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하신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
창세기 21:22-34
31 두 사람이 거기서 서로 맹세하였으므로 그곳을 브엘세바라 이름하였더라
32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언약을 세우매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은 떠나 블레셋 족속의 땅으로 돌아갔고
33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34 그가 블레셋 족속의 땅에서 여러 날을 지내었더라
포인트 워드: 하나님
활용: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시다. 우리는 유한하지만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하시다.
인터넷에서 나온 글입니다. 아주 뜨거운 여름날 오후, 개구리 3마리가 나뭇잎에 올라탄 채 유유히 강물에 떠내려가고 있었습니다. 나뭇잎이 강의 중간 쯤 이르렀을 때, 그 중 한 마리가 일어나 결심했다는 듯 단호하게 말합니다. “너무 더워, 난 물속으로 뛰어들테야.” 자, 이제 나뭇 잎에 몇 마리의 개구리가 남았을까요? “두 마리요!” 질문을 받은 사람이 말합니다. 하지만 틀렸습니다. 나무 잎에는 여전히 개구리 3마리가 남아 있었습니다. 어째서 그런가? 개구리 한 마리는 뛰어들겠다고 말하고는 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시멜로 이야기 중-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은 말합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 그러나 요즘은 하나 더 추가합니다. “아는 것을 실천해야 힘이다.” 맞는 말입니다. 아는 것을 행동에 옮기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은 대단한 힘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힘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다가 떠나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는 한 가지로 말합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해서.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기에 예수님을 섬기는 것을 중간에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는 것은 힘이다.”라는 문장에 “아는 것을 체험하라.”고 덧 붙이고 싶습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설명해 줍니다. 오늘은 영생하시는 하나님(33절)에 대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본문설명)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정착을 할 때, 블레셋의 통치자인 아비멜렉과 평화조약을 체결하는 장면입니다. 아비멜렉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시고, 번성케 하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318명의 적은 숫자로 북방 연합군을 물리친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축복의 종임을 알고 동맹을 맺고자 군대장관과 더불어 찾아 왔습니다. 이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도우심에 감사하여 나무를 심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면서 “영생하시는 하나님(엘 올람)”이라 부릅니다. 엘은 하나님, 올람은 시간 혹은 시대를 말합니다. 직역하면 시간의 하나님이지만, 의미상으로는 시간을 뛰어넘는 하나님을 뜻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이름을 “영생하시는 하나님”으로 불렀습니다. 그러면 오늘 “영생하시는 하나님”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첫째, 영생하시는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는 분이시다.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치 않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너의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창21:23)
아비멜렉이 아브라함과 맺고자 한 것은 동맹관계입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이 보통 인물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창세기 20장에서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를 빼앗았다가 하나님의 경고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꿈에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취한 이 여인을 인하여 네가 죽으리니 그가 남의 아내임이니라(창20:3).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 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 줄 알찌니라(창20:7)” 아비멜렉은 사라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취했지만, 하나님은 꿈에 엄청난 경고를 하셨습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과 그 숫자는 비록 작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동맹을 맺고자 했던 것입니다. 23절을 보세요. “나와 내 아들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치 않기를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은 하나님 앞에서 동맹의 서약을 합니다. 이것은 군사적 혹은 국가 간의 서약 이전에 하나님 앞에서의 서약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약속도 중요하지만, 하나님 앞에서의 약속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영생하시는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민23:19)
하나님은 진실하신 분입니다. 그러기에 그 입에서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십니다. “내 입은 진리를 말하며 내 입술은 악을 미워하느니라 내 입의 말은 다 의로운즉 그 가운데 굽은 것과 패역한 것이 없나니”(잠8:7-8) 하나님께서는 진리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은 늘 의로운 말을 하십니다. 생명 언어만 구사합니다. 그러기에 거짓을 말하는 자, 악을 행하는 자를 미워합니다. 오히여 공평한 자, 정직한 자를 사랑하십니다.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잠11:1) “한결같지 않은 저울 추와 말은 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잠20:10)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짓 약속이나 맹세에 대해 주의할 것을 일관성있게 강조합니다.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레19:12) 하나님의 이름으로 약속을 하고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약속을 하면 꼭 지켜야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영생하시는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약속을 지키는 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예화) 미국 개척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윌리엄 펜은 다른 백인들과는 달리 인디언들을 존중해 주었습니다.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어느 날 인디언들이 그에게 농담을 합니다. “펜, 자네가 원하기만 한다면 우리 땅을 다 가져도 좋네. 그러나 하루 동안 걸어서 돌아오는 땅만 주는 걸세.” 펜은 그들의 말을 듣고 다음 날 해가 떠오르자 길을 떠나 걷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해가 떨어지자 인디언들에게 돌아왔습니다. 인디언들은 농담으로 한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실행한 펜에게 약속한 땅을 주었습니다. 윌리엄 펜은 펜실베니아의 창시자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그 땅은 펜실베니아 시의 일부분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인디언들도 자기가 한 말을 끝까지 지켰습니다. 엄청난 땅을 윌리엄 펜에게 주었습니다. 말 한 마디 때문입니다. 그러면 전능하신 하나님은 얼마나 약속을 잘 지킬까요?
아비멜렉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함께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번성케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과감하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좋은 관계를 맺고 살 것을 약속하자고 제안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제안을 받아 들여 우물가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그곳을 브엘세바(맹세의 우물, 일곱의 우물)이라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입니다. 저와 영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믿음 훈련을 받는다면 반드시 승리할 날이 옵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사60:22) 작은 자가 천을 이루고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때가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믿음의 가문을 세울 수 있습니다. 한 나라와 민족을 축복하는 축복의 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둘째, 영원하신 하나님을 그의 자녀들을 높여 주신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맹세하리라 하고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늑탈한 일에 대하여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하매”(창21:24-25)
영원하신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의 지위를 높여 주십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에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일을 하십니다. 자녀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억울함 속에 있는 자녀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때로는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받게도 하십니다. 이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이 유한한 인간의 삶에 개입하신다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아비멜렉은 그랄지방에 살고 있는 블레셋 왕(창26:1)입니다. 한 나라의 왕으로 아브라함의 처를 취한 적도 있습니다. 그에게는 군대장관도 있었습니다. 잘 훈련된 군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1000명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소수 민족의 지도자입니다. 가나안 지방의 나그네입니다. 아무 힘도 없습니다. 나이도 100세가 넘었습니다. 몸도 연약한 자입니다. 방패도 없습니다. 적들이 우글거리는 땅에서 나그네로 사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아비멜렉과 1대1로 우호조약을 맺습니다. 계약은 조건이 비슷한 사람끼리 맺는 것입니다. 힘이 없는 민족은 속국이 되어 매년 조공을 바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이 계약을 맺게 하십니다.
본문에서 아브라함은 아비멜렉과 계약을 맺은 후에 엄청난 일을 합니다. 아비멜렉을 꾸짖고 있다는 것입니다. 힘이 없는 자라면 감히 불평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합니다. 아비멜렉의 부하들이 아브라함이 판 우물을 빼앗았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샘물의 소유권은 가장 큰 재산이었습니다. 특히 유목민에게 물은 가장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우물을 빼앗았다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가장 큰 타격을 입힌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사건을 참아 왔던 것입니다. 억울함을 표현하지 못하고 단지 기도만 했겠지요. 아비멜렉과 계약을 맺으면서 이 사건을 건드린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꾸짖고 아비멜렉은 책망을 받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아브라함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든든한 후원자이셨습니다. 아비멜렉이 사라를 취한 후 꿈에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 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 줄 알찌니라”(창20:7) 아비멜렉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함께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가 말합니다.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창21:22) 하나님이 아브라함 곧 소수 민족의 지도자를 아비멜렉 왕과 동일한 선에 놓아 주셨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는 방언이 다른 열국 백성 열 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을 것이라 곧 잡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하리라 하시니라”(슥8:23)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가 있는 중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말이 다른 이방 백성 10명이 한 명의 유대인에게 도움을 구합니다.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을 들었음으로 너희와 함께 가려 한다. 같이 가자. 너희와 함께 해야 희망이 있다. 너희는 하나님께 축복된 민족이다.” 포로로 잡혀간 민족 중에서도 하나님이 높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종종 인간관계가 불편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엘 올람)”을 기억해야 합니다. 관계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이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마5:44)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12:18)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아비멜렉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한 때 자기 아내를 빼앗은 자와 화친을 맺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평화의 사도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우리가 영원하신 하나님을 안다면 원수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화해의 차 한 잔이 어떨까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잘 섬기면 막힌 담이 허물어 집니다. 인간관계가 좋아집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잠16:7)
예화) 서종로 장로 부인
국민일보에 연재되는 동방주택 서종로 장로님의 일화입니다. 소아마비로 고생을 하고 하나님 은혜로 골수염이 치료받았습니다. 그런데도 못된 습관은 끊치 못했다고 합니다. 도박과 바람을 피우는 일입니다. “메뚜기도 한 철”이라고 신나게 놀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기 부인은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 것 알면서도 참았다고 합니다. 어느 날, 아내가 남편과 함께 젊은 여인이 있는 집에 갑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난리가 날 순간입니다. 그런데 부인 권사님은 따끔하게 경고를 했습니다. 며칠 후 젊은 여인이 권사님에게 찾아와서 사정을 했답니다. “어떤 댓가를 치를 테니, 장로님과 함께 살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었지만 절대로 헤어질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한참 실랑이가 오갔습니다. 주변에서는 간통죄로 감옥에 집어 넣어야 한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아내 권사님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고소 같은 것 안 해. 그런거 안 할 테니 두 사람 지금부터 맘 놓고 같이 살아. 그 대신 늙고 병들거나 이 여자가 괄시하거들랑 나와 새끼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와. 아무 소리 않고 받아줄 테니까.” 이 말을 듣고 남편은 고민을 많이 했다. 그리고 결국 집으로 돌아 왔다.
셋째, 영생하시는 하나님은 찬양받기 합당한 분이시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창21:33)
우물을 빼앗겼던 아브라함은 마음 고생이 심했을 것이다. 누구에게 표현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심정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서 새 힘을 얻었다. 아비멜렉에게 할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아브라함의 속이 시원한 순간이다. 문제가 해결되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문제가 해결되고 자신의 만족감에 도취되어 있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을 향해 제단을 쌓았다. “영생하시는 하나님”(엘 올람)을 찬양했다. 영생하시는 하나님을 예배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찬양한 것은 하나님만이 참다운 안위와 평강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브엘세바 우물가에 에셀 나무를 심었다. 이것은 앞으로 그곳이 좋은 지역이 될 것이라는 예표이다. 에셀나무는 일종의 상록수로 높이가 9m가 된다. 사막지대에 이런 곳은 다시없는 좋은 오아이스 같은 쉼터요, 삶의 터전이라 할 수 있다. 아브라함은 이것을 꿈꾸며 하나님께 예배드렸다. 솔로몬은 왕이 되고 나서 일천번제를 드렸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가 구하지도 않은 부와 영광과 지혜를 주셨다.
“예배의 성공이 인생의 성공이다. 예배의 실패가 인생의 실패이다.”
아브라함의 삶은 예배자의 삶이다. 장소를 옮길 때마다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다. 예배가 성도의 삶의 출발점이다.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함이다. 성경은 말한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예화) 하나님이 보여주신 10억분의 1의 기적
이지성 작가가 쓴 [하나님이 보여주신 10억분의 1의 기적]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는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쓴 글입니다. 1950년 3월 1일 수요일 저녁 7시 25분, 미국의 웨스트 사이드 침례교회에서 폭발사고가 있었다. 성가대 연습은 항상 수요일 저녁 7시 20분에 시작한다. 7시 25분이 폭발사고가 있었다. 그 충격으로 교회 건물이 무너졌고, 인근 라디오 방송국의 방송이 중단되었다. 주변 집들의 창문이 깨졌다. 성가대 연습실 바로 밑에 위치한 가스실에서 대폭발이 일어났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로 성가대원 15명이 전원 연습에 지각했다. 그 결과 한 사람도 다치지 않았다. 학자들은 15명 전원이 지각할 확률이 10억 분의 1이라고 한다. 놀라운 사실은 성가대원들은 성가대 창설이후 수 년동안 단 한 사람도 지각하거나 결석한 적이 없었다. 하나님이 놀라운 일을 행하셨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을 귀히 여기셨다.
하나님은 지금도 예배자를 찾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대하16:9)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3)
예배는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축복을 주고자 하는 통로입니다. 아무나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된 예배자를 축복하고자 하십니다. 이걸 아셔야 합니다.
결론
영생하시는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약속을 지키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단단히 붙잡으면 반드시 승리합니다. 영생하는 하나님은 자녀들을 높여주는 분입니다. 자녀들을 축복하십니다. 축복의 통로로 삼으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온 천하에 알리길 원하십니다. 이걸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축복의 주인공입니다. 마지막으로 영생하시는 하나님은 찬양받기에 합당한 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만을 예배해야 합니다. 그 분을 더욱 높여야 합니다. 그러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찌어다 구로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찌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사54:1) 잉태하지 못한 자가 예배할 때 생산의 기적이 일어난다고 말씀하십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로 인해 고민합니까? 그 순간 하나님을 찬양하세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역사가 일어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