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막절을 지키라(레23장)
초막절을 지켜라
레위기 23:39-44
39 너희가 토지 소산 거두기를 마치거든 칠 월 십오일부터 칠 일 동안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되 첫날에도 안식하고 제팔일에도 안식할 것이요
40 첫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 가지와 무성한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칠 일 동안 즐거워할 것이라
41 너희는 매년에 칠 일 동안 여호와께 이 절기를 지킬찌니 너희 대대로의 영원한 규례라 너희는 칠 월에 이를 지킬찌니라
42 너희는 칠 일 동안 초막에 거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할찌니
43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44 모세가 여호와의 절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공포하였더라
포인트 워드: 초막절
활용: 초막절을 지키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은 초막절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다같이 따라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영혼의 양식이며 영적 전쟁에서 무기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있던 일입니다. 목사님이 3년 전 주일 설교를 다시 했습니다. 그러자 기억력이 좋은 여집사님이 장로님께 따졌습니다. “장로님, 오늘 목사님 설교는 3년 전에 하신 설교를 재탕하신 것입니다. 이래도 되는 것입니까?
그러자 나이가 지긋하신 장로님이 말씀합니다. “집사님, 재탕은 좋으니까 하는 것입니다. 가수는 히트 친 노래를 수도 없이 부릅니다. 우리도 그런 노래를 수도 없이 듣습니다. 아마, 그 주일 설교는 목사님께서 은혜받은 설교인가 봅니다.”
여러분, 어떠신가요? 우리는 감동적인 소설이나 유명한 영화는 몇 번이나 다시 읽어 보고, 다시 봅니다. 어떤 분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라는 영화를 100번 본 사람도 있더라구요. 우리 신앙은 삶의 변화를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한 번 설교를 적어도 100번은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말씀이 내 삶에 녹아 들어갑니다. 내 생각이 변하고 말이 변하고 행동이 변하게 됩니다. 한 번 설교로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한국 교회 설교자들의 고민은 바로 이것입니다. 한 번 했던 설교는 다시 하면, 교인들이 싫어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은혜받은 찬송가를 한 번만 부릅니까? 여러번 부릅니까? 찬송가를 부를 때마다 은혜가 새롭습니다. 하나님 말씀도 그렇습니다. 읽고 또 읽다 보면, 새로운 은혜를 느낍니다.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은 설교를 해도 성령님의 감동,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따라 매번 새롭게 느껴집니다. 우리의 삶에 말씀의 은혜가 밀려와서 우리를 사로잡아야 합니다. 완전히 덮어 버려야 합니다.
오늘은 초막절과 추수감사절에 대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초막절은 수장절이라고도 합니다. 올리브, 포도 무화과 등 각종 과일을 수확하고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오늘날 추수감사절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7대 명절이 있습니다.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절, 초막절. 하나님은 광야에서 7대 명절을 말씀하셨습니다. 초막절은 중요한 절기입니다. 41절을 볼까요? “너희는 매년에 칠 일 동안 여호와께 이 절기를 지킬찌니 너희 대대로의 영원한 규례라 너희는 칠 월에 이를 지킬찌니라”(레23:41) 초막절은 한 번만 지키는 절기가 아닙니다. 매년 지켜야 할 절기입니다. “자자손손이 지킬 영원한 규례”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아파트에 살아도 베란다에 초막을 만듭니다. 낙타를 타고 가는 사람은 낙타위에 초막을 만듭니다. 배를 타고 가는 사람은 배위에 초막을 만들어 그 곳에서 자야 합니다. 여행 중에 호텔에서 지내야 하는 사람은 호텔 지붕위에 풀을 뜯어서 조금이라도 올려 놓아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초막을 만들고 그곳에 생활하는 것은 불편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영원한 규례로 이 절기를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하나님 여호와니라”(레23:43)
초막절 절기는 광야에서 지킬 절기가 아닙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지킬 절기입니다.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신명기 8장 7-10절을 보면, 이렇게 설명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로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곳은 골짜기에든지 산지에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들의 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너의 먹는 식물의 결핍함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로 네게 주셨음을 인하여 그를 찬송하리라” (신8:7-10) 가나안은 아름다운 땅이요, 먹는 식물의 결핍함이 없는 땅입니다.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옥토입니다. 사람이 살기에 가장 적합한 환경에서 지켜야 할 절기입니다.
사람들이 그렇잖아요? 살만하면 과거를 잊어버리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품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부족함이 있으면 원망 불평하고, 풍족하면 교만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잘 잊어버립니다. 신명기 8장 12-14절에서는 말씀합니다.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신8:12-14)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만 은혜를 잊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도 그렇습니다.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 못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잘 살다보면, 과거를 새까맣게 잊어버립니다.
하나님은 7대 명절을 주시면서 당부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신8:18)
하나님께서 과거를 잘 잊어버리는 백성들에게 미리 교훈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삶에 만족하면 우리는 종종 과거의 고난과 힘든 순간을 잊어버립니다. 현대인들의 특징이 잘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를 보세요. 각 집마다 자동차가 있습니다. 텔레비전이 있고, 냉장고가 있습니다. 세종대왕도 누리지 못했던 혜택을 우리가 누리고 있습니다. 수도에서 따뜻한 물과 찬물이 나옵니다. 이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절대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마른 솔잎을 갈퀴로 긁어서 땔감으로 사용했습니다. 지푸라기를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쌀겨를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쌀겨는 쌀 껍데기입니다. 풍로가 있었습니다. 바람을 일으키는 기구였습니다. 예전에는 솔잎이나 솔방울을 긁어 모아서 불을 땠습니다. 70년대 80년대 사람들은 힘든 시기를 보냈습니다. 60이상 된 어른들은 보릿고개를 경험하면서 배고픔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기도 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축복의 세월을 보내는 것은 첫째가 하나님의 은혜요, 둘째가 부모님들의 은혜입니다. 경부고속도로는 베트남에 참전했던 국인들의 핏값으로 지어진 것입니다.
다윗왕의 장점이 무엇인지 아세요?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시편 103편 2절입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찌어다”(시103:2) 다윗왕은 양을 치는 목동이었습니다. 목동이 왕이 된 것입니다. 집안에서도 막내였습니다. 다윗왕의 집은 그렇게 부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택하여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게 하고, 존귀한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다윗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늘 고백합니다. “내 영혼아 하나님을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찌어다” 역사를 잊은 백성은 미래가 없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은 백성은 미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누리는 축복이 절대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누리지 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의 결과입니다.
손경민 목사님의 은혜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 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은혜였소.
해가 뜨고 저녁의 노을 봄의 꽃향기와 가을의 열매
변하는 계절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은혜였소.“
둘째, 하나님은 심고 거두는 법칙을 생각하라고 말씀합니다.
“첫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 가지와 무성한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칠 일 동안 즐거워할 것이라”(레23:40)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감람나무 열매, 즉 대추야자가 우리나라 꽂감 같다고 합니다. 진짜 맛이 있다고 합니다. 가나안 땅에서는 2곡 5과의 풍성함이 있었습니다. 보리 농사 밀 농사, 포도 농사, 무화과, 석류, 올리브, 감람나무 열매 등 먹을 것이 풍족했습니다.
신명기 16장 15절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찌니라”(신16:15) 씨를 뿌리고 수확하는 것처럼 기쁘고 즐거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씨를 뿌렸는데, 추수할 것이 없다면, 그것처럼 슬픈 일은 없습니다. 피땀흘려 노력했는데, 헛수고로 끝이 난다면, 마음이 상처를 입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서 햇빛과 비를 주시고, 적당한 바람이 불게 하시면서 풍성한 수확을 얻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초막절이 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종려나무로 초막(수카)을 짓습니다. 광야 생활을 기억합니다. 가장 행복한 순간에 가장 힘든 순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초막절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4개의 식물을 준비합니다. 40절에 보면,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가지, 무성한 가지, 시내버들’입니다. 이 네 가지를 아르바 미님이라고 하는데 초막절 내내 이 네 개의 나무를 묶어서 예배드릴 때마다 사용합니다. 아름다운 실과는 에트로바라고 하는데 맛이 좋다고 합니다. 이것은 맛도 좋고 향도 있습니다. 말씀을 배우고 실천도 하는 사람입니다. 종려나무는 맛은 있지만 향은 없다고 합니다. 룰라보라고 하는데, 말씀을 배우지만, 실천하지 않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무성한 가지는 맛은 없지만, 향이 있다고 합니다. 말씀을 배우지 않지만, 실천에 옮기는 사람입니다. 시내버들은 맛도 없고, 향도 없다고 합니다. 말씀을 듣지도 않고, 행하지도 않는 사람을 의미한답니다.
초막절은 농작물을 수확을 하고 지키는 절기입니다. 올리브 나무에서 올리브를 땁니다. 포도 나무에서 포도 열매를 수확합니다. 종려나무에서 종려나무 열매를 얻습니다. 심은 대로 거둡니다. 콩 심은 데서 콩이 나고 팥 심은 데서 팥이 납니다. 우리가 풍성한 수확을 얻으려면 심어야 합니다. 심지 않으면 거둘 것이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에서 말합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6:7) 착한 일을 많이 하면 착한 열매를 거둡니다. 나쁜 일을 하면 나쁜 열매를 거둡니다. 추수감사절에 이 진리를 다시 한 번 새겨 보아야 합니다. 기도를 심으면 기도의 열매를 거두고, 성령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면 성령의 열매를 거둡니다. 물질을 심으면 하나님께서는 30배 60배 100배로 갚아 주십니다.
예화)
1882년 감리교 신자였던 윤치호 선생이 미국에서 교육을 받고 한국에 돌아오려고 했습니다. 그때 우리나라에는 선교사가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가 고국으로 돌아오려고 짐을 싸다가 200달러가 남아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대부분은 그 돈으로 무엇을 합니까? 고국에 사는 사람에게 선물을 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감리교 남선교부를 찾아 가서 부탁합니다.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님이 없습니다. 선교사를 파송하는데 사용하여 주세요.” 그리고 1885년 4월 5일 제물포 항에 아펜젤러 선교사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첫발을 디디게 되었습니다. 윤치호 선생이 심은 200달러가 3년 후에 싹이 나고, 지금은 엄청난 열매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초막절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개의 나무를 흔들어 댑니다. “아름다운 실과 종려가지, 무성한 가지, 시내 버들” 이것을 흔들면서 본인의 삶을 점검해 보는 것입니다. 나는 과연 말씀을 읽고 실천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말씀을 읽지도 않고 실천하지도 않는 사람인가?
세상 만사의 이치가 있어요? 말한대로 되고, 생각한 대로 된다. 그리고 심은 대로 된다.
부자가 되고 싶으세요? 물질을 심으세요? 하나님께서 물질로 갚아 주십니다.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말3:12)
덤으로 받는 축복을 받고 싶으세요? 하나님 말씀을 실천에 옮겨 보세요.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네가 채우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얻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얻게 하사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신6:10-11)
추수하는 계절에 심고 거두는 법칙을 기억해야 합니다. 심으면 거둡니다. 반드시 수확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심지 않으면 거둘 것이 없습니다. 시편 126편 5절을 보세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126:5)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상황입니다.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은 상황입니다.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씨를 뿌리러 들녘으로 가랍니다. 왜요? 뿌리지 않으면 추수때에 거둘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은 공부하고 싶지 않지요? 놀고 싶지요. 잠만 자고 싶지요? 하나님은 그래도 공부하라고 합니다. 그래야 기쁨으로 단을 가지고 돌아 온답니다. 전도하는 것이 힘들지요? 그래도 하랍니다. 천국에서 상급이 크답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미국은 세계 제 1의 국가입니다. 세계의 경찰의 역할을 담당합니다. 전 세계인들이 영어를 사용하고자 합니다. 어떻게 200년 밖에 안 된 나라가 세계 제일의 국가가 될 수 있었을까요? 청교들이 귀중한 축복의 씨앗을 뿌렸기 때문입니다.
1620년 영국에서 102명을 태운 메이 플라워호가 메사추세츠 주의 플리머스에 도착합니다.
청교도들의 삶에는 언제나 감사가 있었습니다.
- 180톤밖에 안 되는 작은 배이지만, 그 배라도 주심을 감사.
- 평균 시속 2마일로 항해했으나 117일간 계속 전진할 수 있었음에 감사. 1마일-1.6km
- 항해 중 두 사람이 죽었으나, 한 아이가 태어났음에 감사.
- 폭풍으로 큰 돛이 부러졌으나, 파선되지 않았음에 감사.
- 여자들 몇 명이 심한 파도 속에 휩쓸렸지만, 모두 구출됨에 감사.
- 인디언들의 방해로 상륙할 곳을 찾지 못해 한 달 동안 바다에서 표류했지만, 결국 호의적인 원주민이 사는 곳에 상륙하게 해주셔서 감사.
- 고통스러운 3개월 반의 항해 도중, 단 한 명도 돌아가자는 사람이 나오지 않았음에 감사.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감사할 것이 전혀 없음에도, 아니 불평거리가 가득했음에도 불구하고 청교도들은 오히려 그 속에서 감사의 제목을 7가지나 찾아냈다. 이것은 정박할 좋은 항구를 찾아낸 것보다 더 위대한 일이다. 이런 감사를 발견해낸 '눈'이야말로 청교도들의 힘이었고 신앙고백이었다. 어쩌면 오늘의 미국을 만든 참된 힘은 바로 이런 청교도들의 감사 거리를 찾아낼 줄 아는 '눈'에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하루, 우리의 일생에도 이런 청교도들의 눈으로 찾아보면 감사거리는 수없이 많이 숨어 있을 것이다.
셋째, 추수감사절에 천국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막에 40년간 살았지만, 초막이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해가 지고, 밤 하늘에 별들이 반짝이면 유태인 부모들은 자녀들을 교육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처럼 그 자손을 많게 하신다고 하셨다. 우리 민족은 번성할 것이다. 우리 민족은 가나안 땅으로 반드시 들어갈 것이다.”
광야 40년은 가나안에 들어가는 준비 기간이었습니다. 초막절에 백성들은 주로 시편 113편이나 118편을 암송하고 선포한다고 합니다. 특히 시편 118:25절을 암송하고 선포합니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시118:25) 대제사장이 실로암 연못에서 물을 떠서 붓으면서 외칩니다. “호쉬아나” “호산나”(여호와여 구원하소서).
메시야를 기다리는 절기가 초막절입니다. 초막절은 우리가 천국에서 누릴 축복을 상징합니다.
다니엘 2:44에서 그 때를 이렇게 예언합니다. “이 열왕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단2:44)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이 나라를 얻으리니 그 누림이 영원하고 영원하고 영원하리라”(단7:18)
하나님이 초막을 지으라는 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나그네임을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나그네는 언젠가는 떠납니다. 자기 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집이라도 초막같은 일시적인 집에 불과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2:11)
유목민은 한 곳에서 정착하지 않습니다. 항상 떠돌아 다닙니다. 우리 모두가 나그네입니다. 언젠가는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것을 말씀하고 싶은 것입니다. 초막에서는 가나안 땅이 목표이듯, 우리는 천국을 목표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천국을 소망하면서 오늘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6장 산상수훈에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마6:19-20)
하늘나라를 소망하고 하늘에 보화를 쌓아두는 자가 지혜자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33세에 죽으면서 유언을 남겼습니다. “내가 죽거든 묻을 때, 손을 밖에 내 놓아 남들이 볼 수 있도록 하시오.” 빈 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다릅니다. 빈손으로 왔지만, 빈손으로 가지 않습니다. 천국에 상급을 받으러 갑니다. 이것이 차이점입니다. 성도들에게 죽음은 슬픈 날이 아닙니다. 하늘의 상급을 받는 축복의 날입니다. 상 받으러 가면서 슬픈 사람이 있나요?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왜 즐거운 추수감사절을 초막에서 보내라고 하셨는지 아셨지요?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풍요를 누리면서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불행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은 것입니다. 둘째, 심고 거두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심은대로 거두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거두고 싶은 것을 심으세요. 하나님은 반드시 거두게 하십니다. 물질을 심으면 물질을 거두고, 헌신을 하면, 건강을 주십니다. 감사를 심으면 감사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힙니다. 마지막으로, 감사절에는 천국을 생각해야 합니다. 인생은 나그네입니다. 우리의 본향은 천국입니다. 초막에서 가나안을 사모하듯, 늘 천국을 생각해야 합니다. 내 영혼이 잘 되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성도님들이 하늘의 복을 받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