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신 강단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

박도식 2022. 6. 15. 15:40

화평케 하는 자의 복

마태복음 5:1-9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포인트 워드:

목적: 하나님 앞에 우리는 복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인가?

 

성경을 가슴에 안고 고백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영혼의 양식이며, 영적전쟁에 무기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말세의 마지막 때를 가리켜 갈등과 불화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어디서나 평안하고 행복한 삶을 찾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20151229일 옥션 사이트를 방문한 20대 이상 국민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새해 소망의 1위는 39%가 가족의 건강과 화목이었고, 2위는 15.4%로 돈 모으기였습니다. 3위는 8.0%로 취업, 구직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현실은 어떻습니까?

뉴스에서 가정 불화의 소식을 쉽게 접합니다. 술 취한 아버지가 어머니를 폭행한다고 격분한 11살 난 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직장에서는 집단 따돌림을 감당하지 못해 자살한 간호원도 있었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어떤가요?

 

사탄 마귀 귀신은 예수님의 재림이 다가오자, 교활하고 극렬하게 역사합니다. 교회내에도 분쟁과 분열의 소식이 들려옵니다. 갈등과 불화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 것은 예수님은 이 땅에 화목제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물어 뜨렸습니다. 예수님을 길을 만드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화평케 하는 자들입니다. 본문 9절에 말씀합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5:9) peacemaker입니다. 평화를 만드는 자는 단순히 마음이 평안하거나 평화를 지키는 자의 의미가 아닙니다. ‘불화하는 사람 사이에 적극적으로 화평을 만들어 내는 자입니다.

 

우리가 잘 알아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화평을 만드는 자입니다. 만약 우리가 불화를 만드는 자라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단지 교회에 다녔다고 해서 하나님의 자녀는 아닙니다. 봉사나 헌신을 많이 했다고 하나님의 자녀는 아닙니다. 교회의 중직자라고 하나님의 자녀는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화평케 하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일컬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원망 불평을 하고 비방이나 험담을 하는 자는 사람사이를 갈라놓은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될 수 있을까요? 이 화평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마태복음 22장의 예수님의 말씀과 연결하여 풀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과 화평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22:37-38)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과 화평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진정한 사랑을 나눌 수가 있습니다. 흔히 불화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양쪽을 화평케 하기 위하여 식사 대접을 하고, 대화를 시키고, 악수나 포옹도 시키면서 설득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진정한 화해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불화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적어도 한쪽은 분명히 하나님 앞에 영적으로 바르게 서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바로 잡기 전에는 진정한 화해가 없습니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되는 부부가 불화 문제로 헤어지기로 결정하고 가정 법원에 갑니다. 판사가 묻습니다. “두 분은 무엇 때문에 이혼을 하기로 결정했나요?”

우리 부부는 결혼하고 여섯 달 동안 함께 살았는데, 단 한 번도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아내가 말합니다. “일곱 달이잖아?”

이혼 법정에 와서도 끝까지 의견 일치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두 사람중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께 회개하고 믿음 위에 바로 서 있었다면, 하나님과 화평했다면, 이렇게는 안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평한 자는 사람들과도 화평할 수가 있습니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22:21)

 

하나님께서 우리를 양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밀림의 왕 사자라면 어떨까요? 평생 남을 해치며 살아야 합니다. 부지런한 소라면 어떨까요? 평생 부지런히 일만하다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양은 아무 것도 걱정하지 않고 염려하지 않고 목자에게 모든 것을 맡기면, 다 알아서 재워주고 쉬게 해 주고, 보호해 줍니다. 그러니 하나님과의 화목이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합니까?

 

예화) 판티 킴푹의 이야기

우리가 베트남 전쟁 자신을 보면, 한 여자 아이가 몸에 불이 붙은 채로 뛰어 나오는 장면이 있습니다. 1972년 미군 폭격기의 폭격으로 집에서 뛰어나오는 소녀이었습니다. AP 통신 기자가 그 모습을 사진에 담았는데, 퓰리처 상을 받았습니다. 킴푹은 그때의 사건으로 인해 캐나다로망명한 후에도 오랫동안 마음에 큰 고통과 상처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녀를 그렇게 만든 사람들에 대한 미움과 증오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목사님으로부터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그녀를 괴롭히던 마음의 고통과 상처를 십자가 앞에 내려 놓았더니, 지난날의 상처가 다 치유되고 놀랍게 마음의 평안이 찾아 왔습니다. 또한 죄사함의 은혜가 임하니, 삶이 기쁨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니, 자신을 그렇게 만든 사람들에 대한 미움과 증오는 사라졌습니다. 사랑과 소망이 싹이 트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결혼 후, 캐나다 시민권을 얻어 유네스코 평화문화 친선대사가 되어 수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킴푹에게 놀라운 삶의 변화를 가져다 준 분은 그녀가 하나님과 화평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5:19)

 

둘째, 자신과 화평해야 합니다.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22:39)

 

하나님과 화평한 후에 우리는 곧바로 이웃과 화해할 줄 알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말은 네 이웃과 사랑하는 데 있어서 너 자신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먼저 우리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우리 자신과 화평하지 않고 우리 자신이 먼저 치유받지 않고는 이웃과의 진정한 화평을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화평한 다음에 우리 자신과도 화평하여 자존감, 즉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 자신이 남들보다 열등하다고 위축되는 열등감에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주위의 말이나 행동에 상처를 받고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반대로 나 자신이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착각하는 우월감에 사로잡히면 자신이 최고라는 영적 교만에 사로잡혀 어떠한 영적인 지도도 받지 않으려고 해서 이웃과의 관계가 다 깨어지고 맙니다. 그러나 자신과 화평함으로 자존감을 회복하게 되면 어떠한 상처의 고통 가운데에도 더 이상 상처를 받지 않고 주님의 위로를 받으며 다 이겨낼 수 있습니다.

 

무디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미국의 어느 도시에서 전도 집회를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집회 며칠 전에 도착했는데, 다음 날 아침 신문을 봤더니 머리기사가 교만한 전도자 무디라는 것입니다. 스태프들이 화가 나서 말합니다. “목사님, 이거 말도 안 되는 기사입니다. 인격 살인 아닙니까? 어떻게 할까요?” 야단들입니다. 무디 목사님은 가만히 그 기사를 읽더니 웃으면서 말합니다. “이 사람들이 나를 잘 모르는 것 같네요. 사실 나는 이 기사에 쓰인 것보다 휠씬 더 교만한데, 이만하면 잘 써준 것 같은데요? 여러분,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겸손하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좀 더 겸손하기 위해서 모두 기도합시다.”

 

이것이 자신과 화평함으로 자존감이 회복된 자의 삶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미국의 자존감의 대가인 나다나엘 브랜든 박사가 자존감 키우기라는 유명한 책을 썼습니다. 자존감을 높이는 3단계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내가 누구인가 하는 자기 인식의 단계, 둘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어려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기 수용의 단계’, 마지막 셋째는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하는 자기 표현의 단계입니다.

 

손자 오이가 있었습니다. 학교에 가면 아이들이 말합니다. “너 오이 맞아? 무슨 오이가 그 모양이야?” 자기가 생각해 봐도 오이 같지가 않아서 할머니에게 물어 봅니다. “할머니, 나 오이 맞아요?” 그러자 할머니가 귀여워서 죽겠다는 표정으로 말합니다. “~~, 당근이지.” 이 말을 들은 오이는 자기가 당근인 줄 알고, 충격을 받아 친 엄마를 찾기 위해 가출했다고 합니다.

 

자기인식이나 자기 수용이나 자기 표현을 못하면 자존감이 낮아집니다. 스스로 불행과 고통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61절에서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6:1)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동역자라는 자기인식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대통령을 떨게 할 사람이 누구인가요? 미국의 대통령인가요? 중국의 시진핑인가요? 아닙니다. 보일러공입니다. 추운 겨울에 보일러가 고장났는데 보일러공이 고쳐주지 않으면 대통령도 추위에 떨 수 밖에 없습니다.

 

나는 누구인가요?

여러분은 누구인가요?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요 존귀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면서 까지 살리고 싶은 그 한 사람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두고 보기에도 아까운 사람입니다.”

성경의 표현은 하나님이 찾으시는 진주입니다. “하나님의 보배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고린도후서 6:4-5절에서 말합니다.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고후6:4-5) 그는 하나님의 일꾼이지만, 많이 견디고 환난을 당하고 궁핍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매 맞기도 하고, 갇힘도 당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을 전하다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을 당했는데, “내가 주의 일을 하다가 이렇게 고통과 불행을 겪었다.”고 불만을 하지 않았습니다. 원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다 믿음으로 자기 수용을 한 것입니다.

 

영국의 수학자요, 철학자인 버트란트 러셀이 쓴 행복의 정복이란 책에서 그의 행복론이 나옵니다. “공작새는 다른 공작새의 꼬리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공자새는 자기 꼬리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작새는 세상에서 가장 평안하고 행복한 새다.” C.S 루이스도 말했습니다. “말세에 사탄이 가장 교묘하게 사용하는 무기는 비교의식이다.”

 

우리가 우리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 불행해지고 맙니다. 그러나 비교하지 않으면, 나 자신을 그래도 받아들이면, 언제나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 수용을 넘어 감사함으로 자기 표현을 합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은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신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9-10)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얼마나 위대한 신앙고백입니까? 얼마나 행복한 선언입니까? 아무리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이 믿음을 가지고 감사하면, 행복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소중한 분들입니다. 자신을 축복하고 응원해 보세요. 자존감이 회복될 것입니다.

 

셋째, 이웃과 화평해야 합니다.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22:39-40)

 

우리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열등감이나 우월감에 사로잡히면 우리의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사랑할 수 있을 때, 우리 이웃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입니다.

 

예수님은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13:34-35)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아주 절친한 두 친구가 깊은 산속에 걸어가다 호랑이를 만나고 말았습니다. 호랑이가 두 사람을 덮칠 것처럼 무서운 눈빛으로 노려 보는데 한 친구가 갑자기 신발 끈을 단단히 묶습니다. 그걸 본 다른 친구가 말합니다. “, 신발 끈을 단단히 묶는다고 네가 호랑이보다 빨리 뛰어 살아날 수 있을 것 같아?” 그러자 신발 끈을 묶던 친구가 말합니다. “내가 어떻게 호랑이보다 빨리 뛸 수 있겠냐? 난 너보다 조금만 빨리 뛰면 돼.”

 

자기는 친구보다 조금만 빨리 뛰면 친구가 호랑이 한테 잡아 먹히는 동안 자기는 도망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거 절친 맞습니까?

 

우리도 살아가면서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 이웃에게 배신당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때마다 우리는 견디기 힘들어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감정을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행동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도 배신을 당했습니다. 예수님도 외면당하는 아픔을 경험했습니다. 동네 사람들도 무시했습니다. 가족들도 무시했습니다. 제자들도 배신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도 배신했습니다. 분명, “호산나하면서 찬양하던 사람들인데, 어느 순간에는 입을 다물거나 오히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배신당하는 아픔을 당해 본 적이 있나요? 성숙해지는 과정입니다. 목사들도 배신당하는 아픔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나뉘게 됩니다. 이웃들과 화평을 이루는 사람들이 온전히 십자가를 이루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과제는 원수들입니다. 우리에 대해 험담하고 비방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조롱하거나 비웃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원수를 용서하고 축복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힘든 과정을 경험해야 합니다. “원수를 용서하고 축복하며 기도하라.” 이걸 통과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에베소서 4:32절입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우리는 원수를 보면서 친절하게 대할 수도 없고, 불쌍히 여길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있으면, 우리는 가해자들을 불쌍히 여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원수들은 또 다른 피해자요 희생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들 또한 상처받은 부분이 치유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말투가 싸움꾼인 사람이 있습니다. 어딜 가든지, 싸움투로 말합니다. 시비조로 말합니다. 관공서에 가도 싸움투로 말합니다. 수퍼에 가도 싸움투로 말합니다. 식당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람이 가는 곳마나 싸움이 일어납니다. 말투가 바뀌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이들은 어딜 가나 싸움이 일어날까요? 그들 성품이라고요. 아닙니다. 그들이 인정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랑받지 못한 사람은 상처를 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이 거친 사람들을 보면,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사랑받지 못했구나.” 에베소서 4:32절은 말씀합니다.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4:32)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들을 용서해야 합니다. 치유의 마지막 과정은 용서입니다. 우리가 만약 용서를 실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습니다. 또한 지난날의 상처도 치유받을 길이 없고, 어떠한 원수와도 화평하지 못합니다. 성격장애가 오거나 신경증이 되고, 온 몸에 병을 얻게 됩니다.

 

심인성질환이 있습니다. 고혈압 심장병 당뇨 등 현대인의 많은 병이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암 발병의 70-80%가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합니다. 마음의 상처를 풀지 않으면 결국에는 암 덩이가 됩니다. 인생을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응어리진 마음을 풀어야 합니다.

 

미국에서 있던 실화입니다. 35세의 젊은 목사님이 노루 사냥을 갔습니다. 멀리 노루 한 마리를 조준하여 총을 쐈는데, 달려가 보니, 노루가 아니라, 사람이 총에 맞아 죽어 있었습니다. 법의 심판을 받아야 했지만, 윤리적 도덕적 책임을 지고 담임목사직을 사임해야만 하는 심각한 위기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내 인생과 목회는 다 끝났구나.” 교인들은 수군거립니다. “사람을 죽인 목사가 어떻게 목회를 할 수 있느냐? 당장 사임하고 교회에서 떠나라.” 교계와 언론도 시선이 싸늘해졌습니다. 결국 교회를 떠나야 할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교회 원로 장로님이 전교인 앞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을 죽인 목사님을 이 땅의 어느 교회가 받아 주겠습니까? 우리가 목사님을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 목사님은 평생 갈 곳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우리를 용서해 주셨듯이 우리도 예수님의 사랑으로 목사님을 한 번만 용서합시다.”

 

결국 젊은 목사님의 눈에도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 내립니다. 교인들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 내립니다. 목사님은 기도원에 들어가서 회개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목회에 충실해야 할 목사가 노루 사냥이나 하고 다녔으니 이런 사고가 날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회개합니다. 하나님께 철저히 회개하고 자신과 화평함으로 죄책감에서 치유받았습니다. 자기를 용서해준 교인들에게 감사하며 평생 사랑으로 섬기며 살았습니다. 이 목사님의 목회 철학은 용서가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십자가의 사랑과 용서를 설교 할 때마다 목사님도 울고 교인들도 울었습니다. 이 분이 댈러스 제일침례교회에서 50년간 목회하셨던 크리스웰 목사님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가운데 아직도 미움을 지닌 채 살아갑니까?

갈등하고 불화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 안에 미움이 있다면, 그 사람은 진정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천국에 갈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일서 4:20절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4:20)

 

세상에 흉이 없는 자가 어디 있습니까?

허물이 없는 자가 어디 있습니까?

털어서 먼지 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먼저 하나님과 화평하고 자신과 화평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웃과 화평해야 합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며/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며/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