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신 강단

승리를 주는 하나님

박도식 2021. 3. 22. 17:49

승리를 주는 하나님

 

출애굽기 17:8-16

8 때에 아말렉이 이르러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9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10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11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12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로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13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파하니라

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

15 모세가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16 가로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포인트 워드: 하나님

: 하나님은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이다. 날마다 우리에게 이기게 하신다.

 

오늘은 전쟁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분입니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15:57) 하나님이 날마다 이기게 하신다고 합니다. 본문에서는 여호와는 나의 깃발(여호와 닛시)라 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여러분들이 승리의 면류관을 쓰게 하시는 분입니다.

 

본문을 설명하면,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르비딤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물이 없습니다. 광야에서 물이 없으니 얼마나 힘이 들까요?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어김없이 원망과 불평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반석에서 물이 나오는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또 다시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말렉이 쳐들어 온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전쟁사가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아말렉이 침략했기에 이스라엘은 처음으로 전쟁을 합니다. ‘아말렉전쟁을 좋아한다.’는 뜻입니다. 아말렉은 전쟁을 좋아하는 민족이기에 이스라엘을 선제 공격했습니다. 아말렉은 공격하고 이스라엘은 방어를 하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아말렉은 이스라엘의 원수가 아닙니다. 창세기 3612절에 보면 에서의 손자입니다.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첩 딤나는 아말렉을 엘리바스에게 낳았으니 이들은 에서의 아내 아다의 자손이며”(36:12) 장자의 명분을 죽 한 그릇에 판 에서의 후손입니다. 아말렉은 에서의 혈통을 그대로 이어갔습니다. 에서의 인간적인 악성을 그대로 물려받은 후손입니다. 장자의 명분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오직 먹는 것과 싸우는 것만 중요하게 여겼던 사냥군의 후손입니다. 사냥꾼은 일생동안 사냥을 하지만 만족이 없습니다. 끊임없이 죽이고도 만족이 없습니다. 이것이 사냥꾼의 근성입니다. 아말렉이 그러한 후손입니다. 싸움을 좋아하는 민족입니다.

 

이스라엘은 아말렉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겼습니다. 이스라엘에 첨단 무기는 없었지만,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여호와 닛시로 계시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본문을 통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승리를 내 것으로 가져 올 것인가? 어떻게 해야 승리를 주는 하나님을 만날 것인가?

 

첫째, 기도를 통해 승리를 얻습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17:11)

 

아말렉은 잘 먹고 잘 훈련된 사람들입니다. 원래부터 전쟁을 좋아하는 민족입니다. 싸움꾼입니다. 아마 날카로운 칼을 가지고 쳐들어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훈련도 되지 않았습니다. 무기도 없습니다. 그저 몽둥이나 삽을 들고 나가 싸워야 했습니다. 모세 당시는 칼을 만들 수 없었습니다. 오합지졸입니다. 그 결과는 눈에 보이듯 뻔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겼습니다. 어떻게 이길 수 있엇습니다. 모세의 행동을 살펴보면 압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는 것입니다. 손을 들었다고 하는 것은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기도하니 하나님의 능력이 이스라엘 군인들에게 임했습니다. 몽둥이를 휘두르니 적들이 퍽퍽 쓰러집니다. 한 사람이 천을, 두 사람이 만 명을 쫓을 수 있는 힘이 임했습니다. 모세가 기도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능력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임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우리가 삼손을 생각해 보면 됩니다. 삼손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어 손에 아무 것도 없어도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음같이 찢었으나”(14:6) 여호와의 신에 감동될 때 삼손은 맨 손으로 사자를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임하면 엄청난 힘이 생겼습니다. 수 천명과 싸워도 지치지 않습니다. 말씀을 보며 감동을 받는 부분이 나귀의 턱뼈로 블레셋 사람 1000명을 죽이는 것입니다. “삼손이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손을 내밀어 취하고 그것으로 일천명을 죽이고”(15:15) 우리가 아무리 싸움을 잘하면 몇 명과 싸울 수 있을까요? 50명 될까요? 깡패들도 150으로는 절대 못 이깁니다. 힘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삼손은 100명과 싸워 이긴 것이 아니라 1000명과 싸워 이겼습니다. 하나님이 힘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기도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백성들에게 임합니다. 모세가 팔을 내리면 이스라엘이 패배합니다. 이것은 목회자인 제가 끊임없이 기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제가 기도하면 교우들은 생활전선에서 승리합니다. 중보기도의 힘입니다. 그런데 목회자가 기도하지 않고 놀러 다니면 교인들은 영적 생활에서 패배합니다. 이는 또한 부모들이 기도해야 할 이유입니다. 부모님들의 기도가 자녀를 돕습니다. 우리는 내 자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아무도 모릅니다. 내가 자녀들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듣고 자녀들을 보호해 줍니다. 천사들을 파송하여 위기 속에서 구해 줍니다. 그러나 부모들이 기도를 쉬는 동안 악한 영들은 자녀들을 마음껏 괴롭힐 수 있습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윗이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어떻게 하였습니까?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28:1-2) 압살롬이 아버지를 배반할 때, 다윗은 하나님께 두 손 들고 부르짖고 간구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셔서 도우셨습니다. 역대상 29장에서는 그의 인생의 마지막 모습을 설명합니다. 저가 나이 많아 늙도록 부하고 존귀하다가 죽으매 그 아들 솔로몬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대상29:28)

 

예화) 대학연합교회 김형민 목사

오관석 목사님의 며느리이자 대학연합교회 담임목사님이 김형민 목사님이다. 남편을 만나 미국 유학에 올랐다. 본인도 공부하고 싶었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에 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거실에 십자가 하나 걸어놓고 주님께 엎드려 기도하는 것 뿐이었다. “주여, 학교에 보내 주시옵소서. 학교에 보내 주시면 내 평생 하나님의 일에 힘쓰겠나이다.” 밤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어느 날이었다. 누군가 문을 똑똑 두드렸다. 빨강색 조깅 띠를 하고 있는 백인 할아버지가 잠시 피를 피하기 위해 들어왔다. 기도를 하다 흘린 눈물로 눈가가 젖어 있었다. 그가 묻는다. “왜 우느냐?” 그 때 그녀는 유창한 영어로 대답했다. “스쿨! 스쿨! 스쿨백인은 다음 날 자기 사무실로 오라고 했다. 그분은 대학 총장님이셨다. 4년간 공부할 수 있는 장학증서가 담긴 봉투를 주셨다. 공부도 잘 하지 못하고, 집안 배경도 없었다. 유학 비자도 없었고, 2만 달러(24백만원)의 학비도 없었다. 토플 점수도 없던 목사님에게 명문대학에 입학하게 하셨다. 그녀가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대학 총장을 보내 주셨다.

 

남편과 함께 한국에 왔을 때, 오영택 목사의 몸이 이상했다. 배꼽 아래 부분의 감각이 완전히 마비 된 것이다. 뜨거운 물도 찬물도 구분하지 못했다. 샤워를 하면서 살갗이 벗겨질 지경이었다. 병원에서는 원인도 모르도 치유방법도 모르는 불치의 병이라 했다. 중추신경이 벗겨지고 눈과 귀가 멀고 마침내 뇌를 마비시켜 식물인간이 되어 죽는 병이란다. 설교 할 때, 자신의 힘으로 강대상에 올라가지 못해 장로님들이 업고 올라가서 겨우 강대상을 붙잡고 설교해야 했다. 운전 중에 차 안에서 소변을 본 적도 있었다.

 

김형민 목사님은 불치병의 남편을 지켜보고 실망하기 보다 하나님께 기도했다. 서울중앙병원 영안실 앞에 차를 세워 놓고 한 달간 기도했다. 필사의 기도를 한 것이다. 그러나 변화가 없었다. 남편이 16세에 선교사가 되기로 서원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목사님은 말했다. “하나님과의 약속은 목숨이다. 하나님께 드린 약속은 받드시 지키고 죽어야 한다. 당신은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시아버지가 오관석 목사님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부흥사이다. 그래도 병을 고치지 못했다. 시부모님은 아들과 며느리가 선교사로 떠나는 것을 말렸다. 휠체어를 타고 비행기에 올랐다. 죽을 병이 걸린 사람을 데리고 사우디 아라비아로 갔다. 하나님이 낫게 하시리라는 기대도 없었다. 오직 한 가지, 하나님께 약속을 지키다 죽으리라는 다짐이었다. 하루에 9번 먹어야 하는 약은 공항에서 전부 버렸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사우디 아라비아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마비가 풀리기 시작했다. 나중에 축구도 했다. 그리고 신유의 은사가 임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남편이 하반신 마비가 되는 상황. 짐작이 갑니까? 차 안에서 소변을 봅니다. 화장실도 혼자 힘으로 갈 수 없습니다. 강대상도 혼자 걸어갈 수 없습니다. 오죽 했으면 영안실 앞에서 30일 동안이나 기도했을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살아계셨습니다. 목사님들 부부의 순종을 통해 살아계신 증거를 보여 주셨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16:24) 기도하면 하나님이 역사합니다. 기도를 멈추면 마귀들만 좋아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임재가 승리를 가져 온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17:9)

 

우리가 경험하는 승리는 엄격하게 말하면 기도에 있지 않습니다. 응답하시는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불교인들도 기도하고, 흰두교인들도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 죽은 우상에게 기도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모세가 손만 들고 있던 것이 아닙니다. 손에 지팡이를 붙잡았습니다. 9절에서는 분명히 내일 하나님의 지팡이를 잡고라고 합니다. 모세는 자기 경험을 의지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팡이, 약속의 지팡이를 붙잡았습니다.

 

모세에게 지팡이는 무엇입니까? 지팡이는 바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상징입니다. 모세가 5번이나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할 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찌니라”(4:17) 하나님이 함께 하심의 표시가 지팡이였습니다. 물을 피로 만드는 재앙에도 지팡이가 사용됩니다. 개구리 재앙에서도 지팡이가 쓰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에게 명하기를 네 지팡이를 잡고 네 팔을 강들과 운하들과 못 위에 펴서 개구리로 애굽 땅에 올라오게 하라 할찌니라”(8:5) 모세가 지팡이로 땅의 티끌을 칠 때에는 티끌이 이로 변했습니다. 홍해 바다가 어떻게 갈라졌습니까?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리라”(14:16)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잡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자 바다가 육지처럼 갈라졌습니다. 모세에게 지팡이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오늘 모세는 전쟁터에서 하나님의 지팡이를 붙잡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기에 승리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다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기도를 많이 해도 하나님의 임재가 없다면 어찌 그 기도가 응답이 되고 능력을 발휘할까요? 하나님이 역사하는 기도가 능력이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법궤를 가지고 나갔다(삼상4:3). 전쟁터에서 4000명 정도가 죽었으니 대 패배를 한 것이다. 이것을 만회하려고 법궤를 앞세우고 나갔다. 그런데 결과는 이스라엘의 패배였다. “블레셋 사람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육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이었으며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삼상4:10-11) 홉니와 비느하스가 누구인가?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이다. 불량자이다.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삼상2:12) 한 마디로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는 자였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이용하여 전쟁에서 승리하고자 하였다. 하나님은 거룩하지 아니한 자들이 법궤를 이용하여 승리하고자 할 때 참담한 패배를 주셨다.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으나 하나님은 역사하지 않으셨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이다. 하나님이 예배를 통해, 내 기도를 통해 우리와 함께하심을 느끼느냐가 중요하다. 잘못하면 종교행사로 끝날 수 있다.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 어떤 분은 말한다. “성령의 임재가 없다면 교회 간판을 붙이지 않습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 성령님의 임재가 있어야 한다. 성령의 역사하심이 없이 교회는 절대로 성장할 수 없다. 맞는 말입니다. 성령의 임재가 있어야 합니다.

 

여호와 닛시는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란 뜻입니다. 우리는 나무에 붙여진 깃발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서 고고학자들은 르비딤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천으로 만든 깃발을 사용한 흔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히려 지팡이 같은 데에다 번쩍이는 쇠조각을 붙인 것이 바로 한 부대나 종족을 상징하는 배너였다고 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라는 말은 본래 번쩍(반짝인다’(glisten)입니다. 그렇다면 골짜기 아래에서 싸우던 여호수아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산 정상에서 모세가 든 반짝이는 지팡이를 보았을 것입니다. 반짝이는 지팡이는 바로 자기 부대의 상징이며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이스라엘은 그 지팡이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기도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기도를 통해 진실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우리의 소망이며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1211-2절은 말씀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121:1-2) 인생의 싸움에서 진정한 승리를 열망하십니까? 그렇다면 이제 기도의 눈을 열어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를 주목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셋째, 내 안의 안의 아말렉을 죽여야 한다.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시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17:17)

르비딤 전투는 이스라엘과 아말렉의 싸움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싸움이 우리 안에 있다. 이것을 영과 육의 싸움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이스라엘과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살려는 아말렉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내가 사냥해서 배고파 죽게 되었는데 장자의 명분이 무슨 소용이냐? 어서 팥죽을 내 놓아라하는 인간적인 욕망이 우리 안에 있다. ‘내가 지금 이렇게 어려운데 예배가 무슨 소용인가? 헌금은 무엇이며 십일조는 무슨 소용인가?’ 이것이 내 맘 속에 있는 아말렉입니다. 우리 안에는 이 두 마음이 계속해서 싸움을 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육의 성품과 나를 거듭나게 하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5:17)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2:12)

 

내 안에 아말렉이 있습니다. 악한 본성이 발동을 합니다. 다른 사람이 원수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아내만 변하면 모든 것이 변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내를 구타하거나 무시합니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어떤 사람은 형제간에 원수가 되어 평생 등지고 살아갑니다. 어떤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원수로 여깁니다. 어떤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원수로 여깁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교인들끼리 원수를 맺습니다. 어떤 분은 자식이 웬수라고 합니다. 아닙니다. 사람들은 적이 밖에 있는 것으로 알지만 아닙니다. 적은 내 안에 있습니다. 내가 변하면 모든 것이 변합니다. 알고보면 내 안에 있는 아말렉이 나를 힘들게 합니다. 바울도 말합니다.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는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7:21-23)

 

어느 목사님은 말합니다. “목사가 살면 교회가 죽는다. 목사가 죽으면 교회는 산다.” 내 안에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있다. 철저히 육체만을 위한다. 이것이 아말렉이다. 이것과 싸워서 이길 때 우리는 진정한 승리자가 된다. 많은 사람들은 일생동안 어떻게 하면 남을 이기나, 어떻게 하면 남을 죽이나?’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하면 내 안의 아말렉을 이길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와의 싸움은 인생 최대의 싸움입니다. 내 안의 잘못된 정욕을 이길 때 진정한 승리자가 됩니다. 지배자는 남과 싸워 이긴 사람이지만, 지도자는 자기와 싸워 이긴 자입니다. 남을 이긴 자는 결국 자기도 무너집니다. 그러나 자기를 이긴 자는 승리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르비딤은 안식처, 쉼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곳에 물이 없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그래서 르비딤이 맛사 또는 므리바로도 불리웁니다. 맛사는 시험이라는 뜻이고, 므리바는 다툼이라는 뜻입니다. 7절입니다. “그가 그곳 이름을 맛사라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중에 계신가 아닌가 하였음이더라”(17:7) 르비딤에 아말렉이 쳐들어 왔습니다. 평화와 안식을 빼앗아 가려합니다. 우리가 싸워 이겨야 합니다. 모세는 기도했지만 여호수아는 칼을 들고 싸웠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르비딤이 될 수 있거나 므리바가 될 수 있습니다. 맛사도 될 수 있습니다. 아말렉을 물리치면 르비딤이요 천국이 됩니다. 그러나 아말렉에게 지면 다툼이 끊어지지 아니합니다. 제발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합시다. 기도와 말씀으로 승리하여 나에게도 남에게도 안식을 주는 르비딤을 만들어 갑시다. 할렐루야!