다. 우리가 영적으로 무지몽매하여 보지 못할 뿐이다. 스스로 낙담하거나 좌절하지 말라. 기도로 현실의 한계를 뛰어 넘자. 하나님이 반드시 축복하실 때까지 믿음으로 전진하자. 골방의 인내로 포기하지 말라.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하루 하루 나아가자. 반드시 네가 너를 들어 쓰리라. 반드시 네가 너를 축복하리라. 천지는 변해도 하나님의 약속은 변하지 않는다. 다시 의욕을 회복하자. 다시 기도하자. 골방에서 하나님을 만나자.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도와 주지 않는다.
젊은 여성이 뉴욕의 한 카페에 들어 가 다른 사람의 탁자 옆에 가방을 내려 놓고 음식을 가지러 갔다. 그녀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한 청년이 다가와서 그녀의 가방을 슬쩍 들고 나갔다.
이 실험이 여덟 차례를 걸쳐 반복한 결과, 단 한 명의 주변 사람만 그 청년의 도둑질을 막으려고 했다. 다시 똑같은 여성이 카페에 들어 가 다른 사람의 탁자 옆에 가방을 내려 놓았다. 이번에 그녀는 탁자를 차지한 사람들에게 자리를 봐 달라고 부탁하고 자리를 떴다. 그러자 부탁을 받은 사람은 청년의 도둑질은 매번 저지했다. 하나님께 말하세요. 주변 사람에게 말하세요. 하나님은 우리를 도울 천사들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함께 승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