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망의 함정에서 나오라
원망의 함정에서 나오라
민수기 11:31-35
31 바람이 여호와에게로서 나와 바다에서부터 메추라기를 몰아 진 곁 이편 저편 곧 진
사방으로 각기 하룻길 되는 지면 위 두 규빗쯤에 내리게 한지라
32 백성이 일어나 종일 종야와 그 이튿날 종일토록 메추라기를 모으니 적게 모은 자도
십 호멜이라 그들이 자기를 위하여 진 사면에 두었더라
33 고기가 아직 잇사이에 있어 씹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대하여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셨으므로
34 그곳 이름을 기브롯 핫다아와라 칭하였으니 탐욕을 낸 백성을 거기 장사함이었더라
35 백성이 기브롯 핫다아와에서 진행하여 하세롯에 이르러 거기 거하니라
포인트 워드: 함정
활용: 하나님은 우리를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길 원하신다. 그러나 그 길이 쉬운 길은 아니다. 우리는 영적 훈련을 하면서 약속의 땅에 가야 한다. 믿음과 사랑의 훈련이 필요하다.
성경을 가슴에 안고 고백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영혼의 양식이며 영적 전쟁에 무기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함정이란 말은 짐승을 잡기 위하여 파놓은 구덩이를 말합니다. 함정의 순우리말이 ‘허방다리’입니다. 빠져 나올 수 없는 곤경이나 남을 헤치기 위한 계락을 말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함정을 함정으로 생각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 본문 같은 경우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초자연적인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메추라기가 하룻길 되는 지면 위 두 규빗 정도로 내려 앉았습니다. 오랫 동안 고기 맛을 느끼지 못한 백성들은 메추라기를 잡아 고기 맛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룻 길이 얼마나 될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충분히 먹을 수 있는 메추라기가 쌓인 것입니다. 높이가 두 규빗, 약 1m입니다. 그런데 이런 초자연적인 기적이 축복인가요? 저주인가요? 이걸 알아야 합니다. 메추라기의 기적은 저주입니다.
기도와 감사로 인해 얻은 것이라면 당연히 축복입니다. 그러나 원망과 불평에 의한 것이라면 축복이 아닙니다. 저주입니다. 초자연적인 기적이 일어났다고 할찌라도 결과는 부정적입니다. 형통한 것이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민수기 11장 4절입니다.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민11:4-5) 잡족들이 원망 불평이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함께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합니다. “하루나 이틀이나 닷새나 열흘이나 이십 일만 먹을 뿐 아니라 코에서 넘쳐서 싫어하기까지 일 개월 간을 먹게 하시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 중에 거하시는 여호와를 멸시하고 그 앞에서 울며 이르기를 우리가 어찌하여 애굽에서 나왔던고 함이라 하라”(민11:20)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의 결과로 메추라기의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함정입니다. 잘 되는 것처럼 보이는데, 안되는 것입니다. 축복처럼 생각되는데 저주입니다. 형통인 것처럼 보이는데, 불통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망과 불평하는 자들에게 심판합니다. “고기가 아직 잇사이에 있어 씹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대하여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기브롯 핫다와라 칭하였으니 탐욕을 낸 백성을 거기 장사함이었더라”(민11:33-34) 하나님께 원망불평의 죄를 지은 사람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곤조기도라고 합니다. 곤조라는 말은 ‘근성’이라는 일본 말입니다. “성깔, 성격, 고집”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곤조부리다는 “성깔부리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떼를 쓰는 기도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도 응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기도는 내 뜻을 관철시키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순종하는 것이 바른 기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악을 쓰면서 떼를 쓰면서 자기 뜻을 이루려고 하는 분들이 있어요. 마치 어린 아이들이 울면서 떼를 쓰는 것처럼 말입니다. 신앙적으로 어린 아이들이 하는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 생활을 내 뜻, 내 맘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이루어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자기 뜻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길 간구하고 있잖아요?
메추라기의 기적은 원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큰 재앙”(severe plague) “심한 전염병”으로 치셨다는 것입니다. 그 지역을 기브롯 핫다와(탐욕의 무덤)이라고 합니다. 이는 “탐욕의 무덤”이란 뜻입니다. 탐욕을 부리다가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러면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망의 죄를 지었을까요? 초자연적인 기적을 경험한 분들이 왜 힘든 현실 앞에서 원망 불평으로 죄를 지었을까요? 아마 광야길의 고단함이 이런 죄를 짓게 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기적을 체험했지만, 현실이 고달프고 힘들 때, 우리는 언제든지 이들처럼 원망과 불평을 할 수 있습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잊어버리고, 기억하지 말아야 할 것은 기억하는 혼란을 초래할 수가 있습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 할 당시 백성들의 고난이 얼마나 심했는지 출애굽기 2장 23절을 보겠습니다. “여러 해 죽은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출2:23)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흙이기기와 벽돌 굽기, 농사일도 했습니다. 먹고 사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노예처럼 자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부부 금실은 좋았나 봅니다. 학대 받을수록 더욱 번식하고 창성하였습니다(출1:12)
노예의 삶에서 자유의 삶을 얻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홍해 바다를 건넜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속성이 마라의 쓴 물을 만나면서 원망 불평이었습니다. 이들은 다베라 지점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벌써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의 근성에는 원망 불평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광야로 인도하신 것은 우리 안에 뿌리 깊은 원망과 불평을 빼내기 위함입니다. 어떻게 원망 불평을 빼내나요? 감사하면 됩니다. 어떤 상황 어떤 조건에서도 감사하면 원망 불평의 마귀는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온라인 취업포털 ‘사람인’에서 기업 인사담당자 593명을 대상으로 퇴사시키고 싶은 직원을 발표했습니다. 응답한 기업 인사 담당자 71.2%가 퇴사시키고 싶은 블랙리스트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10가지를 볼까요?
1. 회사에 불평 불만이 많은 직원(50%)
2. 업무 능력 및 업무 성과가 떨어지는 직원(48.3%)
3. 잦은 지각 등근무 태도가 불량한 직원(44.1%)
4. 예의가 없는 직원(41.2%)
5. 협동심이 전혀 없는 이기적인 직원(36.5%)
6. 회사의 지시를 무시하는 직원(33.0%)
7. 지나치게 자기주장이 강한 직원(23.5%)
8. 업무 마무리를 안하고 퇴근하는 직원(19.7%)
9. 성과에 무임승차하는 직원(19.7%)
10. 회사에 경제적인 손실을 끼친 직원(15.6%)
탈무드에 보면 우리의 생각 속에는 두개의 주머니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기억의 주머니요, 또 하나는 망각의 주머니 입니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우리가 기억하고 싶은 것은 기억의 주머니에, 망각하고 싶은 일은 망각의 주머니에 집어 넣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에 혼란이 일어나면 우리는 기억해야 할일을 망각의 주머니에 넣기도 하고, 망각해야 할일을 기억의 주머니에 집어 넣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정서균형이 깨지면서 우리는 모든일에 불평하고 원망하는 사람으로 돌변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다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절대 잊지 않으리라.” 모든 것을 다 잊어도 좋지만, 절대 은혜 만은 잊으면 안 됩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찌어다”(시103:2) 은혜를 잊어 버리는 순간, 찬양의 자리는 원망의 자리가 됩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잊어버린다 해도,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신 것을 잊어 버리면 안 됩니다.
간증-김병삼 목사
어느 목사님 어머니가 치매에 걸렸습니다. 자녀들을 몰라봅니다. 목사들이고, 사모들인데 몰라봅니다. 그 어머니도 감리교 목사 사모로 섬겨왔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 즐겨 부르던 찬양이 있습니다. 찬송가 499장(새442장)입니다.
“저 장미꽃 위에 이슬 아직 맺혀 있는 그 때에 귀에 은은히 소리 들리니 주 음성 분명하다
주가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 하나 괴론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다
주가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청교들은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고 합니다.
“오 하나님, 당신은 우리에게 너무 많은 은혜들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 더 구하는 것을 용서하옵소서. 저희에게 은혜를 잊어버리지 않는 은혜를 주옵소서.”
둘째는, 현재의 축복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망하고 있습니다. 불편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족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말 그들에게는 불편함과 부족함만 있었을까요? 하나님은 지금 그들에게서 모든 축복을 다 거두어 가셨을까요? 아닙니다. 오늘의 본문은 아직도 지속되고 있었던 축복을 증언합니다. 만나는 아직도 하늘에서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백성은 함께하는 축복으로서의 만나를 인해 감사하기 보다 없는 고기를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4절에 보면 "--누가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4절 앞부분에는 이 불평의 원인을 두 가지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첫째 원인은, 그것이 탐욕이라고 지적하고 있고, 둘째원인은 그들이 이 탐욕의 라이프 스타일을 '섞여사는 무리'(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섞여 애급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었던 이방인)에게서 배웠다고 기록합니다. 이것을 오늘날의 방식으로 표현하면 성도들이 탐욕의 라이프 스타일을 불신자에게 영향받은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잡족, 잡놈을 잡아 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는 부족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방송을 통해, 친구들과의 만남을 통해 비교하다 보니, 원망과 불평이 생긴 것입니다.
처음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만나를 선물 받았을 때 그들은 꿀맛이라고 감격해 했습니다. "도대체 이것이 무엇이냐?'(만후/만나)고 소리치며 놀라워 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이 만나는 감격의 대상이 되지 못했습니다. 만나를 축복으로 바라보는 눈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없는 고기를 달라고 소리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축복에 익숙해지면 축복을 축복으로 바라보는 마음을 상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족하고 불편한 가운데서도 이미 주신 축복에 집중할 수 있는 사람들은 고난을 넘어서는 새 역사를 창조할 수 있습니다.
동화작가 안델센을 기억하십니까? 그는 본래 구두고치는 가난한 아버지와 남의 집에서 빨래하는 어머니슬하에서 자랐습니다. 얼마나 가난했느냐 하면 그가 태어났을 때 아기침대가 없어서 어느 부자가 장례식장에 갔다버린 평상을 개조해서 아기 침대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안델센의 아버지는 알콜 중독자이어서 매일밤 술에 취해 돌아와 아들의 뺨을 때리곤 했습니다. 그는 단 한 시간의 문학수업도 받지 못한 초등학교 중퇴생 이었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자라나며 어떻게 그리도 아름다운 동화를 쓸 수 있었느냐는 물음에 그는 후일 이런 대답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나는 나의 불편한 환경속에서도 베풀어진 축복을 붙들기로 했습니다. 나는 비록 아버지가 무서운 때도 많았지만 아버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기를 즐거워했고, 나의 가난한 다락방에 누워 상상하기를 즐거워 했습니다. 나는 나의 아버지가 여전히 좋은 분이라고 믿었고 나의 가난한 집을 나의 축복이라고 믿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나의 역경은 나의 축복이었지요. 나는 가난했기에 '성냥팔이 소녀'를 쓸수 있었고, 내가 못생겼다고 놀림 받았기에 '미운 오리새끼'를 쓸수가 있었지요.”
그렇습니다. 광야길에서도 여전하신 주의 축복을 기억한다면 우리도 원망의 이야기를 사랑의 이야기로 바꾸어 쓸 수가 있습니다.
“현재가 축복입니다.” “일상이 축복입니다.” 이 말을 가슴 속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셋째로, 미래의 약속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길에서 적지 않은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들은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까? 가나안이 아닙니까!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좀 힘들어도 조금만 견디면 가나안에 도달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 원망이 웬 말입니까? 가나안의 전망을 상실한 때문입니다. 가나안의 약속을 잊은 까닭이었습니다. 만일 이 백성들이 가나안을 마음으로 보고 있었다면 원망에 빠져들지 않았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도상에서 경험하는 대부분의 좌절과 절망은 인생의 목표 혹은 희망을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그곳은 아름다운 땅이다.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는 곳이다.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 석류와 감람나무 대추야자의 소산지이다. 먹는 식물의 결핍함이 없는 곳이다. 아무 부족함이 없는 곳이다. ”(신8:7-9)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로 네게 주셨음을 인하여 그를 찬송하리라”(신8:10)
미래적 축복의 선취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주실 축복을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나는 축복의 사람이다. 나는 잘 되는 사람이다. 내게는 부족함이 없다. 하나님이 늘 나와 함께 하신다.”
플로렌스 채드윅이란 수영선수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영국과 프랑스를 수영으로 왕복한 최초의 여성 선수였습니다. 1952년. 7.4일 34세의 나이로 미국 캘리포니아 카탈리나 섬에서 본토의 롱비치까지 34km의 거리를 수영으로 횡당하는 것에 도전장을 냈습니다. 모두들 영국 해협을 헤엄쳐 왕복한 그녀였기에 성공하리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16시간의 사투 끝에 그녀는 목표를 800m도 남겨 두지 않은 상황에서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녀가 말합니다. “힘들거나 추워서가 아닙니다. 건너편의 땅만 보였어도 포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코치님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외쳤지만, 안개 때문에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를 주저 앉게 만든 것은 다른 어려움이 아니라, 목표를 가려 버린 안개 때문이었습니다. 두 달 후, 플로렌스 채드윅은 다시 같은 코스에 도전합니다. 이날 역시 짙은 안개로 해안선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남자 기록을 2시간이나 단축시킨 신기록을 세웠습니다.
때때로 인생의 광야 길에서 우리는 목표에 대한 시야를 상실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가 방황의 때입니다. 그때가 원망의 때입니다. 그러나 그때에라도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약속의 땅을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는 다시 일어나 믿음의 행진을 계속할 것입니다.
광야의 기온이 차가우십니까? 안개가 시야를 가리우고 있습니까? 모래바람이 아프게 때리고 계십니까? 약속의 말씀을 붙잡으십시오. 말씀 안에서 주께서 그려주신 자신의 미래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 보십시오. 그리고 다시 도전하십시오. 지금까지의 인도의 은혜를 감사하십시오. 아직도 함께하는 축복들에 대해 기뻐하십시오. 미래의 약속을 주장하며 나아 가십시오. 눈앞에 일고 있는 모래폭풍을 바라보고 주저앉지 마십시오. 멀리 보십시오. 주님이 보여주시는 목표를 향해 일어나 다시 걸으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광야 길은 원망의 길이 아닌 찬양의 길이 되실 것입니다.
플로렌스 채드윜은 마지막 1시간여의 힘든 수영기간을 앞두고 안개가 목표지점을 가리우고 있었을 때에 이렇게 자신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 안개가 보이지. 저 안개는 목표지점에 가까웠다는 싸인이야. 보라고. 저 안개가 너를 환영하고 있는거야. 저기는 승리의 입구야. 저 안개 바로 뒤에 승리가 있는거야. 맞아. 안개뒤에는 승리야’. 그때부터 "안개는 승리의 입구" "안개뒤에는 승리" "안개뒤에는 승리"하고 소리치며 전진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모두 안개를 장애물로 볼 필요가 없습니다. 광야길의 안개를 승리의 입구로 보십시오. 안개뒤에 기다리는 승리의 선명한 목표를 바라 보십시오. 찬양이 터져 나오지 않습니까? 감사가 터져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제 모든 원망을 작별하십시오. 파도속에 묻으십시오. 그리고 파도의 물결을 타고 약속의 땅으로 날아 가십시오.
원망의 함정에서 빠져 나오는 좋은 비결은 감사입니다. 범사에 감사가 기적을 가져옵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5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