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이제는 고백합니다.(누가복음 5:6-8)
주여, 이제는 고백합니다
누가복음 5:6-8
6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을 찢어지는지라
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8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로소이다 하니
포인트 워드: 고백
활용: 이 시대는 수많은 고백이 있다. 신앙인이 해야 할 3가지 고백은 무엇일까?
다같이 따라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영혼의 양식이며 영적 전쟁에서 무기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사랑 고백이다. 마음에 담아 놓은 사랑을 입으로 표현해야 한다.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종은 울리기 전에는 종이 아니다.” 사랑을 표현되어야 한다. “사랑은 동사다.”라는 말도 있다. 말로만 하는 사랑보다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신앙인에게 고백은 중요하다. 사도신경을 외운다. 주기도문을 외운다. 왜 이것이 중요한가? 로마서 10장 10절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10) “예수님의 나의 구주이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왕이십니다.” 이런 고백이 힘이 있다.
부부 사이에도 사랑의 고백이 필요하듯,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도 3가지 고백이 필요하다.
첫째, 하나님은 회개 고백을 원하십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눅5:8)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실 때의 장면이다. 갈릴리 호수에서 어부들이 그물을 씻고 있었다. 어부들은 밤새 수고를 했지만, 고기를 잡지 못했다. 허탈한 심정으로 그물을 씻는데,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배에 오르셨다. 배 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 요한 등 사람들이 그 말씀을 들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신 뒤,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놓고 고기를 잡으라”(눅5:4)
그런데 고기 잡은 어부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깊은 데로 가서 고기를 잡으라.” 베드로는 순종을 한다. 5절이다.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눅5:5) 말씀에 의지하여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던졌다. “와, 이게 웬걸. 그물을 걷어 올리자 고기가 가득찬 것이다. 허탈했던 마음이 기쁨의 순간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워낙 고기가 많아 다른 배도 불러서 두 배에 고기를 가득채우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신 것이다. 베드로의 그물 아래 고기를 준비하신 것이다. 믿음으로 그물을 내리자, 그 속에 몽땅 고기가 들어가게 하셨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보고, 예수님이 보통 분이 아니란 것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예수님이 주님인 것을 인정한 것이다.
그의 고백은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이다.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 회개의 고백이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한다. 내가 죄인임을 알아야 예수님이 필요하다.
죄가 무엇인가? 착하게 사는 사람들은 자기들은 죄가 없다고 생각한다. 정직한 사람들은 자기들은 죄가 없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죄가 없다고 생각한다. 교회 중직자들이나 목회자들은 자기들은 죄가 없다고 생각한다. 아니다. 잘못 생각한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 죄인이다.
나는 회개를 하나님이 주신 은혜라고 생각한다. 회개할 수 있다는 것처럼 좋은 것이 어디 있는가? 누구나 실수하고 있고 죄를 지을 수 있다. 하나님께 회개할 수 있는 것만도 행복하다. 그러나 회개할 기회를 빼앗길 날이 온다. 죽음의 때이다. 천국이 보이고 지옥이 보인다. 그러나 회개할 수가 전혀 없다.
어느 목사님이 이런 고백을 한다. 3년 동안 강단에 앉아 기도하면 눈물만 나왔다고 한다.
아내와 가정을 이루고 아들이 태어났다. 아내는 피아노 학원을 운영한다. 태어난지 2주 밖에 안 된 아들이 울었단다. 배가 고파서 울었을 것이다. 그런데 목사님은 그 아이가 운다고 빰을 30대나 때렸단다. 목사님 안의 폭력성이 여실히 드러난 것이다. 강단에서 기도하는데, 그 장면이 떠오른 것이다. 전혀 죄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두 번째는 딸이다. 딸이 돌이 지났을 때, 엎드려 뻗치고 다리 하나를 들으라고 했다. 군대식으로 기압을 준 것이다. 2살 짜리 아이에게 그런 행동을 한 것이다. 딸을 혼냈다면, 당연히 아들도 혼냈다. 하나님이 그 장면을 떠오르게 하면서 회개하게 하셨다.
요즘 부모들이 아동학대 사건이 많이 나온다. 목사님은 자기도 그런 사람이었다고 한다. 다행히 아이들이 죽지 않았을 뿐이지, 그 안에 있는 폭력성은 아이들에게 잔인했단다. 그러면 부인에게는 어떠했을까?
목사님은 성령님을 만나고 나서야 존재론적인 회개를 한 것이다. 목사이다. 예수님을 믿은지 20년이 넘었다. 그러나 그의 존재가 변화받지는 않은 것이다. 그러나 성령님을 만나고 나서야 철저히 통곡하며 회개했다.
우리 신앙인들은 어떤가?
죄사함의 은혜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다. 우리는 매일 반복적으로 죄를 짓는다. 남에 대해 험담하고 비난하고 뒷담화도 부끄럼이 없이 한다. 오늘날 신앙인들이 얼마나 방자한가? 함부로 말라고 함부로 행동한다. 위 아래가 없다. 반말을 하고, 무례한 행동을 한다. 그런데 진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행동 하나가 달라야 한다.
모태 신앙으로 살아 오고 있는 나도 고백한다.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
2021년 8월 2일 나는 뜨거운 회개의 눈물을 흘렸다.
2022년 1월 31일 설 전에 나는 다시 한 번 뜨가운 눈물을 흘렸다. “내 대화 속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다. 성령님을 모시고 대화에 임하지 않았다. 내 감정, 내 생각대로 말할 때가 많았다. 아내에게 미안하고, 자식들에게 미안했다. 성도님들에게 미안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회개의 고백을 해야 합니다. 이 고백은 죽는 순간까지 있어야 하는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신앙 고백을 원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베드로가 멋진 대답을 한다. “예,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메시야입니다. 또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한 마디 고백을 통해 베드로는 축복을 받는다.
“너는 베드로라 네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내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인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8-19)
예수님이 누구신가? 예수님은 성경에서 약속되어 있는 메시야이다. 예수님은 구원자이다.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믿지 않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성경 어디에게 다른 이름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약속한 것은 없다. 종교 다원주의는 사탄의 작품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또한 하나님 자신이시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내려 오신 것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른다. 그러나 입술의 고백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된다. 우리의 신앙 고백이 필요하다. 내 신앙 고백이 확실한 사람은 감사와 찬양이 나온다. 그러나 신앙 고백이 없는 사람은 원망과 불평이 나온다.
기생 라합은 여리고 사람이었다.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이 여리고에 왔을 때, 이렇게 말한다. 여호수아 2:11절이다.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수2:11)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입니다. 이 고백을 통해 라합은 구원을 받았다. 이 고백을 통해 예수님의 족보에 오른다. 보아스의 어머니가 라합이다. 다윗의 고조 할머니가 라합이다(살몬-보아스-오벳-이새-다윗)
욥은 30년 동안 고난의 세월을 보낸 사람이다. 자식이 죽고, 재산을 다 빼앗기고 몸이 병들고 친구들로부터 외면을 받았다. 심지어 가정도 파탄이 났다. 그런데 욥이 원망 불평하지 않은 이유가 있다. 그의 신앙고백 때문이다.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1)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1:22)
한나는 어떤가? 결혼하고 아이가 생기지 아니했던 여인이었다. 첩 브닌나를 통해 멸시를 받고 조롱을 받던 여인이었다. 하나님의 종으로부터 자식이 있으리라는 음성을 듣고 수심이 없던 여인이다. 1년 뒤 기적적으로 사무엘을 얻었다. 그녀는 자기만의 신앙고백을 한다. 사무엘상 2:6-7절이다. “여호와는 죽이기고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삼상2:6-7) 한나의 하나님은 그녀의 기도를 들으셨고 그녀를 높이 드셨다. 사무엘 선지자의 어머니로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기도하는 어머니의 표상이 되었다.
다윗의 고백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나의 방패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다.
“나의 힘이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는 자시오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시18:1-2) 다윗에게 하나님은 피난처요 방패이셨다. 하나님은 각 사람의 고백처럼 역사하셨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여러분에게 성령님은 어떤 분인가?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불가운데서도 능히 건져 내시는 분이다.”
바울에게는 어떤 분인가?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라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의 신앙고백을 듣기 원하십니다. 이 신앙고백이 확실하게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구원자입니다.”
저는 종종 말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선생님입니다. 저는 예수님의 학생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의사입니다. 나는 예수님의 학생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치료자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목자입니다. 나는 예수님의 양입니다.”
우리 다같이 우리 신앙을 고백해 볼까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구원자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왕입니다.”
마지막, 하나님은 우리 신앙인에게는 사명 고백을 원하십니다.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요21:17)
베드로는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저주하고 욕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닭이 울었습니다. 예수님의 눈과 베드로의 눈이 마주쳤습니다. 너무 부끄럽고 죄송스러웠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했기에 갈릴리에 돌아가서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아침을 드시고 베드로에게 3번이나 물어 보십니다.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님 그러합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 그러합니다. 내 양을 치라”
세 번째 묻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주를 주님께서 아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
예수님께서 첫 번째, 두 번째 물으신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아가파스 메”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느냐? 그러나 베드로는 “필로세”를 말합니다. 필레오의 사랑, 친구간의 사랑, 우정적인 사랑으로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처음 대답도 필로세입니다. 두 번째 대답도 필로세입니다. 예수님은 세 번 째 물어 봅니다. “베드로야 친구간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느냐?”(필레이스 메) 베드로가 말합니다. “필로세” 친구간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시죠?
그런데 우리는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에로스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남녀간의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스톨게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가족간의 사랑도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사랑은 필레오의 사랑입니다. 친구간의 사랑, 우정적인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친구간의 사랑이 무엇인가요?
친구들 간에는 신의를 지킵니다. 믿을만한 친구, 믿지 못할 친구가 있습니다. 어떤 친구는 이익을 주는 친구도 있고, 해롭게 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나쁜 친구는 평생 나에게 해를 끼치게 됩니다. 친구간의 사랑은 살아 보면 압니다. 믿음 생활하는 것도 살아보면 압니다. 진짜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 삶이 다릅니다.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 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15:14-15)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예수님의 친구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먹이라” 우리에게는 사명의 고백이 필요합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고백입니다. 천국에서 하나님 앞에 우리가 당당하게 드릴 고백입니다. 내가 할 일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인들이 하나님께 드릴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전도의 열매가 있습니까? 여러분 통해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이 있습니까?
성령의 열매가 있습니까? 여러분 삶에 성령님과 함께 살아간 흔적이 있습니까?
의의 열매는 어떤가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는 흔적이 있나요?
빛의 열매는 어때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열매는(엡5:9)?
어떤 목사님은 작은 교회와 선교사를 섬기는 일을 합니다.
문서 선교를 합니다. 생명을 살리는 글을 내어 보냅니다. 페이스 북이나 카카오톡으로 말입니다. 부흥집회를 열심히 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전도를 열심히 합니다. 전도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열매가 있던 없던 십자가를 들춰 매고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합니다. 어떤 분은 다음세대에 열심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성숙한 신앙인으로 자라나게 합니다.
각 사람이 할 일이 다 다릅니다. 그러나 분명 내가 하나님 앞에 해야 할 일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명은 어떤가요?
발렌타인 데이를 아시죠? 발렌타인이 마을 사람들을 위해 편지를 보냅니다. 그 편지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사람들은 성인으로 여겼습니다. 편지를 쓰는 것도 남을 위로하는 것도 큰 사명입니다.
“세상 부귀 안일함과 세상 근심하다가 주님 나를 찾으시면 어떻게 만날까
세상 일에 얽매여서 세상 일만 하다가 주님 나를 부르시면 어떻게 만날까
지금까지 내가 한 일 주님께서 보시고 훗 날에 나를 보고 무어라 하실까
주님 내게 오시면 나 어찌 대할까 멀리 방황하던 나 불쌍한 이 죄인
이제 주만 생각하며 세상 근심 버리고 두손 들고 눈물로써 주만 따라 가오리다“
우리가 하나님께 3가지 고백을 드려야 합니다. 첫 번째는 회개의 고백입니다.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예수님 없이는 안 됩니다. 두 번째가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구주입니다. 세 번째가 사명고백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 삶이 열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