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신 강단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박도식 2021. 6. 18. 15:02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본문 마1:1-6

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 이새는 다윗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포인트 워드: 예수님의 족보

활용: 예수님은 이 땅에 왜 오셨는가? 성경에 말하는 예수님의 족보는 무엇일까?

 

다같이 따라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영혼의 양식이며 영적 전쟁에서 무기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마태복음 1장은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말씀합니다. 본문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낳고 낳고입니다. 아마 오늘 집에 갈 때에도 낳고 낳고를 기억할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마태복음 1장은 산부인과 의사들이 제일 좋아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잠이 안 올 때 읽은 책이 마태복음 1장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1장에는 엄청난 영적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3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분으로 묘사합니다. 유대인이 가장 존경하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성군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소개합니다. 누가복음은 이방인이었던 의사 출신 누가가 헬라인을 대상으로 사람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예수님이 한 인간 요셉의 아들로 태어났음을 강조하고, 그 근원인 하나님께 이르는 인간적인 족보를 강조합니다.

 

두 족보의 차이는 첫째, 마태복음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부터 시작하여 예수님에게 이르는 권위적인 수직하강 족보입니다. 누가복음은 그리스 로마 족보처럼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아담을 거쳐 하나님에게 이르는 상승하는 족보입니다. 둘째, 마태복음의 족보는 유대인의 완전수 7의 배수이기도 하지만, 다윗의 게마트리아(달렛4, 바브6, 달렛4)를 완성합니다.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14, 다윗부터 바벨론 포로로 잡혀갈 때까지 14, 바벨론 포로 이후 예수님까지 14대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총 57명입니다. 있는 그대로 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셋째, 마태는 유대인으로 왕의 족보를 다윗의 아들로 솔로몬 왕으로 이어갑니다. 누가는 이방인으로 다윗의 아들을 나단으로 이어갑니다(3:31). 그 이유는 누가의 입장에서 볼 때, 다윗 왕조의 통치에 대한 반발이거나 육적인 다윗 왕조의 멸망에 대한 예언(22:28-30, 36:30-31)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넷째, 예수님의 할아버지에 대해 마태복음에서는 유대의 전통을 따라 요셉의 아버지 야곱을 언급하면서 아버지의 족보를 말합니다(1:15). 그러나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아버지인 헬리로 기록하며 어머니의 족보를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마태복음 족보에 한 가지 중대한 특징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모든 족보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 땅에 탄생할 수 있었고, 우리의 지난날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게 합니다.

 

첫째, 예수님의 약속의 아들이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1:1)

 

예수님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선언한 것은 예수님이 약속의 자손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했을 때, 하나님의 다음과 같이 약속하셨습니다.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 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22:16-18)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유대인 뿐 아니라 천하만민이 구원을 얻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오시기 2500년 전에 아브라함을 통해 약속의 아들인 메시야가 탄생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다윗왕은 어떤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도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다윗입니다. 이스라엘의 국기에는 다윗의 별이 있습니다. 사무엘하 716절입니다.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삼하7:16) BC 1000년 전에 다윗의 가문을 통해 약속의 아들 메시야가 탄생할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이사야 11:1-2절에서는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11:1-2) 주전 700년 전에 이새의 자손가운데 메시야의 탄생을 예언했습니다.

 

예수님은 탄생은 창세기에서부터 예언되었습니다. 그럼 여러분은 어떤가요?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의 아들 딸이 되었습니다. 에베소서 14-5절입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1:4-5)

 

우리 또한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입니다. 창세 전에 하나님이 미리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게 하시려고 예정하셨습니다. 우리는 약속의 아들, 딸입니다. 우리는 우연하게 무가치하게 태어난 것이 절대 아닙니다.

 

어떤 아이가 공원에 놀러 갔습니다. 벤치에 앉아 있는 아저씨 곁에 커다란 개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아저씨, 아저씨네 개는 사람 물어요?” “아니, 우리 개는 절대 사람 안 문단다.” 그래서 아이가 개를 쓰다듬으려고 하는데 그 순간 개가 아이의 손을 꽉 물고 말았습니다. 화가 난 아이가 따졌습니다. “아저씨, 아저씨네 개는 절대 사람 안 문다고 했잖아요?” 아저씨가 말합니다. “그래 맞아, 우리 개는 절대 사람 안 물어. 근데 이 개는 우리 개가 아니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신앙인은 약속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기로 작정하신 분들입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3:6)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3:9)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으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3:13-14)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브라함의 복을 주기 원하는 분입니다. 아브라함은 물질적인 복을 받았습니다. 집에서 길리운 사람이 318명의 장정입니다. 그 가족까지 하면 1000명 이상을 먹여 살리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승리의 복을 받았습니다. 적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회춘의 복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임마누엘의 복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영생의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함께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이 복을 받기 원합니다.

 

우리의 삶을 보세요?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하나님은 축복하신다는데, 왜 염려합니까? 왜 불안해 하나요? 왜 근심 걱정에 사로잡혀 있나요?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들은 약속의 자녀들입니다. 이 땅에는 악한 영들이 있습니다. 악한 영의 공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6:14-15) 하나님의 자녀들은 한 때는 어려움을 겪을 수 있지만, 나중에는 그 자녀 손들에게 꼭 승리하는 축복을 받습니다. 우리가 끝까지 믿음을 가지고 인내하며 나아갈 때, 반드시 복을 받을 줄 믿습니다.

 

시편118편에서 시편기자는 말합니다. “열방이 나를 에워쌌으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희를 끊으리로다 저희가 나를 에워싸고 에워쌌으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희를 끊으리로다 저희가 벌과 같이 나를 에워쌌으나 가시덤불의 불같이 소멸되었나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희를 끊으리로다”(118:10-12) 여호와의 이름으로 승리를 약속받았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영적은 사람을 세우십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1:2)

 

유대 사회는 장자권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뒤를 이은 자는 장자 이스마엘이 아니라, 영적 계보인 이삭이었습니다. 이삭의 뒤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자인 에서가 뒤를 이은 것이 아닙니다. 영적 계보는 야곱이 이었습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12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첫 번째 장자 르우벤이 계보를 이은 것이 아니라, 넷째 아들 유다가 영적 계보를 잇고 있습니다. 특별히 유다는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했을 때, 살리는 데 앞장을 섰던 사람입니다.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덮어둔들 무엇이 유익할까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고 그에게 우리 손을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혈육이니라”(37:26-27)

 

우리도 바로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영적인 사람이 축복의 사람이며, 믿음의 사람입니다. 고린도 전서를 보면, 교회 안에서 3가지 유형의 신자들이 나옵니다. 가장 먼저는 육에 속한 사람’(the person without the Holy Spirit)입니다. 이런 사람은 교회에 나오지만, 직분을 받았지만, 구원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고린도전서 2:14절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2:14) 교회에 나오지만, 성령님을 몰라요. 영적인 세계도 모릅니다. 성경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들은 성령으로 산다, 성령을 받으라. 성령을 체험하라.” 그러면, 속으로 생각합니다. ‘미친 놈들이구나. 미련한 자들이구나. 너무 광적으로 믿는구나.’ 육에 속한 신앙인들은 하나님을 위한 헌신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제자가 되는데도 관심이 없습니다. 남을 위한 희생도 없습니다. 단지 복을 받고 종교 생활하는 것으로 만족을 합니다. 진짜 예수님을 믿는 것은 성령을 체험하고 성령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으로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3:5-6)

 

그 다음 어린 아이와 같은 육신에 속한 사람’(The worldly person)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을지라도 더 이상 영적 성장을 하지 못하고 어린 아이 상태로 머물러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고전3:1-3)

 

이런 사람들은 교회에 오래 나왔어도 은혜를 받고 축복을 받았습니다. 헌신도 하고 봉사도 합니다. 중직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장로님이 되고 권사님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어린아이 수준입니다. 밥을 먹지 못하고, 죽을 먹고 사는 신앙인입니다. 예배 생활에 성공하지 못합니다. 헌금 생활에 성공하지 못합니다. 어느 교회에서는 목사님이 돈 이야기 한다고 말을 합니다. 목사님은 말합니다. “왜 돈 이야기입니까? 헌금 이야기지?” 온누리 교회 하용조 목사님을 말합니다. “세상에서 돈을 가장 잘 쓰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 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물드리고, 선교하고 구제하는 것처럼 돈을 가장 잘 쓰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에게 헌금을 더 많이 드리라고 부탁합니다.” 평생 예수 믿었어도 십일조를 뛰어 넘지 못하는 분들은 영적 어린아이입니다. 새벽기도를 뛰어 넘지 못하는 분이 있습니다. 영적인 어린 아이입니다. 육신에 속한 자들은 매사를 부정적으로 보고, 비판적으로 받아들입니다.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합니다. 남을 생각하고, 교회를 생각하고, 민족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원망 불평, 시기, 질투, 교만합니다. 분쟁을 일으킵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성령을 따르지 않고, 성령으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육신에 속한 자들은 스스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구원받았을까? 나는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을까? 주님 앞에 내가 내 놓을 것은 무엇인가?’ 예수 믿고 교회의 암적 존재로 살다 지옥에 간다면, 이처럼 불행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고린도 교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 교회에 있습니다. 어느 교회나 육신에 속한 교인들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자기의 상처를 극복하고 주님의 제자가 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구원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이 영에 속한 신령한 사람’(The spiritual person)입니다. 고린도전서 2:15-16절입니다.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2:15-16) 이런 사람은 주위에서 아무리 비판하고 판단하고 핍박하고 박해해도 먼저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모든 사건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백합니다. 나 자신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받는 훈련을 합니다. 이런 사람은 영적인 사람입니다.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지는 사람들입니다.

 

루터의 고백이 있잖아요? 빵을 가지고 있는데, 개가 계속 그 빵을 보고 있더랍니다. 주인의 손에 있는 그 빵을 주목하는데, 본인은 얼마나 하나님을 주목하나 반성하게 되었답니다. 어느 장로님은 이런 간증을 합니다. 개를 잡아 교인들과 함께 친교하려고 했습니다. 개를 묶어 놓고 인정사정 없이 두둘겨 팼습니다. 그런데 개를 묶어 놓은 끈이 풀어지는 바람에 개가 도망을 갔습니다. 집에 돌아와 보니, 개가 피투성이가 된 채, 주인을 보고 꼬리를 흔들며 장로님을 맞이하더랍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회개의 마음이 들었습니다. ‘자신을 따르던 개를 두들겨 패서 잡아 먹으려고 하던 주인을 뭐가 좋다고 그렇게 반갑게 맞이하는가? 나는 개 만도 못한 인간이구나.’ 그래서 개를 끌어 안고 통곡하며 울었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개만도 못한 장로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영적 계보는 육적인 자가 올라가지 못합니다. 육에 속한 신앙인은 절대 못 올라갑니다. 육신에 속한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영에 속한 사람만이 축복된 계보에 올라갈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영적인 사람, 성령님의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었으면 진짜로 믿어야 합니다. 우리 삶이 하나님께 예물되도록 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십니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1:5-6)

 

예수님의 족보에는 인간적으로 너무나 부끄러운 정도의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유대인 남자들은 3가지를 감사기도 합니다. “첫째, 남자로 태어난 것에 대한 감사. 둘째 유대인 것에 대한 감사. 셋째, 자유인이 것에 대한 감사.” 유대인들에게 여자는 숫자에도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도 남자만 5000명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장정도 남자만 숫자에 포함시켰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족보에는 5명의 여인들이 등장합니다. 여자 이름을 딴 성경도 있습니다. “룻기, 에스더

 

유다는 며느리였던 아람 여인 다말에게서 베레스를 낳았습니다(근친상간). 살몬은 가나안 여인이었던 기생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았습니다(매춘부). 보아스는 모압 여인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습니다(이방여인). 다윗은 헷 사람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에게서 솔로몬을 낳았습니다(불륜). 4명의 여인은 결코 정상적인 유대인이 아닙니다. 마지막 마리아만 유대인이었습니다.

 

헬라어에 의하면, 39번이나 낳다라는 동사가 능동태로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16,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나시니라는 수동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능동태로 바꾸면, “하나님이 마리아에게서 예수를 낳았느니라입니다. 다른 조상들과 다르게 예수님은 성령에 의해 동정녀로 잉태되어 탄생하셨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4명의 여인들의 과거를 다 폭로하고 기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이 죄 많은 이방인에도 불구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모두 다 용서함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영광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다말에게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라합에게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룻에게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밧세바에게 임했습니다.

 

우리 모습이 다 그렇습니다. 지난날 우리 죄악을 들춰 율법대로 심판을 받으면 이 땅에 살아 남을 존재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렇게 살아 남아 있다는 것이 감사한 일이고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특별히 어떤 남자가 용서받을 수 없는 지 아십니까? 눈이 단춧구멍만한 남자는 용서받을 수 있어도 예쁜 여자만 보면 눈이 당구공처럼 커지는 남자. 귀 뚫은 남자는 용서받을 수 있어도 귀가 딱 막혀서 아내 말을 도무지 듣지 않는 남자. 머리 카락이 없는 남자는 용서 받을 수 있어도 머릿 속에 아무 것도 든 게 없는 남자. 밥 많이 먹는 남자는 용서 받을 수 있어도 반찬 투정하는 남자는 용서 받을 수 없다. 어떠한 죄를 지어도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남자는 용서받을 수 있어도, 끝까지 자기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 남자는 용서받을 수 없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인들이 펴낸 [반성]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중에 소설가 이순원씨가 어머니에 대해 쓴 글이 있습니다. 중학교 때 학교에 가기 싫어했다고 합니다. 20리가 넘는 먼길도 힘들었지만, 학교에 가도 재미가 없어서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 많았다고 합니다. 어느 날, 학교에 가기 싫다고 하는 아들과 함께 어머니가 같이 나섭니다. 두 발과 작대기를 이용하여 산 길의 이슬을 털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의 몸빼 자락이 이내 이슬에 흥건히 젖었습니다. 어머니가 말씀합니다. “앞으로도 매일 이슬을 털어주마, 그러니 다른데 가지 말고 이 길로 꼭 학교에 가거라.”

 

그 말씀을 듣고 울지는 않았지만, 왠지 눈물이 터질 것만 같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생각합니다. 어머니가 이슬을 털어 주셔서 자기가 지금 이 자리에 있노라고. 또한 인생의 고비마다 어머니가 자기의 앞의 이슬을 털어 주신 것을 깨닫게 됩니다. 어머니가 아들 앞에서 털어주신 이슬이 작은 강을 이루었을 것인데, 아들은 어른이 된 뒤에야 어머니가 털어주신 이슬의 의미를 깨닫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늦게 깨달으면 후회가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지금이라고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지금 은혜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합니다.

 

베드로전서 4:1-2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벧전4:1-2)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지난 날의 죄악을 용서받았습니다. 우리는 다시는 정욕을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언제나 잊지 않고 감사하면 살아야 합니다.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네 호흡마저도 다 주의 것이니

세상 평안과 위로 내게 없어도 예수 오직 예수 뿐이네

크신 계획 다 볼 수도 없고 작은 고난에 지쳐도

주께 묶인 나의 모든 삶 버티고 견디게 하시네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네 나의 모든 것 다 주께 맡기니

참된 평안과 위로 내게 주신 주 예수 오직 예수뿐이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약속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영적인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육에 속한 사람이나, 육신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압니다. 은혜의 사람입니다. 우리의 사는 날 동안에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